21.10.31 11:19최종 업데이트 21.10.3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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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쉽게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3년·1967년·1971년 직선제 대선을 치른 그는 1972년·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통대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대의원 숫자는 1972년에는 2359명, 1978년에는 2581명이었다.

박정희는 직선제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가 겪어야 할 난관들을 1972년·1978년에는 겪지 않았다. 경쟁자도 없었고, 득표율도 100%에 가까웠다. 1972년에는 무효표 둘을 제외한 2357표를 얻었고, 1978년에는 무효표 하나와 기권 셋을 제외한 2577표를 획득했다. 이랬기 때문에,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1979년 12월 5일 <경향신문> 1면에 이런 내용이 실릴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가 불합리한 것으로 보고 72년 10월 유신을 단행,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국민투표로 이를 확정시켜 8대 선거(72년 12월 23일)와 9대 선거(78년 7월 6일)에서 쉽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

그런데 쉽게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박정희뿐만이 아니었다. 훨씬 더 쉽게 된 사람도 있었다. 박정희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됐을 뿐 아니라, 박정희만큼의 정치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도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박정희만큼 쉽게 됐을 뿐 아니라, 박정희보다 '경제적'으로 당선됐다고 할 수 있는 이 인물은 10·26 사태(박정희 피살) 직후인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최규하다.


최규하는 박정희처럼 통대 선거를 거쳤다. 한편 박정희만큼의 정치 기반은 없었다. 이 점에 관한 한 박정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통대 선거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재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규하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남이 만들어놓은 독재 기반을 활용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의 처지에서는 꽤 경제적인 당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규하는 10·26 사태 직후의 혼란 속에서 당선되긴 했지만, 결코 무주공산에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력한 주자들이 각축하는 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후보롤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다(1979. 12. 6.) ⓒ 국가기록원

 
10·26 직후에 통대 선거 시스템에 가장 유리한 쪽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었다. 그래서 박 정권 2인자인 김종필이 가장 유력했다. 이때 치러질 대선이 박정희의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기는 했어도, 그 잔여 임기가 1984년 12월 26일까지 5년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김종필 같은 유력 주자가 의욕을 내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종필 사망 2년 전인 2016년 출간된 <김종필 증언록> 제2권은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 10·26 직후의 김종필이 유신체제 하의 통대 선거에 나설 의향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은 당시의 객관적 정확과 딱 들어맞지 않는다.

총재로 선출되고 사흘 뒤인 그해 11월 15일 공화당 의원총회 및 당무회의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것은 그가 5년여의 잔여 임기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루 뒤인 16일 그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선언이 온전히 그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다.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 따르면, 정승화는 15일 의원총회 직전에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모든 정계 중진들이 새 대통령으로 최규하 권한대행을 밀기로 합의한 것으로 아는데, 이제 와서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한다는 것은 정국에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라며 "결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설득하여 조정해주십시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의원총회 직전에 울린 계엄사령관의 전화 한 통은 즉각 효험을 발휘했다. 길전식은 '김종필을 공화당 후보로 추대하되 대통령으로 입후보시키지는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 말대로 다음날 김종필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승화는 애초부터 김종필이 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정치극"을 벌인 게 아닌가 하고 판단했지만, 그의 회고록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정부 고위 인사들은 '김종필이 추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김종필이 겉으로는 욕심이 없는 듯이 하지만 상황에 따라 대통령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이다.

김종필 역시 자신의 불출마가 어느 정도는 계엄사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은연중에 인정했다.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고 회고한 뒤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때 정치의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군부도 나를 경계했다"고 말했다. 최규하를 지지하는 군부 및 정승화의 견제가 자신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만 53세의 김종필은 당시 상황이 예측불허의 과도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최규하 권한대행 내각과 정승화 군부의 경계 때문에도 대선 행보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26 직후에 가장 유력했던 김종필은 그렇게 해서 대선 무대에서 밀려났다.

절묘한 상황

12월 6일 대선으로부터 불과 6일 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신군부 장군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최고 권력에 도전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 이들의 최대 과제는 정승화를 비롯한 구군부(육사 10기까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정승화 역시 그런 도전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힘은 계엄사령관으로서 비상시국을 관리하는 위치에서 나올 뿐이었다.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므로, 최고 권력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그의 입지가 위태해질 수도 있었다.

신민당을 이끄는 김영삼 총재도 대선에 의욕을 표할 상황이 아니었다. 공화당에 유리한 통대 선거 체제에서는 그의 당선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또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그가 유신의 산물인 통대 선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1979년 12월 1일 자 <경향신문> 3면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에는 후보자를 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정희가 치른 마지막 직선제 대선인 1971년 선거에서 공식적으로는 45.3%를 득표해 박정희(53.2%)에게 패했지만 부정선거만 아니었다면 그 이상을 득표했을 김대중 역시 1979년 대선에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통대 선거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1970년대 후반기에 박 정권의 집중 견제를 받아 수감 생활 등을 하느라 정치적으로 많이 지쳐 있기도 했다.

이처럼 유력한 인물들이 대선에 뜻을 두지 않거나 혹은 출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규하는 제10대 대선에 단독 출마했다. 여당의 유력 주자인 김종필, 야당의 유력 주자인 김대중·김영삼이 발이 묶인 상황에서, 또 군부 실력자인 정승화·전두환 등은 선거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10·26 직후의 혼란이 최규하에게 절묘한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 상황에 힘입어 최규하는 통대 선거라는 반역사적이고 지극히 간편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 여야 유력 주자들과의 경쟁도 전혀 거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가 영도적 대통령 혹은 황제 비슷한 대통령이 되고자 만들어둔 시스템의 두 번째 이용자가 됐다. 박정희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할 권력이라도 있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없이 그 시스템을 이용했다. 그래서 그의 처지에서 본다면 이 대선은 상당히 경제적인 선거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규하가 단독으로 출마한 제10대 대선은 이전의 통대 선거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반대표로 해석될 만한 표도 제법 나왔다. 재적 대의원 2560명 중에 2549명이 투표했고 그중 84표가 무효표, 11명이 기권자로 집계됐다. 95명이 실질적인 반대표를 던졌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 ⓒ 최규하기념사업회


최규하는 가장 쉽게 당선됐고 또 그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당선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그는 역사에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박정희 잔존세력의 기대와 관계없이 시대와 국민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유신체제를 청산하고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채, 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를 두 차례(12·12 및 5·17)나 당했을 뿐 아니라 5·18 광주 학살도 방치하고 말았다.

10·26 이후의 호기를 역사 발전에 활용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물을 선출했다는 점에서, 1979년 대선은 이전 대선들 못지않게 '비경제적인 대선'이었다. 역사발전을 추동하기는커녕 비상 상황을 관리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을 뽑았다는 점에서, 국민이 투입한 관심과 에너지와 세금에 비해 국민이 얻은 것은 거의 없는 지극히 비경제적인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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