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6 19:48최종 업데이트 21.06.2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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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이 '구멍가게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녹음기와 카메라를 멘 채 불쑥 가게 문을 열면 어떻게 반응할까? 설령 마주 앉아도 선선히 살아온 세월을 들려줄까?

수줍음을 잘 타고 말 주변도 없는 박혜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장성군의 연산상회를 찾아갔을 때 뜻밖에도 근심은 스르르 풀렸다. 국문과 대학원 선배인 심우장이 주차를 하러 간 사이, 박혜진은 가게 문을 사이에 두고 주인 할머니와 마주쳤다. 순간 그는 당황해 "오래된 가게 얘기 들으러 왔어요"라고 쭈뼜거리며 말했다. 놀랍게도 할머니는 "나 힘들게 살아왔어" 하며 박혜진의 손을 안으로 이끌었다.

"아버지가 환갑 나이에 아들 본다고 후처를 얻었어. 그때 나는 결혼했는데 전쟁이 나서 남편과 생이별했지. 기댈 때는 친정뿐이어서 돌아오니 다들 재혼하라고 성화야, 할 수 없이 이곳 장성으로 시집 왔는데 막막했지. 남편하고 또 잘못되면 어떡해, 그래서 가게를 하나 얻어달라고 했어, 그때부터 평생 이 가게를 붙들고 산 거야."
 

<구멍가게이야기>의 표지디자인 석운디자인의 이석운 실장의 작품. 나주 금성슈퍼를 모델로 그렸다. ⓒ <책과함께> 제공

 
그렇게 시작한 얘기는 가을바람이 어둑해지고 달무리가 가게 쪽창에 한두겹 쌓일 때가 돼서야 끝났다. 박혜진과 심우장은 그날, 연산상회를 떠나 광주로 되돌아오면서 '구멍가게 작업'을 시작하길 잘했다고 서로 격려했다. 이 작업은 심우장이 툭 꺼낸 한 마디가 계기였다.

"박 선생, 우리 구멍가게 이야기 들으러 다녀볼까요?"
"글쎄요, 왜 하필 구멍가게? 가서 뭘 듣지요?"



국문학을 전공한 박혜진과 심우장은 마을회관이나 노인정에서 '이야기를 채록'한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쳐다보는 곳에서 촬영을 하고 녹음을 하면 아무래도 내밀한 얘기가 나오기 어려워 아쉬움이 컸다.

"자기 삶을 깊이 있게 들려줄 수 있는 장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구멍가게 아주머니들은 거기선 다 주인공이니까요!"


그렇게 박혜진과 당시 광주과학기술원의 교수였던 심우장은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어떤 얘기를 이끌어내고 그 기록으로 무엇을 만들지 모든 게 막연했다. 두 사람은 일단 구멍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연산상회는 2011년 11월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세 번째 가게였다.

2011년에 시작된 구멍가게 작업
 

나주 금성슈퍼 표지디자인의 모델이 된 가게다 ⓒ 박혜진 제공

 
이 둘은 2011년 가을부터 2014년 여름까지 3년간, 전라남도에 흩어진 100여 곳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녔다.

오래된 가게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무작정 나섰다가 시간을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가든 면사무소나 우체국으로 직행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오래된 가게를 물었다. 어렵사리 가겟방에 자리를 잡으면 2시간 안팎 이야기를 나눴고 녹취는 풀어내는 데만 10시간 이상이 걸렸다. 전라남도 말맛을 살려내려고 몇 번을 돌려 들었다.

그렇게 많은 곳을 다니며 듣게 된 구멍가게 얘기는 묵직했다. 담양군 영천리 구판장 아주머니는 "새벽 다섯 시면 문을 열고 밤 열 시에 문 닫는데 수십 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 아이들과 한 번 놀러 가 보지도 못했고 입학식 졸업식에도 못 갔지. 군대 갈 때도 잘 다녀와라, 제대 할 때까지 면회도 못 갔어. 왜? 가게는 마을의 가게나 마찬가지야, 내 맘대로 열고 닫으면 안 돼"라고 했다.
 

고흥 호산리 가게 박혜진의 작품이다. ⓒ 박혜진제공

 
장성군의 아곡상회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자기 인생을 '진돗개'라고 했다. 대구에서 시집온 아주머니를 기다린 건 남편의 병든 몸이었다. 맞선 볼 때는 몰랐지만 신경병 환자였다. 결국 생계는 당신의 책임이 되었다. 막걸리주막을 사들여 아곡상회라고 이름짓고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구멍가게 벌이만으로는 입을 감당할 수 없어 틈틈이 농사짓고 소도 키우고... 그래서 아주머니는 "아저씨 돌봐야지, 소 봐야지, 가게 봐야지. 완전히 진돗개가 돼 부렀제"라고 했다.

