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1 11:16최종 업데이트 21.07.11 11:16
  • 본문듣기

미국과 중국의 대결 ⓒ pixabay

 
한민족은 외교적 위기에 처해 있다. 남과 북, 다 마찬가지다. 남한은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최근 들어 문재인 정부가 미국 쪽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고는 있지만, 아직은 여지가 남겨져 있다.

북한은 최근 들어 중국과 더 밀착하고 있지만, 향후 북미관계가 진척될 때는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한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북한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국에 훨씬 위험하므로, 북미평화협정이 가시권에 들어서게 되면 북한이 중국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이 지금은 한반도 평화를 응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미국이 휴전선 이북에 발을 들이게 되면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민족이 외세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 이 같은 상황이 조성될 때마다 청나라·일본·러시아 등이 각축을 벌인 구한말 사례가 거론되곤 한다. 그런데 구한말 사례는 실패한 사례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고자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라면, 실패 사례뿐 아니라 성공 사례도 함께 살펴봐야 맞다.

한국 역사에서 외교적 성공 사례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례가 꽤 많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사례가 많지 않다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교차점에 놓인 한민족이 그 숱한 환란을 겪고도 이제까지 국가를 유지해온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백제·고구려 등이 활약한 시대를 빼고, 그 이후의 한민족은 대체로 평화노선을 추구했다. 군사적 팽창을 별로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강대국들과 부대끼며 국체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한민족이 외교를 잘했음을 뜻한다. 침략자가 들어오면 온 나라가 목숨 걸고 싸우는 전통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규모 전쟁을 억제하는 외교 활동에도 능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국가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병 요구에 응하되 군대는 안 보내

한민족이 외교를 잘했음을 보여줄 만한 사례 중 하나로 고려 성종(재위 981~997년) 시대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유목 강대국인 거란족 요나라와 농경 강대국인 한족 송나라(북송)가 패권 경쟁을 벌였다.

이 경쟁은 경제적으로는 송나라가 우세하고 군사적으로는 요나라가 우세한 가운데 전개됐다. 전반적인 국력은 농경민인 송나라가 앞섰지만 요나라의 군사적 우위로 인해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런 애매함이 '요나라냐 송나라냐' 하는 고민을 낳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성종은 요나라 성종(요 성종, 재위 982~1031년) 및 송나라 태종(송 태종, 재위 976~997년)과의 경쟁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궤적을 남겼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요 성종 및 송 태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무게 중심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로 동아시아 평화까지 유지했다. 이는 고려의 균형추 역할에 힘입어 유목 강대국과 농경 강대국이 균형을 잡는 3강 구도의 지속화에 기여했다.

동아시아 3강을 이끈 세 군주의 재위 기간이 겹치는 시기는 982~997년의 15년간이다. 982년에 고려 성종은 만 22세였고, 송 태종은 43세, 요 성종은 10세였다. 요 성종의 경우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예지황후)의 섭정을 받았다. 고려 천추태후를 연상시키는 요나라 승천황태후는 천추태후보다 15년 빠른 982년부터 섭정 권력을 행사했다.

비주류 민족이었던 거란족이 중국과 패권을 겨룰 수 있게 된 것은 당나라 멸망 이후인 5대 10국 시대의 대혼란을 이용해 '연운 16주'라는 요충지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연주와 운주를 비롯해 북경 지역과 몽골초원 및 만주에 걸치는 연운 16주는 몽골초원이나 만주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이런 곳을 차지했기에 거란족의 입지가 향상됐던 것이다.

982년에 요나라에서 어린 군주가 즉위하자, 송 태종은 연운 16주를 빼앗고자 크고 작은 군사적 도발을 일으켰다. 이런 속에서 요 성종과 승천황태후는 송나라와 대결할 뿐 아니라 고려와 여진족에 대해서도 견제 정책을 취했다. 요나라가 남쪽 송나라와 대결하는 사이에 고려와 여진족이 자국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985년에 송 태종은 고려 성종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합세해 요나라의 기를 꺾자는 것이었다. <고려사> 성종세가(성종 편)에 따르면, 송 태종은 "좋은 때는 반복되지 않으니 왕은 헤아려보라(良時不再, 王其圖之)"고 권유했다.

