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6 13:07최종 업데이트 21.10.2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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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14

민란에 참여한 농군들의 최후 거점은 병영성이었다. 병영성을 굽어보던 정태신 파총은 말고삐를 당겼다. 일자진으로 대오를 정비한 군사들을 향해 돌아선 그가 언월도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출중한 분전으로 반란 역도들을 모두 격파했다. 오늘이 마지막 작전이다."

정태신 파총의 목소리는 오늘도 대오를 휘어잡을 만큼 우렁찼다. 군사들을 압도하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내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계속되는 그의 사자후는 모두 내 귓등을 스쳐 지나갔고 무거운 내 가슴은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의 불타는 눈동자는 더 이상 내 가슴에 불을 당기지 못했다. 나는 그가 곧 사용하게 될 진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사용한 학익진. 지금 횡으로 길게 일자진을 펼친 것은 양쪽 끝의 대오를 학의 날개처럼 펼쳐 올리면서 성을 포위 공격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아군의 화력과 병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학익진은 적을 포위-섬멸하는 진법이었다. 그는 병영성을 타격해서 농군들을 패퇴, 해산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학익진을 쓴다는 것은 도주로를 차단하고 성 안의 농군들을 완전히 절멸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잔당들만 남았다. 최후의 잔당들을 철저하게 응징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대역죄를 저지르려는 자들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치켜든 정태신 파총의 언월도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떨리지 않는 가슴으로 그의 사자후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그가 결심하면 천길 불 속이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던 나였다. 그의 언월도가 가리키는 곳이라면 지옥을 향해서도 주저 없이 돌진했을 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눈길은 사자후를 토하는 그가 아니라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병영성으로 향했다. 성문 위에는 곧 우리의 총과 활, 창과 칼에 의해 시체로 변할 농군들이 서 있었다.

지난 새벽 박한 초관은 우리 경위감원 7명을 이끌고 은밀하게 병영성 주변을 정찰했다. 병영성을 둘러싼 삼면의 목책은 곳곳이 뚫려 있었다. 허점이 수두룩했다. 서쪽 방면의 목책이 가장 허술했다. 나는 박한초관에게 이제 쓸모도 없어진 경위감원들을 선봉대로 투입해달라고 했다. 목책의 형태만 남은 서쪽 방면으로 치고 들어가서 기선만 확실히 제압하면 오합지졸인 농군들이 줄행랑을 칠 것이 뻔했다. 도망치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박한초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조운진이 사용되어야 한다...파총님이 그럴 것 같아?"
"그럼, 오늘도 학익진을..."
박한 초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조운진인가 뭔가, 그것만 해주면 여럿 고생할 것 없이 우리가 다 해결한단 말입니다. 훈련만 잔뜩하고 한번도 못 써본 그거, 한 번 써보면 좋잖습니까."

백무현이 나섰다. 조운진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새처럼 흩어졌다 구름처럼 무리 지어 싸우고 다시 이동하는 변화무쌍한 진법이었다. 자유롭게 이동하며 분산과 집결을 반복하는 고도의 진법인 조운진을 유일하게 훈련시킨 지휘관이 정태신 파총이었고, 그것을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가 우리였다.
"너희들의 말을 들어줄 파총님이 아니다."
"그러니까 초관님께서 조운진을... 초관님 말씀은 파총님께서 듣지 않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박한 초관의 눈치를 살폈다. 박한 초관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파총님의 작전 목표는 위력시위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천천히 포위해 들어가면서 안전하고도 완전하게 섬멸하는 장면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그런데 왜 위력시위도 안 되고 중앙통제도 안 되는 조운진을 써서 군병들을 위험 앞에 노출시키겠어?"
"위험하잖습니다. 초관님은 뒤에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저희가 몸을 좀 풀고 돌아온단 말입니다."
백무현의 말에 박한 초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내가?"
다칠까봐 안 된다고 하는 줄 아냐, 박한 초관이 하지 않은 말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와 백무현은 더 말하지 못했다. 넋두리처럼 한 마디를 보탠 것은 남창일이었다.
"꼭 이렇게 다 죽이기까지 해야 합니까?"
"그렇게 싫냐?"
"누가 좋겠어요. 우리도 군대 안 왔으면 저쪽에 가 있었을 텐데."
앞뒤 재지 않는 남창일을 바라보는 박한초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돌아가자."

