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1 16:35최종 업데이트 21.08.2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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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나 서당 어린이반 붓글씨 수업사진 한글 수업은 붓글씨를 함께 한다. ⓒ 김산하 제공

 
아빠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코로나가 확산되자 한국에서 뜨는 비행기는 2020년 3월 1일부터 들어올 수 없다고 발표했다. 2월 29일 밤 11시 30분 인천발 비행기가 마지막이었는데 가까스로 표를 구했다.

아빠는 2010년 10월 러시아 정부로부터 '5년 입국금지'를 당했다. 금지조치는 2015년 한 차례 더 연장되어 연해주 우정마을에 살던 나 김산하와 엄마는 10년간 아빠와 떨어져 지냈다. 코로나로 격리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입국금지 기간이 끝난 아빠와 손잡고 돌아오려고 애써 한국에 들어왔다. 오늘 블라디보스톡 공항 입국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해 그리운 집으로 가야 할 텐데...


블라디보스톡까지는 2시간 남짓,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나는 창밖 가득 진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10년 세월이 될지는 몰랐다. 아빠하고 엄마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산단 말인가?

참 힘들게 사는 아빠 김현동

러시아 연해주가 우리 민족과 다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863년 함경도 농민이 이주하면서부터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에 못 이겨 더 많은 동포들이 넘어갔다. 1920년대에는 16만 명에 이르러 항일무장투쟁의 기지 역할을 할 정도였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조치로 동포들은 연해주에서 하루 아침에 들려 나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에서 땅굴 생활을 했다. 동포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했건만 옛 소련이 무너지고 지역마다 민족주의가 부활하자 다시 박해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중앙아시아의 일부 고려인들은 1990년 중반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땅인 연해주로 돌아왔다. 연해주 정부는 과거의 군사기지 터를 내어주면서 이 차가운 땅에서 벼농사를 개척한 고려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머무를 수 있는 집조차 없었고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산하의 아빠 김현동은 2001년 러시아 현지 법인으로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아래 기금)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국내에 있는 '동북아평화연대'와 함께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돌아온 고려인들의 정착을 돕고 나섰다. 살림집과 마을회관, 공동작업장을 짓고 우정마을을 비롯 여섯 개 마을을 만들었다. 김현동은 2004년 기금 활동을 위해 러시아로 아예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다. 중국 연변으로 들어갔던 1996년에 이어 두 번째 이주였다. 1993년생인 김산하는 그때 12살로 러시아 쉬꼴라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우리 비행기는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1시간 후에 착륙하겠습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이어 승무원들이 음료를 내어주는데도 아빠는 눈을 뜨지 않는다. 잠이 들었나 보다. 나는 아빠를 깨울까 하다가 손을 거뒀다.

김산하는 쉬꼴라를 졸업하고 2012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극동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아빠 엄마가 낯선 땅에서 고려인 정착을 위해 시민단체 활동을 하니 법적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돕겠다고 법학 전공을 결정했다. 그런데 1학년 때 들어간 신축기숙사에서 새집증후군을 심하게 앓아 학교를 휴학하고 우수리스크시 미하일카프카군에 있는 우정마을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2010년 김현동은 중국농업시설을 살펴보러 훈춘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크라스키노 해관에서 입국이 거부되면서 입국금지조치가 내려진 것을 알았다.김승력 사무국장도 같은 조치를 당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타격을 입자 김산하의 엄마 주인영은 연변에서처럼 연해주에서도 버텨나갔다. 김현동을 대신해 기금의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고 사업비가 쪼들렸다. 김산하는 이런 엄마를 지켜보며 학교를 중퇴하고 기금 일을 돕기로 했다. 김산하가 맡은 것은 로지나 서당, 민족 언어를 잃어버린 고려인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김산하는 2013년 우스리스크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강마리나와 함께 서당 일을 시작했다. 우정마을의 회관이면서 기금 사무실도 있는 '솔빈'문화센터 내에 교실을 꾸몄다.
 

