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2 19:24최종 업데이트 21.10.0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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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전 주석은 만 36세 때인 1948년에 공식 지도자가 됐다. 그때부터 1994년까지 그가 상대한 미국 대통령은 총 10명이다. 상대한 기간은 트루먼과는 5년, 아이젠하워와는 8년이고, 케네디 2년, 존슨 6년, 닉슨 5년, 포드 3년, 카터 4년, 레이건 8년, 부시 4년, 그리고 클린턴과는 1년이다.

8년 임기를 마친 해리 트루먼이 '5년'으로 표기된 것은 그의 임기가 1945년에 시작됐기 때문이고, 린든 존슨의 임기가 6년인 것은 케네디 암살 뒤 부통령 자격으로 케네디의 잔여 임기를 채운 뒤 4년을 새로 집권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닉슨의 임기가 5년인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야당 도청)으로 제2기 임기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제럴드 포드의 임기가 3년인 것은 닉슨의 잔여 임기만 채웠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이 '1년'으로 표기된 것은 클린턴의 제1기 임기 개시 이듬해에 김일성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가장 오래 상대한 카운터파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로널드 레이건이다. 이 둘과는 각각 8년을 상대했다. 두 기간의 특징을 동·서 냉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앞의 8년(1953~1961년)은 냉전이 절정기일 때고, 뒤의 8년(1981~1989년)은 냉전이 막바지를 달릴 때였다.

뒤의 8년 때 만난 레이건은 소련 압박에 공을 들였다. 지금의 조 바이든이 1차적으로 중국 견제, 2차적으로 러시아 견제에 치중하는 데 비해 당시의 레이건은 소련 압박에 최대의 공을 들였다. 이런 레이건의 방식이 김일성과 북한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1993년 이후의 제1차 북·미 핵위기(북핵위기)의 초반 정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까지 끌어들여 소련 압박

로널드 레이건은 2년 뒤 대통령이 될 우드로 윌슨이 뉴저지 주지사로 취임한 1911년 1월 17일로부터 약 3주 뒤인 2월 6일 출생했다. 1912년 4월 15일 출생한 김일성보다 1년 먼저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주다.

21세 때인 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레이건은 한동안 아나운서 일을 했다. 그랬다가 26세 때인 1937년부터 '극적'인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1964년까지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42년 공군 대위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는 1947년에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장으로 선출된다. 배우에서 정치인으로 전업하기가 쉬워진 것이다.

레이건의 정치적 성향은 처음에는 민주당 쪽이었다. 그랬다가 1950년대 초반부터 보수 성향으로 기울더니 51세 때 공화당에 입당했다. 이때가 케네디 취임 이듬해인 1962년이다. 그의 족적이 뚜렷해진 것은 공화당 입당 이후였다. 1966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고 1970년에 재선한 뒤 1980년 대선에 승리해 1981년에 취임하게 됐다.

취임 당시의 레이건은 '극적'인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나 조 바이든처럼 레이건 역시 '위대한 미국'을 외쳤다. 미국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했다.
 

레이건 대통령. 파쵸 벨레즈 감독의 <레이건 쇼>에서. ⓒ EBS


이런 구호는 그 시대에도 상당 부분은 국내용이었다. 당시의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쟁 패배라는 상처를 안고 있었다. 이를 만회하고 미국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며 지미 카터 행정부가 인권외교를 펼쳤지만, 이것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1979년)과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 쿠데타(1979년) 등으로 빛을 잃었다. 이로 인해 미국인들의 자긍심이 손상돼 있었고, 이를 치유하겠다면서 레이건이 '힘의 미국'을 표방했던 것이다.

1980년에 <광장> 제89호에 실린 류근일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기고문 '레이건의 미국과 외교전략'은 "로널드 레이건 후보의 승리는 미국 국민들의 좌절과 재기에의 몸부림을 반영"한다면서 "모든 면에서 세계 제일을 과시하던 미국이 소련은 고사하고 한낱 이란의 호메이니 옹에게 덜미를 잡혀 쩔쩔매게 된 데에 미국인들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느꼈다"고 말한다.

위대한 미국을 복원하는 방편으로 레이건이 표방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만만치 않아 보이는 적을 집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련과 그 동맹국들에 대해 한층 강화된 견제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018년에 <미국사 연구> 제48권에 실린 김봉중 전남대 교수의 논문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정책과 냉전의 종식'은 "레이건의 외교정책은 힘에 근거한 철저한 반공주의로 소련과 그의 영향권에 속한 정권에 대한 강력한 압박으로 설명"된다고 말한다.

제2기 임기가 개시된 직후인 1985년 2월 6일 연두교서 발표를 계기로 '레이건 독트린'으로 개념화된 이 세계전략은 실상은 국내용인 측면이 컸을지라도 세계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레이건의 정책에도 당연히 파급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이 그 같은 압박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1979년 1월 1일의 미중수교였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도중에 열세를 만회하고자 중국의 핵 보유를 합법화해주는 한편, 중화민국(자유중국·타이완)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내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런 뒤 국교 정상화까지 관철했다.

