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6 18:57최종 업데이트 21.10.1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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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6일 광주 염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 회원들과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일 월드컵이 있었던 2002년은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노무현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한 해였다.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곤두박질한 뒤 다시 올라간 한 해였다.

그해 4월 27일 민주당 서울 경선에서 후보로 확정된 그는 지금의 이재명 후보가 얻은 50.3%보다 훨씬 높은 72.2%를 기록했다. 일찌감치 1위를 굳힌데다가 최대 라이벌 이인제가 그해 4월 18일 사퇴함에 따라 홀가분해진 그는 4월 20일 부산 경선 때는 '나를 찍을 필요가 없다'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전라북도에서도 1등을 했고 전라남도에서도 1등을 했으니까 오늘 부산 시민들은 넉넉한 아량으로 우리 정동영 고문 1등 되게 한번 화끈하게 밀어주십시오."

롤러코스터 노무현

그랬던 그가 한화갑 대표와의 투톱 체제로 치른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 연달아 패하면서 입지가 뚝 떨어지게 됐다. 4년 전인 199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기초단체장 84석과 광역단체장 6석을 획득했었다. 그러나 월드컵 축구 D조 예선 한국-포르투갈 경기를 하루 앞둔 6월 13일의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44석과 광역단체장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8월 8일 재보궐선거도 참패였다. 민주당이 의석을 가졌던 7곳과 한나라당이 가졌던 6곳을 포함한 총 13곳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은 단 2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273석 중 133석을 얻었던 한나라당은 8·8 재보선을 통해 과반수에서 2석을 더한 139석을 확보하게 됐다.
  

27일 민주당 대선후보 서울경선에 이어 열린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당 새 대표에 선출된 한화갑 후보가 노무현 대선 후보와 악수하고 있다. 2002.4.27 ⓒ 이종호

 
노무현-한화갑 투톱 체제 하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노무현의 입지는 좁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주당에서 후보 교체론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 누구보다 빨리 대처한 인물이 다름 아닌 노무현이다. 그는 후보로서 재신임을 받겠다는 입장을 스스로 천명했다.

지방선거 다음날 발행된 <부산일보> 기사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 성명 내용'은 "민주당 노무현 대선후보는 14일 대국민성명을 통해 6·13 지방선거의 패배가 당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심각한 상황이란 점을 인정했다"고 한 뒤 "노 후보는 성명에서 재신임 방식을 당에 일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측근들에게는 재신임과 관련한 어떠한 논의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보도했다.

스스로 재신임을 요구해야 할 정도로 노무현의 위상이 뚝 떨어진 이 상황에서, 갑자기 급부상한 인물이 4선인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자 한·일 월드컵 공동조직위원장인 그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4강 신화와 함께 국민적 주목을 받게 됐다. 노무현이 아닌 정몽준이 가장 유력한 주자로 떠오른 것이다.

한·일 월드컵(5.31~6.30)을 계기로 정몽준의 위상이 얼마나 빨리 바뀌었는지는 두 개의 보도에서 확인된다. 그해 5월 10일자 <국제신문> '선택 2002 대선 레이스 개막, 노-이 양자구도로 가나'는 "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서울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후보로 공식 선출됨에 따라 올 12월에 치러질 16대 대통령선거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이 후보의 양자 구도가 중심축이 되고 제3후보의 등장이 변수가 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전망"이라며 노무현 대 이회창 구도로 대선을 전망했다.

그런 뒤 "잠재적인 제3후보군으로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무소속 정몽준 의원 등을 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때만 해도 정몽준은 잠재적인 제3후보 중 하나였다.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21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분권적 대통령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2002.11.21 ⓒ 이종호

 

월드컵 폐막 뒤에는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다. 8월 8일자 <매일경제> '대선 여론조사 결과 3자 대결 정몽준 1위'는 "정 의원이 신당 후보로 나설 경우 한나라당 이 후보와의 가상 양자대결에서 43.3%의 지지를 얻어 39.6%에 그친 이 후보를 오차 범위를 넘어선 3.7%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또 "정 의원이 신당 후보로 나서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3자 대결을 벌일 경우에도 정 의원은 32%를 얻어 이 후보(31.6%)와 노 후보(23.7%)를 누르고 선두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어떤 경우든 정몽준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정몽준이라는 변수

