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6 11:23최종 업데이트 21.08.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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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통령 선거 국면은 상당한 흡입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소 이상한 양상도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직선제 하에서 보기 드물었던 광경이 이번 선거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정권에서 일했던 인물이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은 얼마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보수 야당에 가세하거나 그 진영 인물로 분류돼 유력 주자 그룹을 형성하는 지금의 현상은 특이하다. 전직 검찰총장과 전직 감사원장은 별 어려움 없이 보수 야당의 유력 주자가 돼 있고, 전직 경제부총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게다가 이들은 한결같이 비정치인 출신이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전직 관료들이 보수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그룹을 손쉽게 형성하는 모습은 야권이 포용력이 있다기보다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보수 정당의 시스템에 결함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기성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음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한국 정치의 권위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점도 있다. 기존 행정부에서 주요 자리에 있던 전직 관료들이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이 결코 낮지 않은 상황인데도 스스럼없이 야당으로 넘어갔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정치 분야의 권위 구조가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지금과 상당히 다른 정치환경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약 70년 전 이맘때 벌어진 대선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팽 당한 사냥개
 

1952. 2. 12.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근해에 정박 중인 미 해군 Wisconsin 호 함상에서 미 해군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다. ⓒ NARA

 

한국전쟁 중인 1952년 8월 5일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는 불법·부정한 선거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이상한 선거이기도 했다. 그해 대통령선거는 재선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이승만 대통령이 전시의 혼란을 틈타 7월 4일에 불법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키고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세계 최강 미국과 아시아 대국 중국을 비롯해 약 20개 국가가 참전한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고 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헌법을 개정하는 것도 놀랄 만했지만, 혼란한 전쟁 와중에 국회 간선제를 국민 직선제로 바꾸는 것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것 못지않게 이상한 것은 여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이 여당 부통령 후보와 러닝메이트를 이루지 않고 극력 배척하는 양상까지 빚어졌다는 점이다. 그것도 1명이 아닌 2명의 여당 부통령 후보를 모두 다 밀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이승만의 여당인 자유당은 1951년 12월 23일 쌍둥이로 태어났다. 똑같이 이승만을 구심점으로 하고 똑같은 당명을 쓰는 두 정당이 같은 날 출범했던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주축인 쪽은 '원내 자유당'으로 불렸고, 그렇지 않은 쪽은 '원외 자유당'으로 불렸다.

국회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이 의회를 견제하는 데 동조하는 사람들은 원외 자유당으로, 이승만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의회 견제만큼은 못마땅한 사람들은 원내 자유당으로 몰려들었다.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을 편애했다.

그렇지만 그는 두 개의 자유당이 지명한 부통령 후보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둘 다 배척해버렸던 것이다.

이승만이 더 좋아했던 원외자유당의 대통령-부통령 후보 선출에 관해 1952년 7월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대통령에 이 박사, 부통령에 이범석 씨'는 이렇게 보도했다.
 
19일 대전시 공관에서 전국 대의원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차기 대통령 및 부통령 지명대회를 개최하고, 차기 대통령 및 부통령의 후보자 지명에 들어가 기립으로써 표결에 부친 결과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박사를, 부통령 후보엔 이범석 씨를 각각 절대 다수로 지명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직전에 원내 자유당은 3·1운동 민족대표이자 제2대 국회의원인 이갑성을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더불어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런 상태에서 원외 자유당이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범석 내무부장관을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내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어느 부통령 후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의 친위 조직은 그런 그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부통령 후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그해 7월 31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에 따르면, 전국애국단체연합회가 결성한 '이 대통령 재선 추진위원회'는 "이 박사는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계급의 대상만이 될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이 흔앙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하고도 독특한 영도자이기 때문에 전 국민이 궐기하여 추대하는 것입니"라면서 그가 특정 정당의 지지를 받는 부통령 후보와 함께 선거를 치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은 특히 이범석에게 충격이 될 만했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서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이승만의 불법 개헌을 위해 자기 손을 더럽힌 인물이 바로 이범석 내무부장관이었다.

그는 국회 내의 이승만 반대 세력을 체포하고 경찰 병력으로 국회를 포위함으로써 직선제 개헌안이 불법적으로 통과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라는 극우단체를 이끌어 '족청'이라는 단어와 함께 곧잘 연상되는 그는 부산정치파동 현장에서 이승만의 '사냥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팽'을 당했던 것이다.

이 같은 토사구팽과 관련해 미국의 의중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범석을 좋아했지만, 1948년경부터는 극우적 성향 때문에 꺼려했다.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2018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4권에 실린 이택선 한국외대 외래교수의 논문 '해방 후 이범석 정치노선의 성격'은 "이범석을 한국의 군사지도자나 독재자로 세울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으로 인해 이범석의 적극적인 행동들은 일정 범위 내에서 좌절"됐다고 설명한다.

여당도 야당도 아닌 의외의 인물
 

투표하는 함태영 부통령 ⓒ 연합뉴스

 

이승만이 자유당 부통령 후보들을 배척하는 가운데 8월 5일 대선이 치러졌고, 두 후보는 모두 낙선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선거에서 74.6%를 득표한 반면, 부통령선거에서 이범석은 25.5%, 이갑성은 7.0%를 기록해 현저한 대조를 이뤘다. 둘로 갈라졌다고는 하지만 집권여당의 부통령 후보들치고는 득표율이 낮았다.

덕분에 어부지리로 부통령이 된 사람은 여당도 야당도 아닌 의외의 인물이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41.3%를 기록한 전 심계원(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15년간 존속했던 국가기관 회계 감독 기구)장 함태영이 바로 그였다. 직전까지 감사원장으로 일했던 함태영이 여당 후보들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됐던 것이다.

그런데 전 감사원장 함태영의 당선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직적인 관권 선거가 그를 뒷받침했다. 이승만이 이범석보다 덜 부담스러운 그를 밀어줬던 것이다.

개표 과정에서 함태영의 우세가 확실해진 8월 6일에 원외 자유당은 성명을 통해 함태영의 득표율을 괴이사(怪異事)로 평가하면서 "함태영 씨가 최고 득점으로 리드하고 있는 원인은 경찰과 지방 행정인원이 강제적으로 선거 간섭과 운동을 감행한 데 기인"했다면서 "함태영이란 이름도 모르던 자"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 국민이 모다 통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지지자들을 내세워 자신은 특정 단체나 계급이 아닌 전 국민이 기쁜 마음을 받드는 위대하고 독특한 영도자이므로 특정 정당이 추천한 부통령 후보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랬던 그가 상대적으로 만만한 인물을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의 이맘때 치러진 제2대 대선은 요지경이란 말을 연상시키는, 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선거였다.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법적 개헌을 관철한 대통령이 여당의 두 부통령 후보를 배척하고 관권 선거로 무소속 후보를 부통령으로 만든 선거였다.

상식적인 정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이승만의 자의적 판단이 크게 작용한 제2대 대선은 향후 이승만 정권이 지향하게 될 방향을 드러낸 징후였다고 볼 수 있다. 헌법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당의 절차와 시스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승만의 스타일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정당민주주의의 근간이 그의 시대에 흔들리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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