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0 21:27최종 업데이트 21.10.1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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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방문을 열었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혼자 찾은 호텔.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 속 네 아이 엄마 수잔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면서도 낯설었다. 얼마만의 휴가인데 자꾸만 아이 사진과 동영상을 찾아봤다. 남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이 눈물겹게 소중했다.

바스락 소리 나는 하얀 침대에 누워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 <결혼 이야기>를 골랐다. 어이없었다. 온전히 혼자가 됐는데 결혼 이야기라니.
 
아기는 제대로 안아야죠. 도니를 죽이고 식물 군락의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잖아요. 근데 자기 애도 제대로 못 보면 앞뒤가 안 맞죠.

영화 <결혼 이야기>의 니콜(스칼렛 조핸슨)은 TV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아기 안는 모습을 연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는 니콜의 현재 마음가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니콜은 반복적으로 말한다. 인생을 통째로 바꾸고 싶다고. 도니를 죽이는 건 과거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새로운 인생에 새로운 커리어와 아들 헨리는 있지만 곧 전 남편이 될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니콜의 새 삶은 찰리가 없어야 시작될 수 있다.

영화는 10년 차 부부 니콜과 찰리가 서로의 장점을 쓴 글로 시작한다. 이혼 조정관은 말한다. 이혼 과정을 겪다 보면 격해질 수 있기 때문에 처음 결혼한 이유를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도록 했다고. 서로에게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관객은 알 수 있는 글을 읽다 보면 대체 두 사람이 왜 이혼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두 사람은 아직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해도 이혼할 수 있을까
 

니콜의 새 삶은 찰리가 없어야 시작될 수 있다 ⓒ 판씨네마(주)

 
사랑해도 이혼할 수 있을까.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로라 던)와 만난 자리에서 니콜은 말한다. 차라리 사랑이 식었다면 간단했을 거라고. 니콜은 찰리와 살면서 자신이 작아진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한때 영화배우로 인기를 얻었던 니콜은 LA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찰리와 결혼해 찰리가 감독으로 있는 뉴욕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한다. 극단이 호평을 받으며 찰리는 천재로 주목받는다.

처음에는 찰리와 함께하면서 자신이 진짜 살아 있다고 느꼈던 니콜은 어느 순간 깨닫는다. 자신이 살아난 게 아니라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줬다는 걸. 니콜은 점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그리고 아들 헨리가 태어난다.
 
조지 해리슨에 관한 다큐를 보다가 옳거니 싶었죠. 조지 해리슨의 부인처럼 모든 걸 받아들이고 현모양처로 살면 충분하다고요.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고… 이 파일럿이 들어왔어요.

니콜이 자신의 이름과 커리어를 찾아 LA로 가서 드라마 파일럿을 찍겠다고 했을 때, 찰리는 니콜을 응원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니콜의 출연료를 극단 예산으로 쓰자고 말한다. 니콜은 확실히 깨닫는다. 찰리가 니콜을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성격인 니콜은 이혼 소송을 하면서도 찰리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니콜은 찰리에게 자신이 왜 이혼을 하고자 하는지, 이혼 후 어떤 삶을 꿈꾸는지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양육권 등 주요 쟁점에 대해서도 직접 말하기를 꺼린다.

이혼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니콜은 덥수룩한 찰리의 머리를 가위로 직접 잘라주고, 점심 메뉴 하나 제 손으로 못 고르는 찰리를 위해 세심하게 메뉴를 골라주고, 연기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찰리를 위해 기꺼이 피드백을 듣는다. 니콜은 결혼 생활 내내 찰리를 배려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덕분에 찰리는 니콜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극단이 있고 멋지게 살고 있었잖아. 당신도 행복했잖아. 괜히 이제 와서 불평하는 거지.