박혜진이 이렇듯 사람들의 인생살이 이야기에 빠져 살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건국대 국어국문과에 입학해 구비문학반으로 활동하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충청북도 단양의 산골로 학술답사를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소백산 설화'에 이어 청하지도 않은 당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놓았다. 서너 명이 앉으니 무릎이 닿는 작은 방에서 할아버지는 손때 묻은 명심보감과 천자문을 보여줬다. 표지는 누렇게 반들거렸고 안에 있는 글자들은 빛이 바래있었다.

"밭에 가서 김매야지, 소 꼴 거둬야지, 겨울엔 장작 해야지. 농사일 돕느라 나는 학교를 못 다녔어. 밤에 아궁이에 장작불 때면서 나하고 동생이 그 불빛에 천자문하고 명심보감을 보고 또 봤어. 이게 나한테 보물이야."

마을 여기저기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실핏줄처럼 올라올 때 시작한 할아버지의 사연은 늦은 밤까지 끝나지 않았다. 대학 새내기 박혜진은 할아버지의 얘기에 흠뻑 취했고 주름깊은 눈매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어쩌면 그날의 이야기 마당이 박혜진으로 하여금 늘상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를 글로 써내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무안 해광상회 박혜진의 작품 ⓒ 박혜진 제공

 
박혜진과 심우장은 그렇게 3년간 풍부한 밑감을 모았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러 자료도 찾아냈다. 처음 시작은 "일단 오래된 가게 얘기를 들어보자"였지만 자료가 쌓이니 어떻게든 책으로 내고 싶었다. 답사 중간중간에도 두 사람은 작업 방향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했는데 책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 또한 뜨거웠다.

"<화림리 구멍가게> 할머니는 50년 가까운 가겟방 삶을 '아슬아슬'이 아니라 '아실아실'하다고 했잖아요. <영천리 구판장> 아주머니는 "인생을 다 바친 곳.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했고, 이것만큼 살아있는 얘기들이 어딨어요? 이런 삶을 그려내는데 집중하지요."
"영암의 <금월상회>는 하나로마트에서 다 묵고 난 찌꺼기를 주서 먹는게 자기네 삶이라고 했잖아요. 모녀상회는 "농협마트에서 세일한다고 광고해 하다못해 홈키파 하나도 세일해부러 우리를 완전히 죽여부렀어, 죽여만불믄 되는디 죽여갖고 밟아버려 완전히 너무 해 분다니까"라고 했지요. 중요한 건 이런 현실의 원인을 분석해야돼요. 우린 문학도이면서 연구자잖아요."
"그러면 대형마트 생기면서 동네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무너진다는 그 흔한 보고서와 다를 바가 없잖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책의 방향을 놓고 여러 날을 토론했다. 결론은 '균형'. '개인의 삶과 생활문화사의 무게추를 맞추자, 구멍가게 주인들의 삶을 그려내되 사회적 맥락을 배경으로 그려내자'였다.

이렇게 방향을 정하고 1년 반에 걸친 작업 끝에 2015년 12월 원고지 약 1200매 분량의 초안이 나왔다. 그런데 책 <구멍가게 이야기>(책과함께)가 2021년 4월 세상에 나올 때까지 무려 5년 4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공교롭게도 심우장과 박혜진의 배우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건강이 나빠졌다. 가족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니, 초안의 수정 작업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3년 사이에 사라진 구멍가게들
 

보성 남양상회 박혜진의 작품 ⓒ 박혜진제공

 
2017년 어는 날 박혜진은 광주에서 장성 나들이길에 올랐다. 광산교차로를 지날 때 박혜진은 자그만 흥분을 느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특별히 정들었던 아곡상회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게 앞에 다다라보니 '행복슈퍼'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물어보니 아주머니는 가게를 넘기고 서울 아드님 집으로 올라가셨다고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성상회만이 아니라 장성군의 오랜 된 가게들, 43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던 삼태상회가 문을 닫았고 55년간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던 아치실가게도 없어졌다. 연산상회도 백양슈퍼편의점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은 다른 군도 다를 바 없었다. 53년을 버텨온 장흥의 하꼬방가게도 31년이나 된 영암군의 세흥상회도 51년을 영업한 나주시의 금성슈퍼도...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눈 58군데에서 무려 24군데가 문을 닫은 것이었다. 불과 3년 사이에. 

박혜진은 마음이 급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한두 해가 지나면 남은 가게들의 운명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박혜진은 수북이 먼지 쌓인 원고를 꺼내들었다. 계속 묵히면 자기 인생사를 털어놓으신 분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하고 원고의 가치도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작업의 흐름은 끊긴 상태였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초고만 되풀이 읽으며 생각을 삭히던 2020년, 남편이 용기를 주었다. 그는 어떻게든 책으로 만들자고 격려했다. 남편은 스스로 나서서 연락이 끊어졌던 출판사에게 원고를 보냈다. <책과함께> 출판사에서는 "꼭 책으로 내고 싶다며 글을 완성해달라"고 답을 줬다.

