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7 12:25최종 업데이트 21.10.27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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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씨가 선서하는 모습. ⓒ 연합뉴스

 
10월 26일 세상을 떠난 노태우씨는 신군부 정권 2인자이기는 했지만, 단순한 2인자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정권 내에서 두 번째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2인자이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 받은 여타의 2인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이승만 정권 2인자인 이기붕이나 박정희 정권 2인자인 김종필과 크게 달랐다. 이기붕과 김종필은 1인자 지위를 끝내 잇지 못했을 뿐 아니라 1인자의 아랫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떨쳐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 노태우는 전두환을 뒤이어 대통령이 됐을 뿐 아니라, 신군부 정권의 출현 및 존속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그의 위상은 전두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과도 달랐다. 장세동 역시 신군부 정권 성립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지만, 그는 전두환의 수족 같은 부하라는 이미지를 끝내 탈피하지 못했다.

12.12 쿠데타, 노태우의 지분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인 동시에 국군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한 1979년 12·12 쿠데타는 전두환의 주도로 일어나긴 했지만 노태우 9사단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12·12 때 반란군에 맞서 싸운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의 회고록인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에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을 지시하고 7시 15분에 서울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 첫 총성이 울리고 7시 25분에 정승화가 공관 밖으로 끌려나온 뒤부터 대결 상황을 주도한 쪽은 반란군이었다.

그러다가 저녁 8시에 장태완이 수경사령부에 도착한 뒤부터 정부군이 대응 태세를 갖췄다. 장태완이 밤 10시에 한강 교량을 차단해 반란군의 강북 진출을 막고 10시 50분에 반란군 수뇌부에 대한 공격 준비 명령을 내린 뒤부터는 전두환 측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공수부대의 가담과 더불어 노태우의 9사단 출동 명령이다. 11시에 노태우는 참모장 구창회에게 전화를 걸어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서울 중앙청(광화문 안쪽) 앞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고, 9사단 29연대는 13일 새벽 1시 30분에 서울 북부 구파발을 통과했다.
  

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는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연합뉴스

 
이날의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발전했다면, 아무래도 반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군의 병력과 화력이 훨씬 우세했기 때문이다. 전면전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정부군 사령관들이 안보 문제를 의식해 확전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휴전선 너머 북한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정부군과 반군 모두 전방부대까지 동원할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대담하게 전방 부대를 서울로 이동시켜 반전을 도모한 인물이 노태우다. 그가 얼마나 대담했는가는 12·12 얼마 전에 9사단 지역에서 사단 병력과 무장공비의 충돌이 있었다는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다.

북한군과의 충돌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9사단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냈다는 것은 노태우가 겉보기와 다르게 과감했을 뿐 아니라 이 쿠데타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그는 향후 신군부에서 2인자에 더해 제2대 주주의 지위를 갖게 됐다. 그가 이기붕·김종필 같은 2인자와도, 장세동과도 달랐던 결정적 이유가 여기 있다.

새 간판

노태우는 전두환 정권 2년 차인 1981년 7월 15일 육군 대장에서 전역하고 다음날 행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임명된 직은 정무제2장관이다. 그 뒤 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거친 그는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을 계기로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이때 전국구 의원이 된 그는 2월 23일 민주정의당(민정당) 2인자인 대표위원직에 임명됐다.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이 그를 대리인 격인 대표위원에 임명한 이유는 2·12 총선에 패배해 정국 주도권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자신의 권한을 침해하는 허화평·허삼수 같은 강성 참모들을 내보낸 뒤인 1982년 하반기부터 1인 체제를 굳혀 나감과 동시에 강경 색채를 누그러트리려 애썼다. 그랬다가 1985년 총선 패배로 낯선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노태우를 새로운 간판으로 내세우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6.29 선언을 하는 노태우 후보 ⓒ 자료사진


노태우가 간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지 상으로 전두환과 중복되지 않아 전두환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군부 정권의 대주주여서 정권 내에서 새로운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전두환은 서울올림픽 준비에 전념하고 싶다며 대표위원직을 고사하는 노태우에게 "작금의 여론을 보더라도 좀 부드러운 사람이 당을 맡아 국민과 화합하는 당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 같소"라며 "그러자니 나로서는 당신밖에 없지 않소"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국민과 화합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국민들 앞에서 자신감을 잃은 전두환은 1982년 이후의 1인 체제에서 탈피해 자신과 노태우의 색깔이 가미된 새로운 정권의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했다. 전두환이 이런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노태우의 위상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 못지않게 책임  

노태우가 정권 2인자면서도 어느 정도 독자 영역이 있었다는 점은 6월항쟁 기간에도 나타났다. 노태우가 전두환과 한편이기는 하지만 최측근 그룹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 이때도 드러났다.

항쟁이 벌어진 1987년 전반기에 민정당 정권을 주도한 것은 노태우가 이끄는 온건파가 아니라 장세동이 이끄는 강경파였다. 장세동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 조치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그의 힘은 안기부장을 사임한 5월 26일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런 그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기여한 것이 6월 19일 제임스 릴리 미국대사를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경고 메시지다.

그해 7월 5일 자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레이건의 메시지는 '시위 진압 자제', '반대파와의 대화' 등을 담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그 직전까지 군대 동원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전두환 정권 내에서 강경파가 힘을 잃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태우가 입지를 넓히면서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도 했지만 그가 어느 정도는 전두환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 내란과 군사 반란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 등을 선고 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가 사면됐다. ⓒ 오마이뉴스

 
그 같은 거리감은 1988년 2월 25일 퇴임을 전후해 전두환이 시도한 '상왕 구상'이 결국 노태우에 의해 무산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해 3월 6일 자 <조선일보> 기사 '원로자문회의 비대(肥大) 기구로 발족'이 "국가원로자문회의가 거대한 행정부처의 성격을 띤 기관으로 발족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두환은 퇴임 뒤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자격으로 노태우 정부를 배후에서 조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7년 단임제 약속을 사실상 무산시키는 이 같은 상왕 구상이 물거품이 된 것은 국민과 야당의 반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정부의 신속한 조치 때문이기도 했다. 그해 3월 8일 자 <동아일보> '원로회의 조직 축소 검토'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이 퇴임한 지 보름도 안 된 시점부터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축소를 검토했다. 이 역시 노태우가 2인자이기는 했지만 제2대 주주이기도 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노태우가 단순히 친구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게 아니라 독자적 역할과 지분을 갖고 전두환 정권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정권 2인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두환이 쉽게 범할 수 없는 독자 영역을 갖고 제5공화국 정권과 함께했음을 알려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가 이달 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 묘소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2019.8.23 ⓒ 연합뉴스

 
이는 노태우 역시 5·18 학살과 5공 정권의 과오에 대해 전두환 못지않게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국민 앞에 참회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기는 했어도, 또 아들 노재헌씨가 광주에 가서 사과하기는 했어도, 노태우가 할 일을 다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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