이랬기 때문에 노무현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민주당은 분당 위기로 치닫게 됐다. 8월 17일자 <세계일보> '민주당 분당 위기 직면'은 "안동선 상임고문이 16일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전격 탈당하고 반노파들이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민주당은 분당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이 얼마나 어이없는 처지에 놓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8월 19일자 <동아일보> "민주당, '노무현-정몽준 직접 담판뿐'"은 "당내 일각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노무현 후보와 정 의원 간의 담판론까지 제기하고 있다"며 "민주당의 한 인사는 '어차피 신당 창당의 핵심은 노 후보와 정 의원이고, 신당 창당의 최대 걸림돌도 두 사람 간의 경선 방식인 만큼 두 사람이 만나 담판을 지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2년 10월 21일 모임을 가진 민주당 내 반노 그룹인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 이종호

 

3월 9일 제주에서 시작해 4월 27일 서울에서 끝난 '16부작 정치 드라마'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한테 '후보로 남고 싶거든 정몽준과 담판 짓고 그를 데려오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까지 겪은 노무현이 9월 들어 당내 신임을 회복하더니 국민통합21을 창당한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고 12월 대선까지 승리했으니, 2002년은 롤러코스터 같은 한 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대반전을 예고하는 조짐들이 있었다. 정몽준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8월 8일 보도로부터 3주 뒤의 기사에서 그런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9월 2일자 <한겨레> '민주당 신당 논의 찻잔 속 태풍?'은 "한때 민주당을 태풍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신당 논의가 급격히 소멸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 뒤 "노무현 후보 쪽은 자신들의 대선 전략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짤 수 있게 됐다며 반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8월 하순 들어 노무현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반전을 촉발시킨 그 같은 요인들 중 하나는 정몽준 쪽에 있었다. 8월 19일 그는 민주당 당발전특위 위원장인 박상천 최고위원과 전격 회동했다. 다음날 박상천 최고위원이 '신당 추진 원칙에 합의했다'고 밝히자, 정몽준은 '그런 합의를 한 일이 없다'며 공식 부인했다.

이 장면은 민주당을 격분케 만들었다. 추미애 최고위원 같은 이들은 '무슨 자격으로 정몽준을 만난 것이냐?'며 박상천 최고위원의 대표성을 문제 삼았다. 전반적으로는, 박상천보다 정몽준에게 분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몽준이 단칼에 합의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당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8월 22일자 <국민일보> "'정몽준 환상 깨야' 반몽 정서 확산"은 "민주당의 21일 당무회의에서는 정몽준 의원에 대한 성토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면서 "한 사람의 입만 쳐다보고 민주당 의원 131명이 춤을 추어서야 되겠느냐"는 발언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돌변한 민주당 분위기는 정몽준이 민주당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고, 이는 노무현을 흔들던 세력을 멈칫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통령 후보와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가 6일 낮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02.11.6 ⓒ 이종호

 
노무현이 대선후보 지위를 되찾도록 도와준 또 한명은 박근혜였다.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유력 대선주자가 됐지만 조직력이 탄탄치 않았던 정몽준은 한나라당에서 이탈해 독자노선을 걷는 박근혜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퇴짜를 놓았고, 이것이 정몽준의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결정타 중 하나가 됐다.

민주당 박상천을 곤란케 했던 정몽준은 이틀 뒤인 8월 22일 박근혜를 만났다. 이날 그는 2시간 동안 점심을 함께하면서 박근혜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8월 23일자 <경향신문> '민주 회의론에 방향 선회'는 "정 의원은 박 대표와의 회동에서 '힘을 합치자'며 신당 창당을 처음으로 공식 제의했다"면서 "개혁 이미지가 강한 박 대표를 자신의 대선 행보에 동참시킴으로써 지지율을 계속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고 해설했다.

박근혜의 거절로 인해 정몽준은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민주당과도 손잡기 힘들고 박근혜와도 합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조직력을 보강해줄 두 개의 우군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은 노무현에게 재도약의 시간을 만들어줬고, 노무현은 이를 놓치지 않고 운명적인 대통령의 길로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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