이렇게 획득한 중국과의 제휴를 통해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의 권익을 지키는 한편, 대(對) 소련 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중국이 소련을 편들지 않을 거란 계산이 레이건의 '힘의 외교'를 뒷받침했다.

미국과의 대화에 열 올린 북한

이런 상황은 김일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자국과 미국은 여전히 적대적인데, 중국이 미국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남한 경제의 북한 추월도 김일성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남한 경제의 추월 시점에 관해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 교수인 팀 빌(Tim Beal)이 쓰고 정영철 서강대 교수가 번역한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는 "달러와 북한원 간 무역환율을 사용했을 경우 1976년 역전이 일어났고, 공식 환율을 사용했을 경우 데이터에서의 교차는 1984년에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는 1980년 전후의 북한 지도부가 남북한 경제력 비교에 민감해 있었을 것임을 추론케 한다.

전반적으로 북한이 불리해지는 이 정세 속에서 김일성이 택한 것은 대화 국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남한과의 대화, 미국과의 대화 양쪽에 열정을 보였다. 그 열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레이건의 대선 운동이 막바지에 달한 1980년 10월 11일에 했던 공개 발언에서 드러난다. 그달 12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보도된 내용이다.
 
북괴 김일성은 북괴 당 제6차 전당대회 이틀째인 11일 또다시 북괴와 소·중공 간의 군맹(軍盟) 폐기 가능성을 들고 나왔다. 김일성은 이날 외교정책연설에서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이 미·북괴 간의 평화협정으로 대치될 경우 북괴는 소련 및 중공과 맺은 군사동맹을 파기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평화협정에 동의한다면 소련·중국과의 동맹을 파기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 외교정책연설 때 그렇게 했다. 미국과의 대화에 대한 김일성의 열정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남한과의 대화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였다. 남·북·미 3자회담을 통해서도 북미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선보이기도 했다.

소련·중국과의 동맹을 버리고 미국과 손을 잡겠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한이나 일본이 미국에 제공하는 전략적 가치를 북한이 제공해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같은 김일성의 태도는 백악관 주인이 바뀐 1981년 1월 20일 이후로도 계속 유지됐다. 레이건 행정부에 대해서도 변함없이 대화 의지를 피력했던 것이다.

끝까지 북한 무시한 레이건

레이건은 힘의 미국을 추구했다. 소련에 대한 집중 견제를 통해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 이미지를 추구하는 레이건이 볼 때, 김일성과 평화롭게 협정을 체결하는 모습이 정치적으로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레이건은 김일성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물론 레이건도 형식상으로는 대화나 회담을 거론했다. 그 역시 북·미가 낀 다자회담이나 남북이 만나는 양자회담을 제안했다. 이전의 카터 행정부도 남·북·미 3자회담을 제의했었다. 레이건 역시 외형상으로는 카터 행정부의 자세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김일성이 "좋소!" 하면, 레이건의 태도가 달라졌다. 진짜로 회담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위대한 미국'을 외치며 특정국을 집중 견제하는 미국의 모습과 성의 있게 대화에 응하는 미국의 모습이 조화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은 2019년 1월 24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미고위급회담대표단을 만나 워싱턴 방문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는 모습. 뒤로 할아버지 김일성의 사진이 보인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이런 양상은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때까지도 이어졌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가 쓴 <북한의 대외관계>는 북한의 갖가지 대화 제의에도 "미국은 소련·동독 등 사회주의권 붕괴의 조짐이 감지되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치상황에서 북한의 대화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때는 공산권 전반이 약해지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대등한 협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더욱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상대국의 대화 요구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국제사회의 눈치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레이건이 김일성의 대화 제의를 지속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던 데는 1983년 9월 1일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동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파 참사,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등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83년의 두 사건과 관련해 팀 빌은 "둘 다 전두환과 미국 모두에게 매우 유용했다"고 설명한다. 사건의 진상이 어떻든, 공산국가가 관련됐을 수 있다는 이미지가 조성됐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선전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했다.

1987년 사건은 그 진상 여하에 관계없이 미국이 1988년 1월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명분으로 활용됐다. 이런 사건들은 레이건이 김일성의 대화 요구를 지속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실추됐기 때문에, 김일성의 대화 요구를 무시한다 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 레이건 시대에는 김일성이 대화 국면으로 나아갈 단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아웅산 사건과 대한항공 858기 사건 등까지 겹쳐 북한과 김일성의 위상이 더욱 열악해졌다.

이로 인해 김일성은 레이건으로부터 별다른 수확을 거두지 못한 채 그의 퇴임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나라는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 국제정치에서 뒤처졌다. 남한의 노태우 정부가 탈냉전 국면을 활용해 북방외교를 펼쳐나가는 동안에, 김일성은 특기할 만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기인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1993년 제1차 북·미 핵위기 때 북한이 미국의 초반 공세에 끌려 다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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