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4 18:53최종 업데이트 21.07.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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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 조상이는 평양 보통강구역 서장동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나름 노래 솜씨가 있어 교내 독창회에 나가 1등도 몇 번 한 터라 경흥중학교 내에서는 소년궁전에 예술특기생으로 추천될 거라는 얘기가 오갔다. 그런데 조상이는 평양에서 주먹깨나 쓰던 둘째 형을 본받아 동네를 휘저으며 싸움질을 하고 다녔다.

1967년경 당시 노동당 연락부는 "청소년들을 선발, 남쪽으로 내려보내 그곳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공작한다"는 새로운 대남 전술 하나를 세웠다. "어리니까 검문도 쉽게 피할 수 있고 남쪽의 거리 청소년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겠냐"는 판단이 있었다고 조상이는 기억한다. 뒷골목을 쏘다니며 분주소(파출소)를 들락거렸던 그는 1967년 12월 소환 대상이 되었다. 
 

분단체제의 고통을 온 몸으로 겪은 조상이 70년 살아온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 민병래

 
당에서는 처음에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때 열일곱이던 조상이에게는 놀랍고 당황스런 제안이었다. 그의 집안에 항일운동가나 노동당 당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양 제1건설 트러스트의 평범한 목수였을 뿐.

하지만 조상이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말은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목숨을 걸 수도 있다는 말은 소년의 영웅심을 자극했다. 그 길로 조상이는 평안남도 강동군 대동리로 옮겨졌다.

"조국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당의 제안

그때부터 1969년 7월 진남포를 출발하기까지 훈련의 연속, 새벽 6시에 일어나면 20kg 모래주머니를 메고 왕복 3.8km나 되는 가파른 산길을 뛰었다. 구보는 가장 중점을 둔 훈련으로 새벽, 아침, 오후 때로는 저녁까지 보통 3~4회를 했다.


구보시간 외에는 격투기 연습, 깊은 산골에 천막밖에 없는 훈련소라 바닥을 평평하게 다져 권투를 배우고 모래를 매트 삼아 유도를 익혔다. 그렇게 대동리에서 6개월여 훈련을 받고 신양군 장산리로 옮겨 암호해독, 무전교신, 독도법과 사격훈련을 받았다.

조상이는 훈련소에 들어가 첫 번째 겨울이 깊어지던 어느 날 "너의 임무는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할 수 있겠냐"라는 질문을 들었다. 그날따라 추위는 매서워 주변의 산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나무들은 움츠리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능선을 넘어가던 늑대울음도 얼어붙어 뚝뚝 끊어졌다.

1969년 7월 20일 낮 12시 조상이는 조장 한OO과 함께 진남포를 출발했다. 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DMZ 일대에 철조망이 세워지고 경계가 강화돼 서해바다 루트를 택했다.

조상이와 한 조장은 쾌속정을 타고 7월 21일 새벽 1시 전라남도 영광 법성포 해안에 닿았다. 이틀에 걸쳐 밤을 도와 장성까지 내달렸다. 두 사람은 야산에 소총과 배낭을 묻고 일제 점퍼로 갈아입었다. 7월 24일 호남선을 타고 25일 새벽 서울역에 도착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경향신문 69년 8월 2일, 8면 사회면 캡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루를 묵은 조상이는 이튿날 조장과 함께 서울역 광장으로 나가 구경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다음 날은 서로 떨어져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오후 6시에 서울역 시계탑에서 만났다. 역 근처 조그만 식당에서 저녁으로 설렁탕을 시켰을 때 창문 너머에서 "쟤네들이에요"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네다섯 명이 들이닥쳤다.

잡히고 나서 들어보니 한 조장이 혼자 다닐 때 서울역 대합실에서 어떤 청년에게 서툴게 접근한 게 화근이었다. 옷은 일본제로 폼을 냈는데 북녘 말투를 쓰고 주머니에 돈이 많으니 의심을 산 것이다. 그 무렵은 1968년 1월에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1969년 3월에는 강원도 주문진 무장침투 같은 사건이 연이어 터져 '수상하면 신고한다'는 국민정서가 깔려 있던 때였다.

