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4 07:31최종 업데이트 21.09.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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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17

도적떼를 만난 것은 아득령이 바라보이는 산마루를 넘어선 다음이었다.


저녁거리로 노루 한 마리를 사냥했다. 내 총을 맞은 노루가 바로 쓰러지지 않고 하필 덤불로 뛰어 들어가 낙명을 하는 바람에 회수에 애를 먹었다. 상대를 공격할 무력이 전무하고 도주가 유일한 방어책인 노루는 워낙 주력이 놀라웠다. 총을 맞고도 한 번 도약으로 사람의 다섯 걸음은 가뿐히 뛰었다. 산돌이가 찾아낸 노루를 겨우 회수해 고갯길로 나서며 숨을 돌리려는 참이었다.

"누가 감히 남의 구역에서 불질을 하오?"

호통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이었는데 셋은 총을 들고 나머지 둘은 도끼와 장도를 들고 있었다. 딱 도적떼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신포수를 쳐다봤다.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신포수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감히, 날세."
"어쿠, 형님. 오신다고 기별이라도 하시지."

단열총을 들고 맨 앞에 서 있던 두목이 얼굴을 가린 수건을 풀며 허리를 꺾었다. 뒤에 선 졸개들도 덩달아 허리를 접었다. 얼굴을 가렸던 두목의 첫인상은 몹시 험상궂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팔자로 치솟은 콧수염, 왼쪽 뺨을 사선으로 나눈 칼자국이 나머지 도적떼를 그림자로 만들었다.

"기러기들이 얘기하지 않던가. 열흘 전에 내가 보내었건만."
신포수가 대오를 지어 아득령을 넘어가고 있는 기러기 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크아!"
두목은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저런 죽일 놈들이 여태 놀다가 이제야 오는구려."
험상궂은 인상과 달리 천진하게 웃는 두목의 표정이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김포는 수염의 기세가 여전한 걸 보니 세월이 좋은가 봐."
"세월을 쏘고 있지요, 뭐."
김포라 불린 두목은 도끼를 어깨에 둘러멘 졸개에게 내가 내려놓은 노루를 거두도록 시켰다. 도끼는 나보다 나이가 한둘 많아보였지만 키는 나와 비슷했다.

"막내가 형님 모시고 주막으로 가라."
"왜, 같이 가지 않고?"
"고것 가지고 누구 입에 붙이겠수. 멧돼지 한 마리 거두어 따라 갈 테니 먼저 가서 쉬고 계시오."

두목이 가라고 턱짓을 하자 도끼가 오른쪽 어깨에 노루를 둘러멨다. 내가 왼손에 든 도끼를 들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뿌리쳤다. 도끼는 오른쪽 어깨에 노루를 메고 왼손으로 도끼를 끌며 앞장을 섰다.

"40관짜리로 해갈 테니 큰솥에 물 올려 두고."
두목은 졸개 셋을 데리고 샛길로 사라졌다.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을 잇는 아득령에서 굽어본 세상은 아득하고 아득했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자강고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더 광활한 개마고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득령에서 서쪽으로 아득히 흘러내려간 남천은 강계를 거쳐 독로강에 합류하여 까마득히 서해로 향했으며, 동쪽으로 아득히 흘러내려간 오만동강은 동문거리를 거쳐 장진강에 합류하여 까마득히 동해로 향했다.

아득령주막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함경남도 장진으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서있었다. 우리를 향해 먼저 달려온 건 길고 새하얀 털을 지닌 개 세 마리였다. 눈과 코만 까맣게 반짝거리는 풍산개들이었다. 성큼성큼, 나란히 대오를 갖춰 저속으로 달려오는 녀석들은 짖지 않았다. 짖지 않는다는 것은 겁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세 마리나 되었지만 산돌이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나의 존재를 확인한 산돌이는 사냥한 노루를 확인한 다음 정면을 응시하며 거만한 걸음걸이로 전진했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좁아들자 마주오던 개들이 속도를 줄이며 산돌이의 거동을 살폈다. 산돌이가 늠름하게 직진을 계속하자 산돌이처럼 귀가 위로 쫑긋한 한 마리가 정면을 막아섰다. 귀가 아래로 처진 두 마리는 좌우로 산돌이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좌우의 두 마리가 산돌이에게 달려들 것 같은 찰나 정면을 막아섰던 개가 풀쩍풀쩍 뛰며 달려왔다. 싸우려는 발걸음이 아니었다. 녀석은 걸음을 멈춘 채 맞붙을 태세를 갖춘 산돌이에게 다가와 코를 들이박고 냄새를 맡았다.