찰리의 말을 들으며 네 글자가 떠올랐다. 동상이몽.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니콜에게 노라가 있어서 다행이다. ⓒ 판씨네마(주)

 
5년 전,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내가 희생해야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내가 엄마니까. 커리어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안정적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그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임신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평등한 관계를 중시하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미스터리이지만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강력하다. 

애초에 배려심 넘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배려는 오래가지 못했다. 억울함 때문이었다. 남편이 억지로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남편과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남편이 커리어적으로 성취를 이룰 때마다 기쁘면서도 질투가 났다. 밤새 야근하는 남편이 눈물겹게 부러웠다. 아이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내게는 가족만큼이나 '내 일'을 통한 성장도 소중하다는 걸. 수많은 투쟁과 협상 끝에 남편과 나는 평등하게 육아하며 함께 불안정해지기로 했다.

니콜에게서 느껴지는 주된 감정도 억울함이다. 찰리와 결혼한 것도 찰리의 극단에서 연기하며 찰리에게 맞추며 살아간 것도 모두 니콜의 선택이었다. 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렸던 선택. 그래놓고 이제 와서 원망하다니. 찰리가 느끼는 황당함, 배신감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동시에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줄 거라는 기대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건 진리다. 

니콜은 더 이상 찰리에게 맞추는 것도, 억울해지는 것도 그만두기로 선택한다. 뉴욕을 떠나 LA에서 드라마를 찍게 된 니콜은 집에 온 기분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일자리가 있고, 아이를 함께 돌볼 수 있는 원가족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리고 LA에는 노라가 있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니콜에게 노라는 빨간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니콜 옆에 앉아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이건 희망찬 행동이라고. 당신은 더 나은 인생을 원한다고. 니콜에게 노라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종류의 사랑
 

2초 만에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이 남이 되는 과정은 허무할 만큼 냉정하다. ⓒ 판씨네마(주)

 
당신을 평생 알아야 한다니 끔찍해!

우리의 이혼은 다른 부부와 분명 다를 거라 생각했던 니콜과 찰리는 저주의 막말을 퍼부으며 싸운 후 오열한다. 대화는 겉돌고 억울함만 남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밑바닥을 드러내 싸우면서 두 사람은 분명히 알게 됐을 것이다. 이미 둘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멀리 와 버렸다는 걸. 그럼에도 두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로를 안아준다.

결혼 생활 9년 차,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결혼은 결코 사랑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거다. 나와 남편은 서로 억울해지지 않도록, 누구 한 사람이 자신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끊임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쿨하지 못하고 지질해도 때로는 원하는 것을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하고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때로는 심하게 생색도 내고 과장된 칭찬을 하기도 한다. 피곤하고 귀찮고 가족끼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다른 모든 관계처럼 부부 관계에도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 노력 역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말이다. 

결혼이라는 관계가 녹슬거나 고장 나지 않게 계속 지켜보고 돌봐야 하는 이유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초 만에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이 남이 되는 과정은 허무할 만큼 냉정하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최선을 다해 이해해야만 비로소 지속가능한 관계. 결혼을 유지하는 데는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와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다.

질문을 바꿔본다. 이혼하면 사랑은 끝날까. 니콜은 말한다. 이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평생 찰리를 사랑할 거라고.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쳤다가도 상대방의 풀려 있는 신발 끈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사이.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왜 노아 바움백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결혼 이야기>라고 지었는지 알 것 같다. 완벽해 보이는 부부의 이혼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꾸만 결혼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곱씹게 된다. 

이혼 조정이 마무리 된 후, 아담 드라이버는 극단 단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에서 나는 꼼짝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결혼, 대체 뭘까.
 
날 너무 꼭 안는 사람,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 내 자리를 뺏고 단잠을 방해하는 사람, 날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날 너무 잘 아는 사람, 충격으로 날 마비시키고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 그리고 살아가도록 날 도와주지. 내가 살아가게 하지. 날 헷갈리게 해. 찬사로 날 가지고 놀고 날 이용하지. 내 삶을 변화시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https://brunch.co.kr/@hongmil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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