그들이 잡혀 간 곳은 남산 밑에 '신한무역회사'라는 간판을 단 대공수사기관, 어린 '공작원'들이 그저 서울역 주변을 왔다갔다 하다가 이틀 만에 잡혔으니 조사는 이렇다 할 게 없었다.

공작원 출신 무기수가 교도소에서 낳은 신화

조상이는 1심과 2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서울구치소에서 살아가던 72년 어느 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판결문을 받았다. 그때 조상이는 "이런 징역을 평생 살릴 거면 차라리 죽여달라"며 감방문을 흔들고 울부짖었다. 그만큼 징역 생활은 힘들었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던 조상이는 구치소에서 건달들에게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그들은 조상이를 '새끼 빨갱이'라고 놀려대고 목욕이나 운동 시간에 만나면 툭툭 건드리며 괴롭혔다. 교도관들은 말리는 척만 했다.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자살을 막는다고 그의 손에 24시간 수갑이 채워졌다.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할 때만 풀러줄 뿐 밥 먹거나 용변을 볼 때도 수갑을 찬 채로 해결해야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가장 힘든 건 배고픔이었다. 동그랗고 납작한 틀로 눌러 주는 가다밥은 아이 주먹만한 크기였다. 된장국은 건더기 없는 국물뿐이었고 반찬은 주로 장아찌였다. 무쇠도 씹어먹을 나이에 세끼 밥이 그러하니 밤마다 허기졌다.

배고픔에 독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배급 사정이 어려워 7남매의 끼니를 챙기는 건 엄마에게 힘겨운 일이었다. 저녁 때가 되면 아빠랑 같이 먹겠다며 엄마는 슬며시 일어났고 칠남매는 숟가락을 들기 바빴다. 보리밥에 김치 한 보시기, 된장에 몇몇 나물밖에 없었지만 사랑이 넘쳐났던 밥상, 그 밥상이 그리웠다.

조상이는 무기로 감형받고 대전교도소를 거쳐 73년도에 전주교도소로 옮겨졌다. 서울구치소에서 전주교도소까지 일반 재소자들은 '소년 빨갱이'라고 조상이를 놀려댔다. 나쁜 짓 하다 잡혀 온 놈들이 그래도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온 자기에게 비아냥대는 것을 조상이는 참을 수 없었다.

평양 뒷골목에서 싸움깨나 했던 배포에 공작원 훈련때 익힌 무술로 깡패들과 여러 번 맞짱을 떴다. 싸움 뒤에는 교도관들에게 매질을 당했고 허망함이 몰려왔다. 서울구치소에서부터 가졌던 자살 충동이 불끈 솟아오르곤 했다.

그때 조상이보다 21살 많은 좌익수 양원진이 자신이 조장으로 있는 목공반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며 위로해주고 희망을 갖자고 했다. 양원진은 조각나무를 구해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조상이를 도우며 세밀하면서도 빠르게 작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덕분에 조상이는 "교도소에서 실력을 키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바깥 세상에 나가 보란 듯이 살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 후 노력을 기울여 전주교도소 대표로 기능올림픽에 나가 건축과 목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원래 좌익수는 참가할 수 없지만 전주교도소는 실적이 필요했고 조상이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니 언제나 출전 1순위였다.

조상이가 이룬 신화는 또 있었다. 1973년 전주교도소로 와 4급수에서 1급수로 올라간 것이다. 급수가 올라가면 편지와 면회 횟수는 물론 식사 양도 많아지고 가석방 심사에도 유리하다. 그런데 1등급이 올라가려면 책임 점수를 따야 한다.

분류심사에서 조상이에게 부여된 점수는 1080점. 한 달에 딸 수 있는 최대 점수가 12점이니 1080점을 따려면 꼬박 7.5년이 걸리고 1급수까지는 최소 23년이 걸린다. 그런데 조상이는 달마다 만점에 기능올림픽에서 거푸 금메달을 따고 교도소 내 체육대회에서도 우승하며 6년 10개월 만에 이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전주교도소에서 자활을 준비하던 조상이는 특별한 인연을 만난다. 신영복이 1986년 2월 19일, 대전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 2층 12방으로 옮겨왔다. 11방은 재소자들이 서예를 배우는 서예방이고 12방은 서화를 공부하는 서화방이었다. 따로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고 방바닥에 담요를 깔고 그림을 그렸는데 원광대 동양화과 교수 벽강 유창희가 와서 지도를 해주던 참이었다.