정찰을 마치고 귀대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곧 공격이 개시될 것이고 병영성 안에 남은 무지렁이 농군들은 시체로 변할 것이다. 나는 우리 대오 앞에 서 있는 박한 초관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을 타고 일자진의 중앙에 선 정태신 파총에게 눈길을 옮겼다.

파총 왼쪽의 푸른 대장기가 펄럭이면서 정태신 파총의 얼굴을 가렸다. 오른쪽에는 흰 바탕의 대장기가, 등 뒤로는 황색 바탕의 대장기가 아침 바람에 펄럭였다. 화염을 뚫고 구름 사이로 비상하는 용이 꿈틀거리는 대장기는 야전 신호용 수기였다.
화염을 상징하는 붉은 깃이 수탉의 벼슬처럼 뾰족뾰족한 대장기의 테두리를 바라보며 나는 간절히 빌었다. 곧 떨어질 그의 공격명령이 학익진이 아니기를. 제발,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민란의 마지막 진압 작전만큼은 포위-섬멸전이 아니기를. 농민들을 모두 시체로 바꿔놓지는 않아도 되기를.

마침내 정태신 파총은 언월도로 하늘을 가르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나는 귓바퀴를 세웠지만 바람과, 바람에 밀리는 대장기의 펄럭이는 소리에 그의 명령을 알아듣지 못했다. 조운진이기를, 아니면 지금 이대로 일자진으로 밀고 들어가기를, 제발 학익진만은 아니기를. 그러나 바람을 가르고 울려퍼지는 나발소리는 내 마지막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빠바라 빠- 빠바라 빠-
뒤이은 북소리.
두구두 둥- 두구두 둥-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라며 야전 신호용 대장기를 바라보았다. 좌우로 두 번씩 높이 치켜드는 대장기는 분명하게 학익진을 알렸다. 함성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오의 중앙이 천천히 전진을 시작했고, 대오의 양쪽 끝은 빠르게 전진하며 날개를 펼쳐 성곽을 좌우로 포위해 들어갔다. 사정거리에 미치지도 못하는 화살이 날아왔다. 농군들은 총이 없거나 있어도 탄환이 이미 떨어진 것 같았다. 선두에 선 팽배수의 방패에 화살이 꽂히는 지점에서 포수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대오는 전진을 계속했다. 포위망을 좁혀가자 성벽 사이의 뚫린 구멍으로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왔다. 그러나 쏟아지던 화살도 잠시였다. 정작 확실한 사정거리에 들어갔을 때 날아오는 화살은 몇 없었다. 오합지졸들답게 써야 할 순간이 오기 전에 화살을 다 쓴 것 같았다.

잠시, 소강상태 속에서 탐색전이 이어졌다. 곧 상대가 총이 없는 것이 확인되었고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가장 신속하게 포수대를 전진배치한 것은 박민규였다. 대장기의 총공격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박민규는 포수대에 탄환장전 명령을 내렸다. 박민규의 입에서 일세사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나와 백무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에게 눈짓을 보낸 백무현이 양손에 든 칼을 치켜들고 달려나갔다. 방패를 들고 잔뜩 긴장한 채 포수대를 엄호하며 전진하는 팽배수를 제치고 달려나가는 백무현을 따라 나도 달려나갔다.
"같이 가!"
소리를 치며 뒤따른 것은 남창일이었다. 나머지 경위감원 넷도 남창일과 함께 달려 나왔다.
"서, 거기 서."