큼큼 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산돌이의 목을 물었다. 놀란 나는 녀석을 후려치려고 어깨에 메고 있던 화승총을 집어 들었다.

"가만 있어."
신포수가 화승총을 거꾸로 치켜든 내 팔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산돌이가 가만히 있었다.

"이놈이 산돌이를 알아보는 것 같네."
귀가 뾰족한 녀석은 산돌이에게 어금니를 쓰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내 팔을 잡고 있는 신포수를 쳐다보았다.

"..."
"하긴, 아무려면 지 새끼를 몰라보겠어."
산돌이도 주둥이로 털가죽을 물고 있는 녀석의 머리에 코를 들이대며 큼큼 냄새를 맡았다. 녀석의 턱 밑에도 산돌이처럼 검은 점이 있었다.

"향산이가 좋은 모양이다, 가자."
신포수의 말에 노루를 어깨에 멘 도끼가 어느새 서로 목을 물고 물리며 어울리는 개들을 피해 주막으로 향했다. 나는 산돌이를 내버려둔 채 도끼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신포수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뭐예요?

"둬라."
신포수를 따라 몇 걸음 가다 멈춰선 나를 보고 산돌이가 쫓아왔고, 다른 개들도 주둥이와 발로 산돌이에게 장난을 걸며 뒤따랐다.

"귀 빳빳한 저놈이 산돌이 어미다."
주막의 마루에 앉아 산돌이와 어울려 장난을 치는 풍산개들을 내려다보며 신포수가 무심하게 말했다.

"산돌이처럼 턱 밑에 점 있는 저 녀석 말이죠."
"봤구나. 눈이 제법이다."

부엌문 앞에는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주모가 팔짱을 낀 채 아득한 눈길로 우리를, 아니 신포수를 바라보았다. 신포수는 주모의 눈길을 피하며 겹겹으로 아득한 산 너머 산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주모와 신포수는 서로 엇갈려 쳐다보기만 했을 뿐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적막하던 주막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저녁이 되자 잔칫집마냥 수선스러웠다. 노루 한 마리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다른 산짐승들은 가을이 되어야 적당히 지방이 붙으면서 육질과 향취가 오르는데 노루는 봄이 최고였다. 사람 수는 많고 풍미까지 좋은 봄 노루는 국물조차 떨어졌는데 산적두목은 소식이 없었다.

"이거 입만 버렸네. 김포는 왜 안 오는 거야."
나이 지긋한 사내 하나가 마당에 걸린 가마솥을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벌써부터 물이 펄펄 끓고 있는 큰 가마솥에서 허연 김만 올라오고 있었다.

"토끼 한 마리 못 잡아 오는 거 아냐."

나이 열일곱 살이라던 도끼가 사내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우리를 뭘로 아는 거예요."
"날이 완전히 저물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옥신각신 시끌벅적한 주막의 마당으로 산적떼가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은 앞에 선 두목이 아니라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부하들에게 일제히 쏠렸다. 장도를 든 사내와 화승총을 멘 사내가 앞뒤에서 메고 들어서는 멧돼지는 40관이 넘어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김두령인데."

조금 전까지 토끼를 들먹거리던 사내가 먼저 설레발을 쳤고, 단열총을 메고 뒤를 살피며 지키는 경계병까지 마당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군침을 삼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멧돼지의 목을 따서 퍼낸 뜨끈한 생피를 한 국자씩 마신 포수들의 입가가 시뻘겠다. 배를 갈라 부위별로 해체한 간과 내장이 뒤이어 술상에 올라왔다. 털을 뽑고 뼈를 추려낸 살코기는 수육 솥으로 들어갔고, 도끼로 토막을 친 뼈는 해정국 솥으로 들어갔다.

