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5 07:14최종 업데이트 21.10.05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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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6

만드는 건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잠시였다.
눈보라와 비바람을 맞아가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서 다듬어진 제1사의 모습은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부대의 기강이 엉망이 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데는 채 한 철도 걸리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파총은 하이에나 같았다. 2, 3, 4, 5사의 파총은 감영 지원이다, 지방수령 원조다, 대민봉사다, 국책사업 동참이다, 구실이라도 내세워가며 병사들을 동원했는데 제1사의 신임파총 민충환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물려받을 이권은 하나도 없고 짭짤한 사업은 이미 다른 파총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민충환은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보부상단에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민 파총의 지시로 제5초의 병력을 보부상단에 동원했던 박한 초관은 군영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 오와 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 이동하는 병사들을 통제하지도 않았다. 예전 같으면 불호령이 떨어져도 벌써 떨어졌을 상황이었지만 박한 초관은 땅바닥만 쳐다보며 걸었다. 방향을 바꾸어야 할 지점에서도 그는 입을 떼지 않았다. 눈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박한 초관은 내 시선을 피했다. 그가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는 것은 나발을 불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도 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백성들이 아는 게 창피한 일을 하고, 행인들이 쳐다보는 게 부끄러운 꼬락서니를 한 채 군영으로 돌아가는 우리 부대였다. 보부상단에 동원된 제5초 병사들의 임무는 상단호위도 아닌 짐꾼이었다.
박한 초관이 내게 눈짓을 한 건 인적이 없는 얕은 언덕에서였다.
뚜- 뚜-
나는 할 수 있는 한 나발을 나지막이 불었다. 길가 나무그늘로 들어간 병사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짐꾼으로 부렸으면 새참이라도 먹여야지."

초관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내 귀에 들리는 게 박한 초관에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지만 그는 못들은 척했다. 다른 부대의 파총들은 동원한 병사들에게 적당히 술밥을 먹여서 구슬렸지만 민충환 파총은 그런 수완도 쓰지 않았다.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민씨 집안인 그는 주변의 평판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파총이 그러다보니 제1사의 초관들은 병사들이 스스로 지주나 상단, 백성들로부터 얻어먹건 우려먹건 알아서 하게 묵인했다. 그런데 박한 초관은 그러지 못하게 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다른 병사들처럼 받아먹는 것도 없는데 얻어먹지도 우려먹지도 못하는 제5초의 병사들은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해가 길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한 초관을 나는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빨리 어두워졌으면 좋겠네."
박한 초관은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파총이 바뀐 다음 박한 초관은 죽지 부러진 독수리였다.
"가자... 쉰밥이라도 먹으려면 가야지."

정 파총이 떠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친군영에서 배식 하나 만큼은 제1사가 최고였는데, 그것도 옛날 얘기가 되었다. 정 파총을 떠나게 만든 것만큼 모래가 많이 섞인 밥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틀이 멀다하고 쉰내 나는 밥이 나왔다. 뜬 보리와 썩은 잡곡들로 둔갑하기 전에 군영으로 내려온 급량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저녁밥에서도 쉰내가 등천을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쉰내를 줄여보려고 찬물에 밥을 말았다. 물에 밥을 말아 헹궈내면 가라앉은 모래를 골라내기도 쉬웠다.
"제길, 우리가 하이에나란 말이네."
물에 헹군 밥알을 다시 빈 대접에 옮겨 담으며 백무현이 투덜거렸다. 먼저 밥을 먹고 있던 고수는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백무현의 말을 받았다.
"용장 밑에 약졸 없고, 하이에나 밑에 하이에나 있는 거 당연하지."
하이에나는 민충환 파총의 별명이었다. 언제나 태평인 녀석의 발을 차며 나는 박한 초관을 향해 턱짓을 했다. 박한 초관은 우리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서 헹구지도 않은 쉰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정태신 파총처럼 군자관을 치도곤 할 힘도 없는 박한 초관은 무관의 배식을 받지 않고 병사들의 쉰밥을 같이 먹었다. 하루 이틀 하다 말겠지 했는데 벌써 한 달째였다.
"징하네 징해..."
백무현이 더는 투덜거리지 않고 찬물에 헹군 밥을 퍼먹었다. 백무현은 제1사에서 완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병사였다. 양손에 잡은 칼을 휘두르며 치고 나가는 솜씨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사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참 나..."

쌍검이 주특기인 백무현은 입대 전에 장거리의 거친 왈패로 소문이 자자했다. 백무현과 같이 너무 거칠어서 내가 피하는 병사들일수록 이상하게 정 파총을 그리워했다. 무관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무관들의 정강이를 까며 무장훈련의 강도를 높여갔던 정태신 파총에게 이를 갈았던 제4초관이 박한 초관을 향해 걸어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구관이 명관이지?"
정 파총에게 정강이를 까이면 무관의 체신도 아랑곳 않고 데구르르 구르며 엄살을떨던 4초관은 고개를 돌리는 박한 초관의 팔을 잡아끌었다.
"초관의 체신이 있지, 이건 아니지."
4초관은 찬물에 헹군 쉰 보리밥을 먹고 있는 병사들이 한 바퀴 둘러보았다.
"초관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가뜩이나 넘어가지 않는 밥이 병사들 목구멍에 더 안 넘어가지."
박한 초관은 4초관의 손을 끝내 뿌리쳤다.
"나 가만 둬."
박한 초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폭발 직전인 그의 눈빛 앞에서 4초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섰다.

한양 친군영에 전령으로 갔던 달음이가 돌아온 것은 취침 직전이었다.
"범, 너 한양갈 수 있게 되었어."
"?"
"한양 친군영에서 지방 군사들을 차출한데."
"그런데, 내가 왜?"
"너 좋아하는 정 파총 볼 수 있잖아."
"니가 가라. 한양."
나는 달음이에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여기 못 떠나잖아."
"난?"
"넌 아무도 없잖아."
"..."

같이 군영에서 생활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던 사실을 녀석이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가족이 나에게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없지만 달음이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한양 친군영의 병사들을 두고 지방에서 차출한대?"
"나라가 어수선하잖아. 한양에는 왜나라, 청나라에, 서양 것들까지 휘젓고 다니고. 남쪽 지방은 민란으로 뒤숭숭하대. 세력다툼을 하는 완고파와 개화파가 서로 지방에서 자기편 병력을 끌어올리는 거라고 무관들끼리 쑤근거려."
"초관도 간대?"
나를 따라 달음이도 박한 초관의 숙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원하지 않을까."
어둠에 잠긴 무관 숙소에서 그의 방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초번이 돌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초번 경계가 끝난 자시까지도 박한 초관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기 전에 박한 초관이 아침 일찍 나를 불렀다.
"갈 거냐?"
밤을 새웠는지 눈우물이 깊숙이 들어간 박한 초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
"나는 가기로 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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