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07 11:33최종 업데이트 21.07.0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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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1주년인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 집앞에서 서대문지역에서 활동하는 진보당, 민주노총 등 단체들이 전두환의 대국민사죄, 제대로된 처벌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전두환씨 집 대문에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2'와 규탄구호가 적힌 피켓을 붙였다. 2021.5.18 ⓒ 공동취재사진

 
전두환 항소심에 피고인이 또 불출석해 광주지방법원 재판부가 불이익을 경고한 다음날인 지난 6일, 외교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 사본 21건을 공개했다. 이 문서들은 6월 29일 한·미 양자정책대화(외교부·국무부 국장급 회의) 때 미국이 건네준 것들이다.

21건 중에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1980년 5월 26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의 행적에 관한 문서다. 26일이면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계엄군이 퇴각한 지 닷새 뒤다. 계엄군이 반격에 나서기 직전인 그날,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광주 재진입 작전에 관한 통보를 받았다. 이때의 대화 기록이 이번 문서들을 통해 명확히 알려지게 됐다.


문서 속의 최광수 실장은 "다수의 군 지휘관들은 상황이 더 악화되도록 둬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면서 "현장 지휘관인 소(준열) 중장에게도 도시 재진입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했으며, 그는 실제 진입 전 서울에 통보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계엄군이 전남도청 탈환을 위한 새로운 군사행동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글라이스틴 대사가 알게 된 것이다. 

계엄군 반격 직전 미 대사에 통보한 내용

미국이 그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은 1989년 6월 21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에 전달된 국무부 답변서에서도 확인됐다.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미 국무부 광주특위 80년 미국 역할 답변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아래와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우리)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폭동진압 훈련을 받은 몇몇 안 되는 정규군 부대의 하나인 20사단 부대를 광주 재진입에 사용할 것을 고려 중에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군사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해결을 촉구해왔고 정치 문제의 해결에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도록 계속 종용해온 미국 관리들은 협상에 실패할 경우 특전사 부대를 20사단 부대로 대치시키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미국이 계엄군의 재진입 작전을 사전에 알았다는 점은 위와 같이 1989년에 이미 공개됐지만, 그에 관한 국무부의 내부 문건이 한국에 전달됐다는 점에서 이번 문서 공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외교부 북미국은 6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우리 정부는 미측이 코로나19로 인해 기록물 비밀해제 업무의 정상적인 진행이 크게 제약받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권·민주주의 등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동맹의 정신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비밀해제를 위해 협력해준 데 대해 평가"한다고 표명했다.

정치적 부담을 감내하고 비밀문서를 제공한 것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미국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5·18에 대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무부의 1989년 답변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자국이 광주 학살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듯이 행동해왔다. 전두환 집단의 기세에 밀려 마지못해 묵인해준 듯한 인상을 풍겨왔다. 하지만 이 같은 미국의 태도는 5·18 기간에 있었던 실제 상황과 명백히 배치된다.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 역시 비교적 충분하다.

마지못해 군사작전 승인? 

시민군에 밀려 계엄군이 퇴각한 지 나흘 뒤인 5월 25일,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에 입항했다. 이것은 사전에 예정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해 5월 24일 자 <매일경제> 'WP지 보도 미 항모 코럴시호 한국 수역에 출동'은 이렇게 보도했다.
 
코럴시호는 수주 간의 페르시아만 작전 임무를 마치고 필리핀의 수빅만 기지에 기항한 뒤 22일 모항인 샌프란시스코로 귀향할 예정으로 출항했었다.
 
샌프란시스코로 직행할 예정이었던 코럴시호가 방향을 돌려 부산에 입항한 것을 두고, 광주에 갇힌 시민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응원하고자 항공모함을 파견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코럴시호가 온 것은 광주시민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은 계엄군이 시민군과 대치하는 사이에 북한군이 남침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미국은 한국 사태를 이용한 북괴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예비 조치로 22일 미 항모 코럴시호를 한국 수역으로 출동시켰다고 23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보도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해서 미 국방은 당초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E3A 공중 조기경보통제기(AWACS) 2대가 23일 북괴군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도록 일본 오끼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도착, 경계 임무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북한을 견제한다면서 한반도에 군사력을 파견하는 일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깊이 따져보지 않을 때가 많다. 당시 상황을 곰곰이 살펴보면, 미국의 조치가 북한을 견제하는 측면도 있지만 전두환을 돕는 측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의 제1차 쿠데타인 1979년 12·12에 비해 제2차 쿠데타인 1980년 5·17 이후에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훨씬 더 이완됐다. 12·12 때는 전방부대 일부가 서울로 이동한 데 비해, 5·17 쿠데타로 벌어진 5·18 상황에서는 한국군 전력의 상당 부분이 서울에서 훨씬 남쪽인 전남 지역으로 이동했다.

