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5 07:28최종 업데이트 21.11.15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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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두 번째 사연은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삼택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국가보안법은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남용되어 왔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 체제 강화를 최우선 국가 과제로 삼으며 사회를 통제하였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2번의 연임만 가능했는데 박 정권은 1969년 8월 7일 대통령의 3회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개헌이 추진되던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겪던 시기와 일치한다. 1969년 개헌을 추진했으나 당시 야당의 김대중 후보 지지율이 상당히 높았으므로 박정희의 당선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실제 야당 김대중 후보는 1971년 4월 27일 이루어진 제7대 대선에서 45.2%를 득표했다. 개헌과 대선을 치르며 정치적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정권의 위기에 맞춰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적용 인원도 증가했다.
 

국가인권위원회 2009. 국가보안법 적용 상에서 나타난 인권실태, 26쪽 ⓒ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위와 같이 1968년에서 1970년 사이, 1972년 등 정권의 위기시기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기소인원이 여타 다른 시기보다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안기구에 의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등의 조작 사건은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재일동포를 비롯한 일본과 관련된 사건, 두 번째는 의문사 사건, 세 번째는 조업과정에서 북으로 나포된 피해 어부들 사건, 네 번째는 월북자 및 행불자 가족을 묶어 간첩단으로 조작하는 사건이다. 이중 첫 번째 유형인 재일동포 등 일본과 관련된 조작사건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간첩 통계에 의하면 1970년에서 1979년까지 일어난 간첩사건 681건 중 204건으로 전체 30%에 해당했다.


일본 관련 사건이 많은 이유는 수사관이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기 위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자와 접촉한 사실을 입증할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재주일대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직원이 작성한 신원확인서만 있다면 접촉한 재일동포는 북의 지령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재일동포 대부분은 일제 때 강제 징용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그의 후손 그리고 그 이후 도일한 사람들이다. 특히 제주는 4.3 사건 전후로 상당수 도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교포로 정착하였다.

1998년 일본 법무성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 사는 63만여 명의 재일동포 중 조총련계가 17만 5천여 명인데 이 중 17%는 제주 출신이고 북한 출신은 0.6%에 불과했다. 2009년 기준 조선, 한국 국적자 57만 8495명 가운데 제주 출신은 9만 882명으로 제주도 전체 인구 52만 8411명의 20%이다. 제주도 도민 인구와 비교해 본다면 제주도민의 상당수가 일본에 지인 내지 친척이 있는 것이다.

제주도민과 관련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특징은 대부분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주도민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 거주하며 교포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되어 재일동포의 생활을 돕고 우리말강습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후 조련에 반대하는 이들이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결성했다.

조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재결성되었는데 당시 60만 재일동포가운데 80%가 조총련에 가입할 정도로 1970년대까지 규모가 상당했다. 이는 한국정부가 별달리 재일동포를 지원하지 않은 것과 다르게 북한은 재일본사회의 민족교육 지원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많은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은 조총련에 가입해 있었다.

몸은 일본에 있었지만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다. 제주에 사는 이웃·친지들과 교류했고 일본에서 어렵게 번 돈을 모아 고향 제주에 보냈다. 조총련계 일본 동포와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제주의 지역적 특징은, 조총련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을 조작하기에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상당수 제주의 피해자들의 혐의 사실은 '일본에 있는 지인·친척과 교류하였다'는 것이었다. 한삼택씨 사건도 전형적인 제주 사건이었다.

"모자 쓰는 직업은 절대 안된다"
 

육군사관학교 ⓒ 육군사관학교

 
한삼택씨는 사건 이후 직장을 잃고 인쇄소를 차렸지만 원래 기술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한삼택씨의 부인은 시장에 나가 좌판에서 고춧가루를 팔았다. 한혜정씨도 어머니와 시장에 같이 나가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원래 사모님 소리를 듣던 분이었는데,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친척과 이웃들의 외면도 이들 가족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한삼택씨의 사건을 보고 두려움에 그랬으리라 짐작하면서도, 탄원서 한 장 받기 어려웠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고립, 재판이 끝나도 한삼택씨 가족의 피해는 끝나지 않았다. 한혜정씨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간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억울했습니다. 그때는 친구들도 부모님도 모든 게 싫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매는 서로 도우며 성장했다.

"당시에 도저히 대학 갈 형편이 안 돼서 남동생이 학비가 들지 않는 육사에 지원했습니다. 1차, 2차 모두 붙었고 어렵지 않게 최종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3차에서 떨어졌습니다. 가족 모두는 연좌제 때문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육사에 떨어지자 아버지께서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우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늘 연좌제를 생각하기 때문에 모자 쓰는 직업은 절대 안 된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조카가 공부를 잘 해서 경찰대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가족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직업을 가질 수 없어요."


한혜정씨는 수상한 흥신소에 재심 신청을 의뢰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부비동암으로 만 55세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위암으로 만 5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1983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3년 후인 198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집에서 간병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모두 기억합니다. 생전에도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정말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함이 밝혀져서 부모님 묘소에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저희 가족들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현재 한삼택씨의 재심 신청 사건은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재고합3으로 진행중이다. 검찰은 지난 9월 7일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피고인 한삼택이 1970년 9월경부터 구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대략적 기억에 의존할 주장일 뿐이며 1970년 10월 6일에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자백과 함께 수많은 증거를 제출하였다 하더라도 그전부터 피고인이 구금되었다는 증거라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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