"멧돼지 쓸개가 곰쓸개 못지않아. 남 주지 말고 먹어."
주모가 쓸개를 담은 접시를 신포수와 내 앞에 내놓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에 눈매가 새초롬하고 콧등이 또렷한 미인이었다.

"어디 숨겨뒀던 아들이우? 기골이 장대하네."
신포수는 대답하려 들지 않았고, 주모도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돌아섰다.

밤이 되자 아득령에 모여든 사람은 스물여덟 명이나 되었다. 남녀노소,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흘러들어 어디에서 사는지 신기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산 넘어 산, 아득한 첩첩산중이었다.

마당에 피운 화톳불은 사람들의 얼굴을 붉게 밝혔고 해정국이 펄펄 끓는 큰 가마솥에서는 허연 김이 풀풀 솟았다. 주모는 뼈에 붙은 살이 흐물흐물 떨어져 나오게 끓인 해정국에 따로 삶은 살코기를 찢어 넣어 사람들마다 한 뚝배기씩 돌렸다. 보리밥은 따로 담지 않고 둘러앉은 밥상마다 한 소쿠리씩 올려놓았다. 술까지 한 호리병씩 돌린 주모는 해정국밥 한 그릇을 말아들고 신포수와 두목, 내가 앉은 자리로 왔다.

"맛이 어떠우?"
"괜찮네."

신포수한테 그 말은 큰 칭찬이었지만 혼자서 스물여덟 명의 국과 밥, 고기와 술을 만들어낸 주모에게 너무 야박한 것 같았다. 그것도 대가리와 뼈를 우린 국물에 된장을 푼 해정국은 구수하기 그지없었고, 따로 삶아 찢어 넣은 살코기는 입에 착착 감겼다. 나는 신포수의 말을 벌충할 요량으로 한 마디 보탰다.

"태어나서 먹어본 제일 맛있는 국이에요."
"그래, 말뽄새가 이래야지."
주모는 자기가 들고 온 장국밥 뚝배기에 든 고기를 내게 덜어주었다.

"먹고 더 먹어. 아직 많아."
술과 함께 노래가 돌아갔다. 노래 소리는 각양각색이었다. 앳된 목소리와 쉰 목소리, 낭창거리는 가락과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박자. 노래는 잠시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다 포수에요?"
"포수도 있고, 약초꾼도 있고 벌목꾼도 있고, 숯쟁이도 있고 도기쟁이도 있고..."
나는 더 궁금해져서 산적두목이 듣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신포수에게 물었다.

"포수도 아닌 사람들은 왜 무서운 맹수들이 사는 이런 첩첩산중에서 도적떼와 어울려 살아요?"
신포수는 들여다보듯이 내 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넌 맹수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무엇일 것 같으냐?"
"..."
"이 사람들은 인간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없다는 걸 다 겪어봤을 거야."
신포수는 두목에게 눈길을 돌리며 덧붙였다.

"도적떼보다 더한 도적떼들 때문에 살 수가 없으니까 세상을 등졌을 테고."
"아저씨도 그래요?"

신포수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술판이 벌어진 마당을 한 바퀴 돌아온 주모의 손에 술병이 들려 있었다. 얼굴이 불콰해진 신포수가 빈 잔을 들어보였고, 주모가 눈을 흘기며 그 잔을 채우고 나서 산적두목에게 말했다.

"김포도 한 곡 해봐."
두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주모는 술병을 빙글빙글 흔들며 채근했다.

"맨날 불질만 하지 말고 소리 하나 하라고."
두목은 험상궂은 인상과 달리 주모에게 쩔쩔매며 신포수에게 물었다.

"형님, 이번에는 우리하고 같이 하시지요.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신포수를 말이 없었고, 주모가 나섰다.

"피 보는 게 그렇게 좋냐, 이 인간들아. 그냥 며칠 좀 처자빠져 쉬어라."
"이번 비가 지나가면 그놈이 올라올 거야."
"비가 언제 올지?"
"며칠 안에 올 거야."
신포수는 밤하늘 가득 총총한 별을 올려보았다.