신영복은 오자마자 조상이와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조상이는 신영복 선생 환영을 겸해 옆 방 건달에게 얻어 온 담배 한 가치를 나눠 피고 요구르트로 몰래 만든 술까지 대접했다.

신영복이 들어온 다음 날부터, 조상이의 방은 붐볐다. 사상범들은 물론 과장급 간부들도 인사를 왔다. 대학입시를 준비하거나 진급시험을 준비하는 교도관들은 신영복에게 배움을 청했다.

한국화를 공부하는 조상이에게 신영복은 '함께 가자 우리' '여럿이 함께' 같은 글씨를 써보이며 한 폭의 글은 "대소·강약·농담 등이 서로 의지하고 감싸줘야 한다"는 알들 모를 듯한 가르침을 주었다.

1988년 8월 14일 광복절 특사로 나가게 된 신영복은 "먼저 나가게 돼서 죄송합니다"라며 조상이의 손을 꼭 잡고 병풍용 2벌, 액자용 7장의 글씨를 선물했다. 

북에 있는 가족은 못 만나지만... 하나뿐인 아들
 

19살에 공작원으로 내려온 조상이 그는 온 몸으로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 민병래

 
"아빠! 제가 중고차 하나를 사고 싶은데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금 부족하니 3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

조상이는 그러마고 전화를 끊었다. 첫 직장을 구했는데 전주 외곽이어서 출퇴근에 차가 필요하다는 아들의 전화였다.

조상이는 오랜 징역생활을 하면서 꿈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남파되기 일주일 전 휴가를 얻어 집에 갔을 때 둘째 형과 장기를 두었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옆에 와 등을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훈수를 두었다.

여동생 상옥이는 '상이오빠가 이길 거야' 하며 꿀물을 타왔다. 장기판에 둘러앉아 웃고 박수칠 때 엄마는 부엌에서 온면을 만드셨다. 다른 모든 기억들은 희미해도 이 장면만은 또렷했다.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 이렇게 딱 한 번만이라도 둘러 앉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북녘 땅을 자유로이 오가는 것은 어차피 기약없으니 조상이는 남쪽에서라도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는 소망대로 1999년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와는 이래저래 벽이 높았다. 1989년 가석방으로 전주교도소에서 나와 목수 일을 하며 장만한 집을 아이 양육비로 주기로 하고 이혼을 결정했다.

조상이가 목수연장을 들고 집에서 나올 때 백일을 갓 지난 아들은 꼬물대는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솜털같은 볼에 입맞춤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유일한 핏줄과 또 이렇게 헤어져야 하다니 자신의 운명이 왜 이렇게 기구한지 한스러웠다.

그후 아들과는 20년을 떨어져 살며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며 정을 나눴다. 아들이 성장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자책감에 매달 적게나마 용돈을 거르지 않고 보내줬는데 그 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니 기특할 뿐이다.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고 하니 300만 원이 아니라 3,000만 원인들 못 주겠는가.

조상이는 요즘 칠십이 넘어 몸도 힘든 데다가 코로나에 불볕더위까지 더해져 일할 의욕을 많이 잃고 있었다. 첫 직장을 얻었다는 아들의 전화는 조상이를 일으켜 세웠다. 신영복 선생이 떠나면서 "조 선생님 출소하면 '새끼는 언제나 어미새의 새봄이니' 꼭 결혼해 씩씩한 아들을 낳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 놈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더 힘이 돼야지 생각하며 조상이는 아들과 통화가 끝나자 다시 목수 연장을 집어 들었다.

<못다한 이야기>
이 글은 8월 1일 이후 현장언론 민플러스(www.minplusnews.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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