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9 11:24최종 업데이트 21.09.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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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때도 고발 사주 사건으로 불릴 만한 일이 있었다. 검찰이 검사와 야당 관계자들을 움직여 범여권 인사들에 대한 고발을 유도했다는 이번 의혹과 달리,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차관이 교도소 수감자를 부추겨 야당 거물급들을 상대로 탄원 형식을 띤 실질적 고발을 하게 해 살인미수사건 공범으로 만들려 했던 사건이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민주당 지도자들인 조병옥·장면·백남훈 등을 살인교사죄로 처벌하고자 했다. 독립운동가 출신 교육자로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해방 뒤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멤버를 거쳐 민주당 최고위원이 된 백남훈과 더불어 조병옥·장면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축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6·25 사변 2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연단에서 연설을 했다. 그때 이승만과 3m 떨어진 연단 뒤편에서 권총 두 발이 발사됐다. 하지만 이승만한테는 지장이 없었다. 두 발 다 불발이었다.

2016년에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가 연기한 독립투사 김시현이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였다. 1950년 제2대 총선 때 당선된 김시현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불법 개헌을 추진하는 이승만에게 제동을 걸고자 의열단(단장 김원봉) 출신 독립투사 유시태를 문제의 기념식장에 파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만 69세의 김시현과 62세의 유시태는 무기징역을 살게 됐다.

자유당 정권은 복역 중인 김시현·유시태를 사주해 '장면·조병옥·백남훈도 함께했다'는 진술을 받고 이를 이용해 민주당을 전복하는 방안을 기획했다. 이것이 1960년 4·19 혁명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민주당 전복 음모 사건'이다.

같은 편에 섰다가 반대 편에 섰다가

그런데 피해자 중 하나인 조병옥은 이승만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이승만의 협력자인 시절도 있었고 경쟁자인 시절도 있었다. 그런 조병욱까지 연루시키는 고발 사주 사건이 기획됐던 것이다.

조병옥은 김시현보다 11년 뒤인 1894년 출생했다. 이해에 가장 유명해진 한국인은 동학군 사령관 전봉준과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다. 탐관오리 조병갑은 동학혁명으로 연결될 고부 민란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조병옥의 초명은 조병갑(趙炳甲)이었다. 그랬다가 나중에 병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양주 조씨이고, 조병옥은 정암 조광조와 같은 한양 조씨다.

오늘날의 충남 천안에서 출생해 24세 때인 1918년 미국 유학을 떠난 조병옥은 현지에서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6세 많은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가 이승만식 독립운동과 거리를 두게 되는 원인이 됐다.

흔히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은 실력양성주의로, 이승만의 노선은 외교 중심주의로 요약된다. 즉각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양쪽 다 '준비론'으로 분류되지만, 두 인물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는 "안창호는 점진과 개조의 입장을 취했으나, 완전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혁명과 전쟁이 필요할 때는 즉시 독립전쟁을 수행하려 한 독립전쟁론자였다"고 평가한다.

하와이(이승만)와 미국 서부(안창호)에 근거지를 둔 두 사람의 차이는 국내 지지자들 사이의 대립으로도 표출됐다. 위 책은 "이들의 노선이 대립한 곳은 미주가 아니라 국내였으며, 특히 각각의 추종 집단들이 파벌 투쟁을 벌이며 이러한 대립이 부각"됐다면서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들의 지지를, 이승만은 기호(황해·경기·충청) 출신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말한다.

조병옥은 충청도 출신이므로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과 함께 기호인에 속했다. 하지만 조병옥은 재미 3대 지도자 중에서 안창호를 택했다. 2010년에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제64권에 실린 김권정 경희대 객원교수의 논문 '일제하 조병옥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사회사상'은 "조병옥은 외교전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이승만의 주장과 일본을 대상으로 무력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박용만의 주장보다 '한국의 독립은 지구전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적 주장에 동의하였다"고 설명한다.

1925년 귀국 이후로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벌인 조병옥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혐의로 만해 한용운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데 이어, 1937년에는 일명 흥사단 사건으로 불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한 안창호와의 인연으로 인해 흥사단 출신들이 대거 구속된 수양동우회 사건에 그가 연루됐던 것이다.