송 태종의 말대로 고려 성종은 '헤아려'보았다. 그는 송나라의 파병 요구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다음이 중요하다. 실제로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고려군이 출병했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 파병을 했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에 관한 학계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2012년 고려대 이미지(李美智)의 박사학위논문 '고려 시기 대(對)거란 외교의 전개와 특징'은 "고려 조정은 출병할 것을 응낙하기는 하였으나 실행하지는 않았고, 이 해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송은 거란에 패배하였다"고 말한다. 고려의 도움 없이 송 태종이 어린 요나라 군주와 싸우다가 큰 코를 다쳤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동맹관계였던 중국 한족 왕조의 파병 요청을 수락했다가 호응하지 않은 성종의 결단은 송나라가 3강 구도를 깨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요나라에도 상당한 '견제구'가 됐다. 고려와 송나라가 언제든지 군사동맹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요나라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파병 불이행은 요나라에 기우는 듯한 조치로 비칠 수도 있었지만,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는 오히려 더 긴밀해졌다. 988년과 992년에는 고려 성종에 대해 송 태종이 책봉하는 관직과 작위의 격이 높아졌다. 그런 격상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려 군주가 실질적 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같은 외관은 고려와 송나라의 결속을 과시함으로써 요나라의 행동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황제국으로 받들면서 압록강 주변 땅 차지

고려 성종이 무조건적으로 군사적 중립을 지킨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군사적 시위도 불사했다. 991년에 요 성종이 압록강 일대에서 군사력을 과시하자, 주변의 여진족을 압박하는 것으로써 고려의 군사력을 보여줬다.

그는 상황이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듯한 모양새도 연출했다. 참다못한 요 성종이 993년에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성종은 서희를 앞세워 '앞으로는 송나라 대신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단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서희의 외교를 통해 실리도 단단히 챙겼다. 여진족이 장악하고 있던 압록강 주변 280리 땅을 고려가 차지하는 것에 대해 요나라가 양해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서희'와 함께 연상되는 '강동 6주'의 신화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들게 되면,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요 성종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또 무역도, 고려가 조공하고 요나라가 회사(回賜·답례)하는 형식으로 해야 했다. 고려 성종은 만만치 않은 요나라 군대를 돌려보내고자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편, 압록강 주변에서 새로운 영토를 얻을 가능성을 확보했다.

요나라 군대를 돌려보내고 영토상의 실리까지 챙겼기 때문에, 고려 성종은 계속해서 국력을 유지하며 균형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황제국을 송나라에서 요나라로 바꾸는 상황에서도 송 태종과 은밀한 교류를 계속했다. 이 때문에 요 성종은 고려와 합세해 송나라를 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무게 중심추가 요나라로 기울 여지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성종 시대의 고려 외교가 동아시아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 균형이 계속 유지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려 외교의 성공 사례는 성종 이후 시대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성종이 죽은 뒤에도 고려는 남의 나라 전쟁에 불필요하게 개입하지 않고, 힘에는 힘으로 맞서되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일단 물러서면서도 균형추 지위를 놓치지 않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다.

성종 시대의 외교는 군주 한 사람의 기획력이 아니라 전체 고려인들의 지혜가 결집된 결과였다. 전체 고려인들이 송 태종의 조언대로 '헤아려' 본 결과였다. 그런 공동의 지혜를 바탕으로 고려 성종은 송 태종 및 요 성종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고 고려 국체를 유지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요나라냐 송나라냐, 택일하라'라는 요구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는 노선을 고수한 것이 성종 시대 외교의 특장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