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07 17:34최종 업데이트 21.08.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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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정치참여가 활발하고 팬데믹 등으로 서민경제가 어려울 때는, 서민 대중을 위한 국가의 공공 기능이 확대되는 게 일반적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이런 시기에는 일반 국민들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국가 기능이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에서 '작은 정부'론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여성가족부나 통일부의 무용론을 내세우면서도 굳이 '작은 정부'론을 함께 거론하는 것은 여성가족부·통일부 사무의 효율적 재편 못지않게, 일반 대중을 위한 국가 공공 기능의 축소에 뜻을 두고 있으리라는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일반 대중을 위한 공공 지출의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런 논의를 제기하는 것은, 소수 특권층을 대변하던 과거의 스타일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보수 정당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은 정부'를 관철하고자 투쟁하는 보수 진영의 그 같은 모습은 지금뿐 아니라 옛날 역사에서도 곧잘 발견된다. 오늘날의 논의와 완전히 결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양상은 다른 나라뿐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조선 후기의 효종 임금을 상대로 한 송시열의 투쟁에서도 그런 양상이 나타났다.

조선의 대표적인 보수 정치가

조선 후기 보수 정치의 대명사인 우암 송시열은 황해도 남부와 경기·충청도에 기반을 둔 서인당의 대표 주자였다. 그는 기호(畿湖) 지방으로 통칭되는 이 지역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가 보수 정치가가 된 것은 성장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 은진 송씨로서 충청도 옥천에서 자란 그는 호서(湖西) 지방 3대 명문가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에 실린 '회덕향안 서(懷德鄕案序)'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호서에 예로부터 있었던 삼대족(三大族)이라는 명칭은 대개 연산(連山)의 김씨, 니산(尼山)의 윤씨, 그리고 그중 하나가 회덕의 우리 송씨다."
 
연산의 광산 김씨, 논산의 파평 윤씨와 더불어 회덕의 은진 송씨 가문이 제천 의림지 서쪽인 호서 지방의 3대 명문가라고 했다. 경제력(노비+토지)이나 학문적 명성, 관료 배출 숫자 등에서 세 가문이 호서 삼대족을 이뤘다는 것이다.

3대 명문가가 자리 잡은 호서 지방은 기호 지방의 일부분으로서 조선 후기 서인당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이 삼대족의 후예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데릴사위가 되어 논산에 정착한 뒤 경제적 기반을 잡은 파평 윤씨 일파가 그의 조상이다.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도봉서원. 서울시 도봉산 중턱에 있다. ⓒ 김종성

 
송시열이 태어난 해는 선조 임금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출생해 광해군의 속앓이가 시작된 이듬해인 1607년이다. 송시열은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에 서인당의 승리를 목격했다. 16세 때인 1623년에 소수파 정권인 광해군의 북인당(대북당)이 몰락하고 기호 지방 지주계급을 대변하는 서인당이 집권당이 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자기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몰락하는 모습을 10대 중반에 관찰한 송시열은 서인당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는 인물로 성장했고, 그의 이런 모습은 동인당 분파인 남인당과의 대결뿐 아니라 왕실과의 대결에서도 선명하게 표출됐다.

왕실은 귀족들과 제휴하기도 하지만 대립하기도 했다. 천명(天命)의 대리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간주된 왕실은 귀족에 비해 소수였기 때문에, 귀족과 균형을 맞추려면 일반 민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왕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국가 질서를 편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권력과 고유 영역을 보유한 귀족들의 존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조시대에는 백성과 왕실의 대립 구도보다 왕실과 귀족의 대립 구도가 훨씬 선명하게 형성됐다. 기호 지방 기득권 세력의 대표주자인 송시열이 왕실과 대립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은 그 대결에서 한때는 크게 당하고 한때는 크게 이겼다. 크게 당한 것은 숙종 때였다. 군주보다 더한 권위와 위상을 누리던 송시열은 1674년에 만 13세로 등극한 숙종 임금에게 밀리면서 이듬해 2월 7일(음력 1월 13일) 생애 최초의 귀양을 당했다. 1675년에 송시열은 68세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과의 관계에서는 달랐다. 효종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이 관계에서만큼은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중앙군 확충 정책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효종의 '큰 정부'론을 억누르고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관철했다.