뒤늦게 우리를 발견한 박한 초관이 소리를 치며 달려왔지만 이미 뒤에 선 병사들의 함성에 묻혀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휘관인 박한 초관이 우리를 쫓아 달려오자 영문도 모르는 병사들이 덩달아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사격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된 박민규가 얼마나 길길이 뛰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작전 때마다 포수대를 앞세워 농민들을 가장 많이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온 박민규였다. 비겁하게 포수대 뒤에 몸을 감추고 총기도 없는 농민들을 야비하게 살육하는 것을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서쪽 목책을 돌파해 들어간 백무현의 쌍칼은 오늘도 우리만 보기 아깝게 현란했다. 그의 칼등을 맞고도 한 방에 넘어가지 않는 농군들은 여지없이 뒤따라 날아가는 그의 발차기에 넘어갔다. 그의 옆에서 발과 주먹으로 농군을 상대해나가는 나의 처리 속도는 그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춤거리자 뒤에 섰던 남창일이 나섰다.

"넌 등이 없다며?"
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밀었다.
"네놈들, 오늘 끝나면 군령위반으로 다 처넣을 거야."
어느새 쫓아온 박한 초관이 눈을 부라리며 백무현의 왼쪽을 맡고 나섰다.
"헤헤, 우리 쳐넣으려면 칼 맞지 말아야 함다."
돌려차기로 농군의 명치를 가격하는 와중에도 백무현은 농담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 자식들아, 네 놈들이나 뒈지지 말아. 시체는 영창에 못 처넣으니까."
박한 초관도 총신이 짧은 마상총으로 몰려오는 농군들을 향해 발사하며 맞받았다. 그가 쏜 총에 다리를 맞은 농군이 쓰러지자 함께 달려오던 농군들은 몸을 돌려 도망을 쳤다.

"오늘, 솜씨가 형편없습니다."
나 다음의 명중률을 가진 박한 초관이 농군을 한 방에 보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래, 임마."
농담으로 받던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깜짝 놀란 나는 몸을 피하며 돌아보았다. 활을 든 농군 하나가 쓰러지고 있었고, 화살은 하늘로 치솟는 중이었다. 쓰러진 그의 뒤로 농군들 한 무리가 몰려왔다. 모두 열일곱이었다. 우리는 박한 초관까지 여덟이었다.

"개죽음 하고 싶잖음 토끼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두 배가 넘는 머릿수를 믿고 덤벼드는 농군들을 향해 백무현이 거침없이 마주 달려나갔고 나와 박한 초관이 그의 양쪽에서 뛰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백무현이 셋, 나와 박한 초관이 둘씩, 나머지 경위감원들도 하나씩 주저앉히자 겁을 먹은 농군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놈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천천히 쫓아가기 시작했다. 남창일이 다급하게 소리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피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옆구리로 삼지창이 파고드는 중이었다. 우리가 쫓아가는 길목에 숨어 있던 녀석이 옆에서 삼지창을 찔러온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칼을 치켜들었지만 그 순간 드는 생각은, 죽었네, 그것 하나였다.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한 그 다음 순간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삼지창을 든 놈이었다. 분명 내 칼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놈의 옆구리에는 남창일의 단창이 깊숙이 꽃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왼쪽!"
나는 늘어뜨렸던 칼을 들고 물러서며 번개처럼 왼쪽을 살폈다. 창에 찔린 백무현이 주저앉고 있었다. 나는 백무현을 뛰어넘었다. 몸을 돌려 도망치려는 놈을 가로로 그었다. 박한 초관이 백무현의 찔린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한 초관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나는 쾌자를 벗어던지고 속저고리를 찢어 백무현의 가슴에서 뿜어나오는 피를 막았다.

"나, 죽는 거냐?"
웃어 보이려고 애쓰는 백무현에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 씨팔.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는데..."
백무현이 힘겹게 왼손을 들어 보였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낀 같은 모양의 은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약지의 반지는 그의 것이었고, 새끼손가락의 반지는 그가 수없이 자랑한 정혼녀의 것이었다.
"전해 줘..."
"전하긴 뭘 전해. 형이 가지고 가야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젖는 백무현의 눈가로 물기가 타고 내렸다.

"이름이 뭔데?"
백무현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여동생."
"형 정혼녀 아니고?"
"그런 거 없어..."
"뻥쟁이는 이흥완이 아니고 형이네."
"여동생 시집보내야 하거든... 가족이 나뿐이니까."
백무현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박한 초관이 그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병영성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포수대를 앞세우고 보이는 대로 총질을 하며 들이닥치는 박민규의 뒤로 대장기가 펄럭였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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