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30 12:56최종 업데이트 21.07.3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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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종 사회 이슈부터 정치담론에 이르기까지, 왜곡과 소란을 일으키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맹위를 떨친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각 나라의 고민과 대안을 소개합니다. 이와 함께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톺아봅니다.[편집자말]
대체로 가짜뉴스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일부를 과장한다. 하지만 반대 방향, 있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거나 축소시켜 가짜뉴스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주로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을 감추는데 사용되는 이 방식은 프로파간다에서 '새빨간 거짓말'(Big lie) 전략으로 불린다.

대선 패배를 가짜로 규정,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혼미하게 하며 지지자들을 선동했던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가 과장되었다는 주장,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거짓이라는 주장도 여기에 속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약 반세기 동안 '과장된 거짓 정보'로 존재한 사건이 1932~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학살'(Holodomor)이다. 약 390만 명이 아사했으며 심지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카니발리즘(cannibalism, 식인주의)까지도 자행됐다. 스탈린의 무리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추진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탄압이 기근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우크라이나 대학살이 '과장된 거짓말'로 축소 및 왜곡된 데에는 스탈린의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을 활용한 프로파간다가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 찍은 사진. ⓒ 위키커먼스

 
프리랜서 기자의 의문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1933년 1월 30일, 만 27살의 영국 청년 개러스 존스(Gareth Jones, 1905-1935)는 베를린에 있었다. 그해 2월, 프리랜서인 존스는 베를린에 머물며 독일 사회를 취재했다. 그는 1933년 3월 2일자 <더 웨스턴 메일 & 사우스 웨일스 뉴스>에 기고한 기사를 "1933년의 유럽은 독일 히틀러 독재의 탄생을 보았다. 소련에서는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낸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존스에겐 세 번째 모스크바행이었다. 러시아어, 독어, 불어를 전공한 후 1930년 영국 외교부에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수상 비서로 취직한 존스는 1930년과 1931년 연달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시 존스는 스탈린의 5개년 계획(The Five-Year Plan)을 취재했다. 5개년 계획이란, 중공업 발전과 농업의 집단화를 통한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모델을 말한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억제할 필요성은 모든 국가가 공감한 바였으므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서구 국가는 시장 경제에 개입하고 있었다. 때문에 유럽은 소련의 급진적인 국가 주도 경제 개발 모델의 결과를 기다렸다.

두 번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존스가 본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5개년 계획의 내부 갈등, 특히 농업 집단화를 둘러싼 정부와 농민층의 대립이었다. 제1차 5개년 계획(1928-1932)의 마지막 해인 1932년 가을, 한 소식통을 통해 우크라이나 식량난을 들은 존스는 원인이 5개년 계획에 있음을 느끼고 독일을 거쳐 다시 한 번 모스크바로 가기로 계획했다.

1933년 3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한 존스는 당국에 독일 공사의 초대장을 보여주고 우크라이나 여행 허가서를 받았다. 목적지인 하르키프(Kharkiv)로 가던 중 존스는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허가되지 않는 우크라이나 20여 마을을 도보로 돌며 주민들과 나눈 대화와 마을 실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개러스 존스를 기리며 만든 포스터. ⓒ 위키커먼스

 
3월 말 베를린으로 돌아온 존스는 그간 취재한 것을 3월 29일부터 4월까지 영국과 미국의 신문에 송고했다.

"기근이 러시아를 지배한다(Famine Rules Russia)"

1933년 3월 31일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에 올라간 기사 제목으로, 이것이 존스가 본 우크라이나였다. 존스는 아이들의 배가 부풀어 올라 있고 마을 주민들이 기껏해야 물, 소금, 소에게 줄 여물로 생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빵이 없어요."
"감자는 없나요?"라고 물었다. 내가 물은 모든 농민들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으로 답했다.
"소는 어때요?"가 다음 질문이었다. 러시아 농민에게 소는 부요, 음식이요, 행복이었다.
"소들도 거의 다 죽었어요. 우리가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소를 먹여요?"
"말은요?" 내가 들른 모든 마을에서 내가 물은 질문이었다. […]
"말도 대부분 죽었고 남아 있는 말들은 다 병들었어요."
-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

존스는 1933년 4월 8일 <웨스턴 메일>에 기고한 글에서는 1933년 기근이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서 비롯된 인재(man-made)라고 주장했다. 존스의 눈에 토지 공유화를 통한 농업 집단화와 트랙터를 이용한 농업의 기계화는 4가지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농촌 사회와 맞지 않았다.