중앙군 늘리려는 왕의 숨은 뜻

 

효종의 무덤인 영릉(寧陵). 녕릉으로도 표기된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 김종성

 
효종은 정통성이 약한 군주였다. 형인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와 갈등을 겪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데 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적절한 명분도 없이 배척을 당한 뒤에 인조의 후계자가 됐다.

정통성을 갖춘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이 연달아 배제된 상태에서 1649년에 군주가 됐기 때문에, 효종은 콤플렉스를 안고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1623년 광해군 실각 이래 26년째 장기 집권 중인 서인당에 끌려다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안 그래도 양반 기득권층이 더 강력한 상황에서, 군주의 정통성이 약하면 일반 대중의 처지도 함께 열악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조세 정책이나 노비 정책에도 기득권층의 입장이 더 많이 투영될 소지가 있었다.

이런 구도를 뒤집고자 효종이 전개한 유명한 정책이 중앙군 확충이다.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한 이 정책의 숨은 취지는 왕권 강화였다.

국가가 보유한 공노비와 지주들이 보유한 사노비 중에서 훨씬 힘든 쪽은 사노비였다.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사천(私賤, 사노비)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국가에 예속된 사람들보다는 양반 귀족들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훨씬 힘든 삶을 영위했다. 

군주가 중앙군을 확충해 군인의 수를 늘리게 되면 사노비 속의 장정 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이 나랏일을 한다고 해서 부유해지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일을 하는 백성의 숫자가 늘어나면 대중에 대한 양반 귀족들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왕조시대의 '큰 정부'는 백성에 대한 복지 지출을 늘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양반 귀족들의 대중 지배력을 떨어트릴 수는 있었다. 효종의 중앙군 확충 정책은 그의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과 더불어 사노비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다. 

효종의 군비 확충 정책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주상 경호부대인 금군을 확대하고 중앙군 조직을 부분적으로 개편하는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면에서는 실패였다. 중앙군의 일원인 어영청과 훈련도감을 확충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실패한 것은 조세 증가와 왕권 강화를 꺼려하는 서인들의 반발이 드셌기 때문이고, 송시열이 그 선두에서 임금을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조판서 송시열 및 서인들과의 대결에 부담을 느낀 효종은 죽기 2개월여 전에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한 것이다.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과의 독대를 통해 군비 강화를 관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따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독대가 이뤄진 날이 1659년 4월 2일(음력 3월 11일)이다.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
 

창덕궁 희정당. ⓒ 김종성

  
이 자리에서 효종은 '북벌'을 거론했다. 그가 북벌을 언급한, 기록상 최초의 순간이었다.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제7권 '악대설화' 편에 따르면, 효종은 자신이 군비 강화를 추구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서이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송시열은 "(그러다가)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국가가 망하게 되면 어찌하시렵니까?"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개의치 않고 효종은 "하늘이 내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번 거사해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오"라며 서인당의 당론을 바꿔줄 것을 촉구했다.

송시열은 자기한테는 그럴 힘이 없다며,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큰 정부'를 만들려는 효종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표현한 것이다.

송시열은 사심을 없애시라는 발언까지 했다. 또 '수신제가'의 다음 단계인 '치국평천하'보다 수신제가의 전 단계인 '격물치지·성의정심'부터 하시라는 말도 했다. 마음공부를 먼저 하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모욕이 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회담은 결국 결렬됐다. 서인당의 협조를 받아 큰 정부를 만들려던 효종의 계획은 무산됐고, 작은 정부를 만들어 민중과 군주를 누르고자 했던 서인당과 송시열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로부터 2개월여 뒤인 1659년 6월 23일(음력 5월 4일) 효종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효종과 송시열의 대립 구도는 사라졌다. 이때 효종은 40세, 송시열은 52세였다.

하지만 송시열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띠동갑 군주의 '큰 정부'론을 꺾은 송시열은 그로부터 15년 뒤 13세 된 효종의 손자를 만나 굴욕을 당했다. 그러다가 1675년에는 68세 나이로 생애 최초로 귀양을 가고 1689년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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