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1 20:03최종 업데이트 21.09.1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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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이승만·박정희보다 집권 기간은 짧지만, 단 기간에 한 장소에서 국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그들 못지않은, 어쩌면 그들 이상인 인물이다. 이승만도 민간인을 학살했고 박정희도 국민들을 죽였지만, 전두환은 국군을 동원해 한 도시에서 열흘간 집중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는 그가 퇴임 뒤인 1988년부터 30년 이상 세상의 원망과 지탄을 들으며 피해 다니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전두환처럼 인명살상을 많이 한 일이 두고두고 약점이 된 집정자(執政者)가 있었다. 퇴임 뒤 백담사로, 경남 합천으로 피해 다닌 전두환처럼 그 역시 비슷한 궤적을 걸은 적이 있다.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일이 저승사자처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2003년 KBS 사극 <무인시대>에서 배우 이덕화가 연기한 이의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의민은 1170년부터 1271년까지의 무신정권 집정자들 중에서 이의방·정중부·경대승 다음에 집권한 인물이다. 13년간 이어진 그의 집권 뒤에 최충헌 가문의 4대 62년 집권이 이어지고 그 후 13년간 김준·임연·임유무가 각각 집권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이의민 정권은 최씨 정권과 그 이전 무신정권의 가교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폭력성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 따르면, 그는 사찰 노비와 소금 판매업자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가 사찰에 예속된 노비였으니, 그 역시 노비 신분을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찰 노비인 어머니가 결혼을 한 점, 어머니가 셋 이상의 자녀와 함께 생계를 꾸린 점, 이의민 형제들이 동네에서 행패를 부리며 사는데도 승려들이 제어했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을 감안하면, 어머니는 절에 거주하지 않고 사찰 바깥에 사는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찰 노비로 태어난 이의민 역시 그런 외거노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역사서들에서는 이의민이 천민이었다는 점, 아버지가 '소금 장수'였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 때문에 그가 가난하게 성장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은 "아버지 선(善)은 소금을 팔고 체를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父善以販塩鬻篩爲業)"고 말한다. <고려사>를 집필한 조선 초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업'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것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이선은 '소금 업자'로 볼 수도 있다. '소금 업자'로 번역할 수도 있는 것을 '소금 장수'로 번역하다 보니 이의민이 가난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 형제가 행패를 부리며 다닌 점, 수박(手搏, 태권도)을 잘했을 정도로 이의민이 무예를 연마한 점 등은 이 집안 자녀들이 생산 활동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음을 시사한다.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의민은 마을을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고향인 경주 지역의 두통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의 폭력성은 결혼 뒤에도 여전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형제들과 함께 체포돼 안렴사(관찰사) 김자양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된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두 형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의민이 직업 군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고문을 견뎌내는 모습에 탄복한 김자양이 그를 개경을 지키는 경군(京軍)으로 추천한 것이다. 그 뒤 그는 임금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수박 실력이 의종 임금(재위 1146~1170년)의 귀에 들어갔고, 왕의 총애를 받아 종9품 대정(隊正)에서 정7품 별장으로 특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의종에 대한 의리에 구애받지 않았다.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 1170년 무신정변 때 그는 쿠데타군에 가담해 이의방·정중부의 편에 섰다.

이때부터 그의 폭력성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무신이 문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시점부터 그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렀다. 처벌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고 폭력성을 분출하게 된 것이다.

이의민 열전은 "정중부의 난 때, 의민이 죽인 사람이 많아서 중랑장에 임명됐다"고 말한다. 무신 지도부의 눈에 띌 정도로 문신들을 많이 죽였던 것이다. 의종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문신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수도 있었던 그는 앞장서서 살상을 자행함으로써 도리어 쿠데타군의 호감을 샀다. 무신정권은 그를 정5품 중랑장에 임명하고 뒤이어 정4품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뜻밖의 행동

이의민의 인명살상은 1173년에 역쿠데타인 김보당 반란(김보당의 난)을 진압하면서 한층 더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그는 경주 지역민들을 앞세워 반군 수백 명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반란을 진압한 뒤 뜻밖의 행동을 저지른다. 자기를 신임해준 의종이 쿠데타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그 자신이 직접 의종을 죽인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던 이 일을 그는 너무도 잔혹하게 자행했다. 이의민 열전은 "의민이 의종을 곤원사 북쪽 연못으로 끌어낸 뒤 술 몇 잔을 올리고는 등골뼈를 부러트렸다"고 서술한다. "그런 다음, 그 손놀림에 따라 (비명) 소리가 나오자 크게 웃어댔다"고 말한다. 자기의 손놀림에 따라 비명을 지르는 의종을 보면서 크게 웃어댔던 것이다. 그런 뒤 시신을 연못에 버리도록 했다. 사이코패스 같은 그런 행동을 저지른 뒤에 그는 종3품 대장군으로 올라갔다.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의종(김규철 분)을 죽인 이의민(이덕화 분) ⓒ KBS


그의 살상행위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그를 보호해주던 정중부 정권이 무너지고 경대승 정권이 세워진 뒤부터 이 일은 그에 대한 탄핵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의민 열전에 따르면, 만 25세 청년 장군 경대승의 집권을 축하하는 1179년 연회 때 경대승은 "군주를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입니까?"라는 말을 던졌다. 시군자(弑君者) 이의민을 살려둘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놀란 이의민은 경비 병력을 집 주변에 배치했다. 경대승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오자 경비를 더욱 삼엄히 했다. 병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면, 경대승 집권 직후 혹은 그 이전에라도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이의민을 혐오하는 분위기는 그가 1181년에 경주로 낙향하는 원인이 됐다.

세상의 원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의민의 공포심은 경대승이 1183년에 만 29세 나이로 병사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경대승이 죽은 이후의 권력공백기에 명종 임금은 이의민이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해서 이의민에게 정권을 맡기려 했지만, 이의민은 쉽사리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세상의 원한이 여전히 무서웠던 것이다.

결국 개경으로 복귀해 과도기 상황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정자가 된 이의민은 예전처럼 계속해서 잔혹성을 드러냈다. 조정에 앉아 대화하던 중에 "예전에 어떤 자가 힘이 세다고 자랑하기에 내가 이런 식으로 때려 눕혔소"라며 주먹으로 기둥을 치는 일도 있다. 이 때문에 천장의 서까래가 흔들렸다고 한다.

그의 폭력성은 탐욕과도 연결됐다. 거리낌 없이 뇌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남의 땅도 폭력적으로 빼앗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그의 폭력성은 아들 이지영에게도 그대로 나타났고, 이것은 이의민이 몰락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따르면, 1196년에 장군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인 최충수에게서 비둘기를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충수가 거친 태도로 반환을 요구하자, 이지영은 기분이 나빠져 최충수를 결박했다. 풀려난 최충수는 곧바로 최충헌에게 쿠데타를 제의했고, 이는 이의민이 최충헌의 칼에 목숨을 잃는 원인이 됐다.

이의민의 명멸은 경대승·최충헌 등과의 대결 속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경대승·최충헌은 그의 정치적 라이벌의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의 진짜 라이벌은 다른 데 있었다. 의종을 비롯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세상의 원한이 그의 최후를 재촉하는 진짜 라이벌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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