로지나 서당 6기 졸업사진 솔빈문화센터 앞에서 찍었다. ⓒ 김산하 제공

  
로지나 서당의 기적

처음 1기는 유치원과 쉬꼴라 저학년 꼬맹이들의 방과후 교실로 단어 카드나 그림 카드를 활용하며 소박하게 시작했다. 고려인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한 반에 많아야 3명 정도 있는 수준인데 로지나 서당에서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모두 좋아했다. 스스로 자기들의 형제자매,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늘어나고 고학년이 많아졌다. 회화와 기초문법을 맡았던 김산하는 어깨가 무거웠다. 중국 연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러시아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낸지라, 회화는 자연스러우나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언어를 지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변변한 교재도 없는지라 한 시간 수업을 하려면 두세 시간 준비하는 게 보통이었다. 놀이 수업은 토요일에 4시간을 하면 집에 돌아와 4시간이나 낮잠을 잘 정도로 힘이 들었다.

우정마을 주변의 고려인 농가들은 널찍이 흩어져 있어 아이들이 걸어서 오기 어려웠다. 차량과 기사가 필요했다. 아이들에게는 책임감을 주는 차원에서 한 달에 400루블(한국 돈으로 약 7000원)을 받았으나 이는 간식비로도 모자란 돈이었다. 당시 기금은 거의 모든 사업이 축소되고 위축된 상황이라 로지나 서당에 적절한 지원을 하기 어려웠다. 김산하가 수업준비, 교재개발, 아이들 상담, 후원회 결성 등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아예 월급이란 게 없었다.
  
로지나 서당의 여건은 어려웠지만 김산하는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보다는 언니, 누나 같은 느낌으로 아이들과 마주했다. 수업이 끝나면 보드게임을 하고 강당에서 수다를 떨고 놀았다. 한 기가 끝나면 수료식을 준비하며 여러 날을 들뜬 채로 보냈다. 명절에는 송편과 만두를 빚었다.

특별한 추억은 강원도청의 초청으로 2019년 11월 30일부터 나흘간 학생 12명을 데리고 한국에 다녀온 일이다. 춘천, 강릉, 속초를 거쳐 서울까지의 여정. 여행이 끝나고 9학년 양콘스탄틴은 "모두 친절하고 유쾌해서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은 큰 기쁨이었습니다"라고 감사 편지에 적었다. 11학년인 양 아나스타시아는 "강릉 선교장에서 차를 우리고 마시는 다도체험이 좋았어요"라고 썼다.

고맙게도 로지나 서당의 존재를 알고 한국에서 많은 격려 방문이 있었다. '늦봄학교' 아이들은 2년에 한 번씩 찾아왔다. 서로에게 러시아 이름과 한국 이름을 지어주고 줄넘기, 줄다리기, 윷놀이를 하면서 우정을 나눴다. 성공회팀은 대사도 외우고 소품도 만들며 '어린왕자' 연극을 같이 공연했다. 자원봉사나 방학캠프를 왔던 중고생들이 자기 용돈을 아껴 로지나 서당 후원회비를 보내줬을 때, 대학생들이 취직이 되어 후원회비 이체를 시작했다고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을 때는 감동이었다.
 

봉사 활동 온 영남대학교 학생들과의 합창 로지나 서당 학생들과 홀로아리랑과 아리랑을 합창했다. ⓒ 김산하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어서 김산하는 강마리나와 단둘이 일손은 딸리고 운영비는 빠듯해도 8년 동안 몰입했다. 언제부턴가 로지나 서당과 기금 사업은 그의 삶이 된 것이다.

운명같은 이름 김산하

블라디보스톡 공항까지 20분 남았다는 기내 방송에도 아빠는 코까지 살짝 골며 잠에 빠져있다. 멀리 극동연방대학교 캠퍼스의 불빛이 보였다. 아쉽게 졸업하진 못했지만 학교 친구들과는 지금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아빠는 입학식에 함께 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했다.