미국의 관심사가 북한 침공을 막는 데만 있었다면, 한국군 군사력이 전방과 멀리 떨어진 한국 남부에 집중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 5월 26일에 글라이스틴 대사가 최광수 비서실장으로부터 광주 재진입 작전을 통보받은 시점에라도 미국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적극 반대했다면, 전두환의 추가적 군사행동은 현실적으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면 코럴시호 등을 급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국군 전력이 북한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집중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항공모함을 별도로 파견해줌으로써 전두환을 심리적으로 안정시켰다. 이 조치는 전두환이 전방을 염려하지 않고 광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위해 미국이 판을 깔아준 셈이 됐던 것이다.

소련 압박하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1980년 5월 25일 광주민주화운동 와중에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에 입항했다. 사전에 예정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사진은 1983년 4월 25일 4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에 입항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코럴시호. ⓒ 연합뉴스

  
미국의 지원이 어느 정도로 도움이 됐는가는, 코럴시호가 한국에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대로, 코럴시호는 "수주 간의 페르시아만 작전 임무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다가 급히 부산에 입항했다.

1979년 2월 이란 혁명과 12월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정확히 표현하면 소련군의 아프간 쿠데타 개입)으로 중동에서 반미 세력의 입지가 확장되자, 지미 카터 행정부는 종전의 유화적 태도를 버리고 공격적인 중동정책을 선보였다. 1980년 1월 23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된 카터 독트린은 군사력 과시를 통한 공세적인 중동정책의 선언이었다.

그 같은 카터 독트린에 따라 이란과 소련에 위협을 주고자 중동에 파견한 게 바로 코럴시호였다. 코럴시호가 그런 존재였다는 점은 광주항쟁 이전부터 한반도에 알려졌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 그해 2월 14일 자 <경향신문> '격화되는 인도양 패권 쟁탈전'이다.

광주항쟁 3개월 전에 나온 이 기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무력 침공으로 격화된 미·소 간의 신냉전 양상은 아프가니스탄 인접의 인도아(印度亞) 대륙과 인도양, 서방의 치명적 석유 공급로인 페르시아만 내지 아라비아해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숨 가쁜 패권 쟁탈전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아프간 사태 직후 미국과 소련은 인도양 주둔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했는데, 현재 미국은 핵항모 니미츠호와 재래식 항모 코럴시호 등 2척의 항모를 주축으로 한 20척의 기동함대를, 소련은 28척의 함정을 각각 파견시켜 무력대치를 벌이고 있다.
 
코럴시호는 니미츠호와 더불어 이란 및 소련을 압박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코럴시호를 급히 부산에 입항시켰으니, 북한이 얼마나 긴장했을 것이며 전두환이 얼마나 안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코럴시호뿐 아니라 별도의 기동타격군도 파견했다. 그해 5월 28일 자 <경향신문> '국방성 대변인 미 항모 기동타격군 한반도 해역에 주둔'은 "미 국방성의 한 대변인은 코럴시호와 2척의 순양함, 2척의 지원함, 2척의 프리기트함 등 7척의 기동타격군이 이미 한반도 주변 수역에 진입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5·18 기간에 특별 군사력을 급파해준 이 같은 조치는 전두환이 전방을 염려하지 않고 광주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미국이 자국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한국 군사력이 광주에 집중되도록 허용하는 동시에 이란·소련과 대치하던 항공모함을 부산에 급파했다는 것은, 미국이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적극 도왔음을 알려주는 증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는 전두환 못지않게 미국 역시 5·18 광주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같은 미국의 책임은 비밀문서 21건의 추가 공개 정도로 소멸될 수 없다. 5·18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소멸될 수 없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비밀문서 공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책임을 지도록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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