그날부터 박혜진은 하루 10시간씩 써나갔다. 미심쩍은 녹취는 다시 돌려 듣고 쓰다가 막히면 구멍가게 어머니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마음을 북돋았다. 그렇게 박혜진은 2020년 가을, 초고보다 500매가 늘어난 1700매 가량의 원고를 완성했다.

10년이 걸린 여정의 마침표, 책 <구멍가게 이야기>
 

담양 강쟁상회 내부 오래된 진열장과 술탁자가 정겹다 ⓒ 박혜진제공

 
그런데 막상 책을 편집하려고 보니 아쉬운 게 사진이었다. 얼굴 나오는게 싫다고 손사래치시는 분도 많았고 가게 안이 침침해 쨍한 사진을 얻기 힘들었다. 대개 10평 안되는 공간에 진열장과 술탁자까지 있다보니 가게 전경을 담기도 어려웠다. 

박혜진이 사진 때문에 끌탕을 하며 편집 과정을 마무리지을 즈음 "구멍가게 주인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책으로 펴내는 데 동의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처음 만나서 구멍가게 얘기를 들을 때는 출판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얘기에는 비밀스러운 가정사도 있고 자식들에게는 불편한 얘기도 있었다.

결국 박혜진은 전라남도를 다시 한 바퀴 돌며 일일이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곡상회였다. 아주머니가 서울로 올라가셨고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는지 연락이 안되었다. 어렵사리 아드님 전화번호를 구해 연락했지만 "우리는 동의하지 않으니 아곡상회 얘기는 빼달라"고 했다.

아곡상회 아주머니는 박혜진이 제일 애착을 가졌던 분 중의 하나고 아곡상회의 삶을 들어내면 책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혜진은 마음을 담아 아드님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 정확히 202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출판해도 좋다'는 답신이 왔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구멍가게 이야기 - 마트와 편의점에는 없는, 우리의 추억과 마을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곳, 박혜진, 심우장(지은이) ⓒ 책과함께

 
2021년 4월 드디어 <구멍가게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2011년 시작해서 10년이 걸린 여정이었다. 대학교 때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박혜진, 서울대 대학원에서 고전소설을 공부하며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남겼지만 책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혜진은 좋은 글을 접하면 "나도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시샘으로 문장을 벼려왔다. 그런데 10년을 걸려 펴낸 <구멍가게 이야기>에는 구멍가게 사람들의 삶을 받드는 마음으로 좋은 문장을 담아냈다.

"긍께 여자도 강하믄 다 그러고 사는 거여. 남자지지 않애." (삼태상회)
"나한테 주어진 삶잉게 살아야 되고 어쩔 수 없고. 어디 가서 바꿀 수도 없고." (아곡상회)
"외상 못 받은 건 다 포기했어요. 마음 편안해요 포기해 부리니까." (현순상회)
"나는 죽으믄 도로 여자가 될란다. 알뜰살뜰 가정 한 번 꾸려보게" (운농수퍼)
"이런 가게에서 술 팔아 갖고 돈 번 거는 진짜 귀신도 맘대로 못 쓸 거예요." (죽마리구판장)


10년간 구멍가게를 순례한 박혜진은 다음에는 어떤 여정에 오를까? 그 길에서 박혜진이 만날 삶의 문장들은 어떤 것일까?

<못다한 이야기>

① 박혜진은 <구멍가게 이야기>를 펴내며 표지디자인에 대해 고민했던 과정을 들려주었다.

"표지그림은 나주 금성슈퍼를 모델로 했습니다. 사실 구멍가게를 소재로 한 책들이 대개 구멍가게 일러스트를 표지에 내세우는 식으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표지 시안을 받아보고 저는 조금 망설였어요. 일반적으로 구멍가게를 '추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상황에서 표지까지 비슷한 분위기와 이미지로 가면 그 전형성에 또다시 갇혀버리는 것 같았어요.

책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구멍가게를 테마로 한 유명작이 있어서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초고 이후에 작업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후일담을 들어보니 디자이너 분은 전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셨더라구요. 표지 시안으로 일러스트가 아닌 사진을 활용한 것도 있었는데, 주변의 반응을 참고해서 지금의 안으로 결정했습니다."

② 박혜진은 또 책을 엮는 과정의 협동작업에 대해 많은 경험을 했다며 저자의 인사말에는 구멍가게 어르신들에 대한 감사 인사만을 담았는데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출판사 '책과함께' 이정우 팀장님에게도 고맙다는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박혜진이 찾아다닌 전라남도 일대 구멍가게 지도 한 곳 한 곳을 찾아다녔다. ⓒ <책과함께> 제공




구멍가게 이야기 - 마트와 편의점에는 없는, 우리의 추억과 마을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곳

박혜진, 심우장 (지은이), 책과함께(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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