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3 18:53최종 업데이트 21.09.23 18:53
  • 본문듣기

영화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 스틸 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최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보고 왔다. 사실 감상할 의도는 별로 없었는데 극장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가능한 시간대에 적당히 볼만한 영화가 그것밖에 없었다. 이건 마블 영화에 대해 점점 관심이 떨어지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마블 프랜차이즈 작품들이 적당히 돈값을 하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는 하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 어렵다. 점점 개별 영화들이 지닌 개성이 흐릿해지고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죄다 비슷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 안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언뜻 듣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창작자의 구태의연함이 더 합리적인 이유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의 세계관에 속한 영화들이 점차 단조로워지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위기다. 이 영화들은 소속된 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작품들은 캐릭터의 능력이나 서사, 심지어 분위기와 개성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유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스크린 위에 뭉쳤을 때 어색해 보이지 않게 된다.


가령 똑같이 마블이 원작이고 동시대에 제작이 되었지만 폭력과 성관계 묘사의 수위가 한참 높았던 넷플릭스의 마블 드라마를 떠올려보라. 거기에 등장했던 '제시카 존스'나 '퍼니셔'가 그대로 어벤져스에 등장한다면? 영화가 어떤 캐릭터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건 간에 한쪽에는 너무 심심하고 반대로 다른 한쪽에는 다소 지나친 작품이 될 것이다.

프랜차이즈 영화들의 예고된 위기, 해결책은?

사실 이것은 대부분의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마블 영화의 경우 하나의 세계가 작품 전반을 묶다 보니 위기가 더 크게 느껴질 뿐이다. 물론 창작자들이 이런 한계를 모를 리는 없다. 이들도 한계를 극복하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양한 장르를 프랜차이즈 안에 이식하는 것이었다.

전쟁 영화·첩보물·판타지·SF 등의 장르가 마블 영화에서 구현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는 명백하다. 각각의 장르 역시도 프랜차이즈의 유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재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르를 그대로 이식했다기보다 분위기만 가져온 경향이 강해진다. 예를 들어 아주 현실적인 국제 정치 드라마를 표방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조차도 정작 그 부분은 대충 묘사됐고, 극의 절정에서 두 주연이 치고받는 건 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물론 있다. 바로 기존의 프랜차이즈에 등장했던 캐릭터들과 성별·인종·국적 등이 겹치지 않는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캡틴 마블>, <블랙 팬서>, 그리고 내가 최근에 본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등이 이 계열에 속할 것이다. 이 작품들도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일단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니 이 영화들이 지구와 그 밖의 우주를 묘사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없다. 서사도 사실 반복된다. 과거에 묶여 있다 결국 각성하여 영웅이 되는 주인공, 묵고 묵은 집안의 갈등, 그리고 이제는 마블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출연진들의 집단적인 패싸움까지.

주인공의 다양성을 고려하자 달라지는 것들
 

영화 <블랙팬서>의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달라지는 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는 무협 영화의 온갖 설정과 배경들이 뒤섞여 존재하고 이 영화의 액션에는 우리에게는 성룡의 영화로 친숙한 동양계 무술영화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다. 만약에 이 작품이 전형적인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였다면 이런 식의 설정과 배경은 절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천년 넘게 막후에서 세계를 지배해온 무협 세계의 1인자가 양조위고 그의 아들이 시무 리우인 건 말이 된다. 하지만 같은 캐릭터를 조지 클루니와 잭 애프론이 맡는다고 생각해 보라. 일단 그들은 전혀 동양인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쩌다 백인들이 과거 동양의 무협 세계를 제패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텐데, 이건 어떤 방식으로 해도 지나치게 가짜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무협 영화의 세계가 진짜가 아니긴 하지만 그 가공의 역사가 동양인이 가득한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것에 관객들에게 아주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도 비슷하다. 이 영화도 어쨌거나 핏줄을 이은 왕위의 계승자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도전자를 물리치고 정통을 이어나가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서구인들의 기준으로 적당히 이국적인 동네 한 군데 정도로 로케이션을 가는 당시 마블의 경향까지 아주 판박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트찰라는 흑인이었고 채드윅 보스만이 그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존의 마블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모든 요소들을 아무 설명 없이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다.

영화의 배경을 아프리카 대륙의 가상 국가인 '와칸다'로 삼을 수 있고 작품의 배경이나 의상 등 모든 요소에 그 지역의 고유문화를 뒤섞을 수 있다. 이 또한 캐릭터의 인종이 백인이었다면 성취할 수 없는 개성이었다.

다양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이유

물론 <샹치>와 <블랙 팬서>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 그들의 인종과 국적은 모두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두 영화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주연을 맡은 게 엄청난 파격은 아니라고 볼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다만 스튜디오가 필연적으로 비(非)백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쓸 수 없는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한 건 동양인이나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쓰기로 결정한 것과 사실상 같지 않을까. 

지금까지 대중영화 속 주인공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늘 있었다. 어쩌면 이 글의 결론도 비슷하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주연을 포함한 캐스트의 다양성은 이제 불가피한 선택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것은 비단 프랜차이즈 영화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중영화 제작이 까다로운 건 사람들이 지나치게 낯선 영화에는 선뜻 지갑을 열지 않지만 또 익숙한 반복에는 쉽게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권선징악의 서사는 농담거리지만 동시에 이 문법에서 벗어나버리면 관객들은 찜찜한 감정으로 극장을 떠나게 되고 입소문은 영 시원치 않게 된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는 딜레마가 대중영화에는 존재한다.

인종·성별·민족·성정체성 등이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는 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익숙한 서사를 반복하면서도 그 영화 안에 다양한 인물들의 출신지와 소속된 고유의 문화, 그들이 발전시켜 온 장르의 요소까지 이질감 없이 도입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여전히 익숙한 백인 남자들의 놀이터가 파괴되는 것에 불만인 사람도 있지만 다양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린 이유다(물론 이런 배경이 있음에도 마치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처럼 소수자 캐릭터를 하나 둘 던져주는 제작자들의 행태가 솔직히 고까울 때가 있다).

이는 비단 할리우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익숙함만 존재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린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특정 성별과 집단의 인물들이 한국 대중영화의 주인공을 독점하는 경향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선택지를 골라보는 것이 새로움을 만들 첫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대중영화의 조명을 충분히 받지 못한 소수자들은 한국에도 분명 많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