"그럼 소집해놓고 대기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김포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주모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새끼 포수는 나이가 몇이야?"
"열일곱 살이요."

나는 두 살을 올렸다. 산적들의 막내인 도끼보다 어린 아이 취급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어리네. 새끼 포수, 노래 하나 해봐."

여전히 '새끼 포수'였다. 열여덟이라고 할 걸 그랬다. 나는 후회를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모는 취기가 오른 눈빛으로 내 바랑을 가리켰다. 바랑 위로, 내가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아비의 퉁소가 삐져나와 있었다.

"저거 퉁애 아니야. 퉁애라도 한 번 불던지."
노래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퉁소를 불어야 했다.

"긴아리나 한 번 불어봐."
신포수까지 거들었다.

'긴아리'와 '자진아리'는 아비가 가장 잘 불었던 곡이었다. 긴아리는 구슬프기 그지없었고 자진아리는 흥겨운 가락인데 이상하게 애잔한 노래였다. 밤 가락으로는 아무래도 긴아리였다.

나는 뒤에 하나, 앞에 네 개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올리고 관속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낮고 굵은 퉁소 소리가 아득령 아득히 구슬펐다. 울림과 떨림을 오가며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비에게는 아직 견줄 솜씨가 아니었지만 모자란 소리는 낭림산맥의 바람소리가 가려주고, 어긋난 가락은 아득령의 밤이 덮어주었다. 내 퉁소 가락에 먼저 노래를 감아 넣은 건 신포수에게 몸을 반쯤 기댄 주모였다.

조개는 잡아 젓 절이고
가는 임 잡아 정들이자

바람새 좋다고 돛 달지 마라
몽구미 개암포 들러서 가소

세월을 잊자고 산으로 왔더니
단풍에 물들어 세월이 지누나


주모의 음색은 간드러지지도 축축하지도 않았고, 음을 심하게 꺾거나 떨어대지도 않았다. 너무 무심해서 오히려 듣는 사람을 막막하고 아득하게 만드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주모는 노래를 끊고 앞에 놓은 술잔을 비웠다. 노래는 마당에 앉은 누군가 넘겨받았다. 주모와 달리 낭창낭창하게 감아넣은 '긴아리'였다. 아비 떠나고 내가 하릴없어 퉁소를 입에 붙이면 옆으로 다가와 가사를 매겨 넣어주던 옥희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살폈지만 화톳불도 잦아들어 어둠이 세 척 앞을 가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선뜻 구별이 안 되는 그 중성의 음색이 긴아리 가락을 더 구슬프게 만드는 밤이었다.

네 오려므나 네 오려므나
날 보려거든 네 오려므나

그리던 우리 임 꿈에 보고
꿈 깨어 섭섭해 나 못 살겠네


어느새 합창이 된 마지막 구절은 메아리가 되어 아득령의 밤을 낮게 흔들었다. 신포수와 주모의 눈빛도 화톳불 잔불에 희미하게 흔들렸다.

물방안 돌다가 돌다가 죽고
이 몸은 그리워 그리워 죽지
 

퉁소를 내려놓는 나와 신포수를 번갈아 쳐다보던 주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퉁애 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이 퉁애도 어디서 본 듯하고."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지."

신포수가 들고 있던 잔을 비우고는 주모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홍서방 애야."
"... 그 홍서방?"

주모는 놀란 눈으로 내 얼굴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어딘가 낯이 익다 싶었다..."

주모는 자기 앞에 있던 잔을 비우고 내게 내밀었다. 넘치게 채워준 잔을 든 채 주저하고 있는 내게 신포수가 던지듯 한 마디 했다.

"마셔라. 열일곱이라며."
그렇게 받기 시작한 술을 피하지 않고 다 받아 마셨다.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었다. 신포수는 없었다. 목이 말랐지만 머리맡에 자리끼도 보이지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뜨고 어두운 방안을 살피려는데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옆방이었다. 신열을 앓는 낮고 불규칙한 목소리는 주모의 것이 분명했다. 고양이 우는 소리는 오래 계속되었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을 감았다.
그날 아득령에서, 나는 하룻밤 새 열일곱 살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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