첫째,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작더라도 사적 토지 소유를 원했기 때문에 국영 농장에 비협조적이었다. 둘째는 가축의 소실로, 토지에 이어 가축 국유화가 추진되자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가축을 죽였다. 국유화된 동물 역시 국가 운영의 경험 부족 탓에 질병으로 많이 죽었다. 셋째, 부농을 "농촌의 자본주의자"로 규정, 소련은 이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계급성을 문제 삼아 이들을 배척한 것은 이들의 농업 기술까지 내버린 셈이었다. 넷째, 식량 수출이다. 중화학 공업 발달과 농업 기계화를 위해 기계를 서유럽으로부터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곡물, 버터, 계란을 계속 수출했다. 식량 부족은 고스란히 국내 사회로, 특히 노동자 우대 정책로 인해 곡물 생산자인 농민이 떠안게 되었다.

존스는 "5개년 계획은 수많은 좋은 공장을 지었다. 하지만, 공장(노동자)도 식량이 필요한데, 5개년 계획은 식량을 생산하는 이들을 희생시켰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뉴욕타임스> 기자의 반박

존스 기사가 보도된 직후,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특파원 월터 듀런티(Walter Duranty, 1884-1957)가 존스를 반박했다. 듀런티는 언론계에서 존스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 리버풀 출신으로 1차 대전 때 <뉴욕타임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1922년 모스크바로 파견됐다. 10년이 지난 1930년대 초, 듀런티는 소련 분야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 됐다. 스탈린과 독점 인터뷰를 했고, 13개의 기사로 구성된 소련 뉴스 시리즈로 1932년 퓰리처상까지 수상, 기자 경력 최절정에 있었다.

1933년 3월 31일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모스크바 발 반박문의 제목은 "배고픈 러시아인들, 그러나 굶주림은 아니다"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기근으로 설명한 존스의 논점과 달랐다. 결론도 마찬가지다. 듀런티는 "사실상의 굶주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은 없다. 다만, 영양실조로 인해 질병에 걸려 사망자가 늘었을 뿐이다"고 했다. 사망자 증가의 원인을 굶주림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월터 듀런티 ⓒ 위키커먼스

 
듀런티의 글은 존스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1933년 1월 소련에서 일하던 영국 기술자들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문제로 발생한 영국과 소비에트 간의 외교적 갈등을 부각시키며, 듀런티는 존스가 로이드 조지 영국 전 수상의 비서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존스가 소비에트를 "끔직하게 박살날(terrific smash)" 사회로 이해, "수천이 이미 죽었고 수백만 명이 죽음과 기아에 위협받고" 있는 "대단히 공포스러운 이야기(a big scare story)"를 전했다고 했다.

각론 부분에서는 딱 떨어지지 않는 경계적인 개념을 사용해 존스의 직접 경험이 갖는 힘을 손상시켰다. 듀런티는 3주라는 단기간에 존스가 본 것은 일부 지역 사정에 불과하다며, 보다 신빙성 있는 소련 정부 인사에게 확인한 결과, 도시 노동자와 군대의 식량 사정은 양호하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보았을 때 식량 사정은 나쁘지 않다고 전했다. 그리고 "빵이 없다고는 하지만, 존스가 직접 시신이나 동물의 시체를 보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듀런티는 "계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계란은 전통적 농업을, 오믈렛은 스탈린이 시도하는 농업 집단화와 기계화를 의미한다. 존스가 지적한 국가와 농민간의 갈등을 새로운 농업 체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집단 영농의 낯설음과 일부 운영상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과정에서 보이는 시행착오를 5개년 계획의 전체 실패로 과장해서 몰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재반박들, 하지만

하지만 뉴욕 시민 캐서린 슈톡(Katherine Schutock)은 듀런티 기사를 읽고 의문을 제기했다. <뉴욕타임스> 편집부로 배달된 슈톡의 편지는 4월 6일자에 전문이 공개되었다. 슈톡은 편지 교환을 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한결같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며, "내가 받은 모든 편지들은 '우리들 소식을 다시 못 들으면 우리가 살아있지 않은 것이다'로 끝난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소련이 1921년 기근 때처럼 사실을 거짓정보(false information)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러스 존스 또한 5월 13일 <뉴욕타임스>에 듀런티에 대한 재반박문을 기고,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들이 소련의 검열로 인해 "언어유희와 축소의 달인"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실제 당시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들 누구도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소련은 외국어에 능통한 관리들로 언론국(Press Office)을 구성, 외국 언론인들이 보내는 모든 전보를 검열했고, 특파원들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불가능한 단어를 둘러싸고 소련 당국과 매번 협상해야 했다. 소련은 기사 내용에 따라 특파원의 비자 취소 및 연장을 결정, 특파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개러스 존스 기사가 실린 1932년 신문 ⓒ 위키커먼스