이처럼 안창호와의 인연이 깊었지만, 51세 나이로 맞이한 해방 뒤에 그가 제휴한 대상은 19세 많은 이승만이다. 해방 뒤 보수 진영의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한 그는 영어 가능자가 우대받는 미군정 하에서 군정청 경무부장(경찰 수장)이 됨에 따라 이승만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와 이승만을 연결해준 것은 미군정 및 한민당에 더해 진보세력(좌파) 탄압이었다. 경무부장이 된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진한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그와 이승만의 제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민당과 이승만이 틀어지고 미군정의 지배가 끝나고 좌파 진압이 일단락된 뒤로 이승만과 소원해지게 된다. 한민당과 대한국민회가 합세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그 역시 가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 내무부 장관. 1951.3.23 ⓒ 연합뉴스


하지만 한국전쟁은 조병옥과 이승만을 다시 붙여놓았다. 1950년 7월 17일 조병옥은 제5대 내무부장관에 취임한다. 경무부장 경력 등이 감안된 인사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연은 질기지 못했다. 전쟁 중인 1951년 2월 9일부터 3일간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인민군 패잔병 및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국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이 정치 쟁점이 되자, 그해 4월 24일 이승만은 내무·법무·국방장관에게 사퇴를 권고했다. 조병옥은 그날 사표를 제출했고 5월 6일 퇴임했다.

1918년 유학을 떠날 당시, 조병옥은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을 만났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안창호를 만났다.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롤모델은 안창호였다. 이승만은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때처럼 해방 뒤에도 그는 이승만 옆을 두 번 스쳐 지나갔다.

'너무 황당' 검찰 불기소

보수야당 진영으로 돌아간 조병옥은 1954년 제3대 총선 때 대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민의원에 당선됐다. 그런 뒤 1956년 7월 20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고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렇게 조병옥이 이승만의 대항마로 성장하던 시점에 발생한 게 바로 고발 사주 사건이다. 조병옥이 민주당 대표에서 대통령 후보로 도약하던 시점인 1958년부터 벌어진 일이다.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을 포함한 민주당 거물들을 일거에 축출하고자 이들을 1952년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과 엮는 시나리오를 짰다. 이승만 암살 미수의 주역인 김시현·유시태의 진술을 바꿔 조병옥 등을 살인미수죄로 엮고자 했던 것이다. 조병옥 등이 배후에 있었다는 쪽으로 김시현·유시태의 진술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김·유의 진술을 바꾸자면 설득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김·유는 마산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훗날 검찰이 이 사건을 수사해 기소장에 적시한 바에 따르면, 이승만의 최측근인 이기붕 민의원의장(국회의장), 홍진기 법무부 장관(훗날의 중앙일보 회장), 신언한 법무부 차관은 김·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정치 브로커 이태희를 이용했다. 1960년 6월 8일 자 <경향신문> 기사 '민주당 전복 기도'는 검찰 기소장을 근거로 이렇게 말한다.
 
김시현·유시태 등은 처음엔 불응했었으나 이태희가 끈덕지게 이들을 동래온천 등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탄원서만 내면 곧 석방해주겠다'고 유혹을 계속, 4개월 만인 작년 1월 드디어 이 박사 저격사건의 배후 탄원을 하기에 이르렀었다.
 
수감자들을 온천 등지로 데리고 다니며 회유 작업을 벌였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탄원 형식을 띤 실질적 고발로 인해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개시됐으나 결과는 이랬다.
 
당시 검찰은 조·백 씨 등을 살인교사 혐의로 입건하고 극비리에 수사를 계속했으나 완전히 허위 조작임을 확인하고 불기소 처분했다.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 등을 과거 사건과 엮어 살인미수범으로 만들려 했으나,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 검찰의 협조를 받지 못해 실패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1960년 3·15 대선이 임박한 그해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조병옥과 이승만의 정면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단독 출마한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4·19 혁명을 맞아 하와이로 망명했다. 3월 15일 격돌했어야 할 두 사람은 이때도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한편, '고발 사주'를 실무적으로 주도한 이기붕은 4·19 와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진 뒤인 1961년 7월 14일, 대법원은 홍진기에게 무죄 선고, 신언한에게 징역 2년, 이태희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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