아빠는 연변에서 한국 초청 사기피해를 입은 조선족과 홍수 피해를 입은 북한 동포를 돕겠다고 이리저리 뛰었다. 그때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대외협력국장이었던 아빠는 결국 중국 공안의 비위를 건드려 1999년 추방을 당했다. 우리 민족 유랑의 아픔을 보듬겠다고 연변으로 연해주로 헤맨 아빠와 엄마, 정작 우리 가족은 15년 세월 동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유랑의 삶을 살았다.

아빠는 러시아에서 입국금지 당하고 강원도 동해시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우정마을과 고향마을에서 생산한 NON-GMO콩으로 청국장, 메주, 된장, 압착콩기름을 국내에 판매하는 '바리의꿈' 일을 하고 있다. 마침 블라디보스톡까지 배편이 있어 엄마와 내가 다니러 가기도 좋았다. 기금과 아빠가 주도한 '고려인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립' 사업이 마무리될 즈음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은 기념관사업에서 '기금'은 빠지라고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이어진 입국금지조치, 지금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벌써 로지나 서당이 8년째, 나름 성과가 있었다. 2017년 4월 16일은 특별했다. 로지나 서당 11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한국교육원에 가서 처음으로 한국어능력시험 토픽 1, 2급에 도전했다. 한 달 뒤에 있었던 발표, 놀랍게도 전원 합격이었다. 2019년 3.1절 백주년 기념수업도 가슴에 남는다. 연해주에서 투쟁했던 최재형, 이상설, 안중근 의사의 삶을 들려주었다. 태극기를 그리고 한복에 자신의 얼굴을 오려 붙여 마치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게시판 꾸미기를 했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유허비를 찾아서 2017년 발해성터를 비롯 독립운동가 유적을 답사했다. ⓒ 김산하 제공

 
잊을 수 없는 학생도 많다. 강이리나는 초등학교때부터 서당을 다니며 한국과 한국어,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로지나 서당의 시간이 행복했고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고려인 아이들을 위해 '로지나 서당'같은 학교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울컥했다. 그 오랜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것은 연해주 일대에 고려인들이 4만이나 되는데 이들을 위한 한글교육사업은 로지나 서당을 제외하면 기념관 내 한글학교, 최재형고려인민족학교, 아르쫌 고려인문화센터 내 한글학교가 고작이다. 적지 않은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찾아주기에는 강사도, 재정도, 교재도 모두 보잘 것 없는 상태다.

그래서 '로지나 서당 시즌2', 아이들에 대한 직접 수업을 넘어 고려인한글교육의 기지 역할을 생각해보고 있다. 선생님들을 육성하고 교재교구를 개발하고 장학금과 후원회를 만들어 어학연수를 보내고 한국의 청소년들과 방학캠프를 꾸리는 등 기지로서 할 일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아빠 엄마는 당신들이 좋아하던 민중가요 '의연한 산하'라는 노래에서 따와 내게 '산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장대한 연해주 벌판에 처음 섰을 때, '고려인 한글교육사업의 기지'를 생각했을 때 내게 '산하'라는 이름은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활주로에 비행기가 닿는 소리. 블라디보스톡 공항이다. 아빠는 언제 깼는지 안전벨트를 풀고 창밖을 두리번거린다. 코까지 골면서 잘 자대, 하는 내 핀잔에 아빠는 씩 웃으며 엄마 만나러 빨리 나가자고 재촉한다.

비행기 트랩을 내리니 공항청사까지 연결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돌개바람이 차갑게 들이친다. 연해주에서 와서 영하 40도의 위력을 알았다. 연변에서도 추운 날씨에 단련되었지만 추위의 결이 달랐다. 속살을 파고 들면서 쿡쿡 찌르는 뼈마디가 아픈 추위였다. 아빠는 10년 만에 만나는 러시아의 추위가 반가운지 심호흡까지 하며 음미한다.