 
<맨체스터 가디언>의 모스크바 특파원 토마스 맬컴 머거리지(Thomas Malcolm Muggeridge, 1903-1990)는 검열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던 이였다. 그는 존스보다 한발 앞서 우크라이나 기근을 취재했다. 소련 당국의 여행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 행을 감행했고, 기사를 검열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교행낭(diplomatic bag)에 넣어 신문사로 보냈다. 이 내용은 3월 25, 27, 28일에 보도되었으나, 당시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고 반유대인 정책을 추진하는 히틀러에만 관심이 집중돼 주목 받지 못했다.

일부 반론에도 불구하고, 듀런티의 해석인 "배고픈 러시아인들, 그러나 굶주림은 아니다"가 정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성공할 경우 미-소 무역을 통해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소련과 공식 외교 관계 수립을 원했던 루스벨트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결국 미-소 정식 수교는 1933년 11월 이루어졌다. 소련 대표단과 같이 뉴욕에 도착한 듀런티는 만찬에도 참석, 미-소 관계 수립에 대한 공로로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반면, 소련은 개러스 존스의 소련 입국을 금지했다. 일본 군국주의로 관심을 돌린 존스는 1935년 일본을 경유하여 일행과 만주국으로 들어갔지만,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살해됐다.

오판인가 왜곡인가

의견과 사실의 부정적 표현인 오판과 왜곡은 가짜 뉴스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다. 잣대는 의도로, 의도가 있다면 왜곡이고 의도가 없으면 모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판단 착오가 된다.

듀런티의 글에서 고의적 사실 왜곡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듀런티는 존스가 알아낸 사실을 해석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존스가 영국 수상과 일했던 경력, 관찰이 몇 지역에 국한되었다는 부분성, 과정과 결론을 혼동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그의 주장을 희석화시켰다.

하지만, 1933년 듀런티의 행보에 담긴 의도는 당시 그와 같은 입장을 취했던 <유피아이>(UPI, 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모스크바 특파원 유진 라이언스(Eugene Lyons)를 통해 드러났다. 라이언스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저술한 <유토피아에서의 과제>(1937)에서 특파원들이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체포된 영국 기술자 재판에 대한 기사를 쓰려면 검열 당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기"로 존스를 버리기로(throw down) 했다고 했다.

또 듀런티와 특파원들은 특파원 여행 금지 조치가 해제된 후 우크라이나를 돌면서 마을의 실태를 확인했다고 한다. 직접 우크라이나를 본 후에도 듀런티는 침묵했고 1941년까지 모스크바 특파원 생활을 했다.

해외 교류가 쉽지 않았던 20세기, 특파원은 한 사회의 내부 사정을 독립적으로 외부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현지 체류자로서 정보 접근에서 다른 이보다 유리했지만, 이들에겐 고급 정보를 줄 내부 사회와의 연결이 필요했다. 특파원들의 중요성과 약점을 간파한 스탈린은 회유와 강제, 두 방법을 섞어가며 이들이 소련에 유리한 기사를 쓰도록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듀런티는 소련의 '특파원을 활용한 사실 왜곡' 프로파간다에 순응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경우였다.

1차 사료가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어간 1980년대 이후, 존스의 우크라이나 기근 보도는 '과장된 거짓'이 아닌 '미완으로 남은 진실'로 밝혀졌다. 이후 상황은 재역전된다.

존스의 보도가 과장된 거짓 정보였다는 누명을 벗으면서 듀런티의 퓰리처상 수상을 취소하라는 요구도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2003년 퓰리처상 측은 1933년에 듀런티가 저지른 오류를 인정했다. 하지만, 듀런티의 1931년 기사에 근거하여 상을 준 것이기 때문에 상을 취소하지는 않겠다고 결정했다. <뉴욕타임스>는 듀런티가 스탈린의 프로파간다를 읽지 못해 지속적으로 스탈린의 잔혹성을 과소평가했고 사실을 밝히려는 동료를 폄하했다고 성명을 냈다.

사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이 어려웠던 1933년, 그 해의 독립된 지성은 개러스 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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