과연 오늘은 별 탈 없이 통과할 수 있을까? 아빠 김현동, 아니 김현동 동지와 함께 벌여나갈 사업이 정말 많은데. NON-GMO콩사업도 그렇고 한글교육기지사업도 그렇고... 청사에 들어선 아빠는 어깨를 펴고 입국심사대 앞으로 걸어간다. 내 가슴이 콩콩댄다.
 

1995년 양수리에서 중국 연변에 들어가기 직전 양수리에서 지낼 당시의 김산하 가족 모습. 오른쪽이 산하의 언니 의연이다. ⓒ 김산하 제공

 
못다한 이야기
① 김산하는 2020년 6월 '로지나 서당 시즌2'를 최종 결정하고 '센터'로서 역할을 조금씩 하고 있다. 2021년 7월 한국을 방문해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한글학교와 최재형고려인민족학교에 각각 재미있는 한국어 교재교구로서 세이펜, 벽그림세트, 단어카드, 개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멜로디언에 맞는 호수를 준비해서 선물했다. 본 기자와는 이때 인터뷰를 잡았으나 코로나 4단계 발령과 출국일정 등 어려움이 있어 이메일 인터뷰로 대신했다.
 
한편 김산하는 기금의 다른 사업 '바리생협'과 '바리의 꿈' 일도 하고 있다. 바리생협은 2013년 고려인들과 함께 재배하는 유기농채소와 가공식품(한국전통식품위주)을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의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꾸러미를 배송하고 있다. 고려인정착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운영하는데 코로나를 계기로 작년부터 회원이 크게 증가했다.

2021년 8월부터는 '바리의 꿈' 대표도 겸하고 있다. 로지나 서당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로지나 서당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rojinaseodang)을 참조하면 된다.
 
② 김현동은 2020년 2월 29일 인천발 대한항공편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무사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했고 아내 주인영 그리고 우정마을, 고향마을 사람들과 뜨거운 포옹을 했다.
 
김현동은 2020년 10월 19일 국회외교통일위원회 김영호 의원실의 요청으로 외교부와 재외동포재단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혔다.
 
■ 다음
 
2009년 9월초 당시 재외동포재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새로 취임한 권영건 이사장 체제하에서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립 추진위 (추진 위원장 이부영 장준하 기념사업회 이사장 )와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에게 느닷없는 공문을 발송합니다. 내용은 2009 9.30일 예정되어 있던, 추진위가 준비한 기념관 준공식을 중단하고 기념관 운영을 중단하라는 통보였습니다.
 
이 공문의 의미는 2004년부터 건립을 추진한 주체 기관인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립 추진위"를 부정하고, 후원기관이었던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 재단이 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고, 건립사업을 실무적으로 추진하던 동북아평화연대와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을 기념관 운영에서 배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기념관 준공과 운영에 극도의 어려움과 혼란이 초래 되었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참고기사 : http://omn.kr/1ps6w
 
④ 김현동이 중국에서 1999년에 추방당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김현동은 연변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대외 협력국장으로 '조선족한국초청사기피해자' 구호 활동을 했다. 당시 동북 3성의 조선족사회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려는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악용한 일부 한국인들이 입국을 시키주겠다고 사기를 벌였고 피해규모는 약 1만7000명이 500억원 정도를 날린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의 월 급여는 500위안(한화 5만원) 정도인데 피해를 당한 금액은 가구당 3만위안(300만원)에서 7만위안(700만원)에 달했다. 조선족 사회의 1/3이 직간접 피해자였으니 조선족 공동체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 무렵 북한이 큰물 피해로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되자 수많은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와 조선족 친척을 찾아 헤매는 일이 일어났다. 김현동은 두만강 유역에서 북한 난민 구조활동까지 벌였다. 이런 그의 노력은 중국 공안을 자극시켰고 '불법 월경자를 지원'해 국경법 50조, 51조를 어겼다고 추방을 당했다. 그에 관한 더 많은 얘기는 아래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http://omn.kr/1rfub
 
④ 우정마을의 솔빈문화센터는 마을회관인데 '솔빈'의 뜻은 발해시절 우스리스크 주변을 솔빈부라고 칭하였던 데서 따 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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