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6 11:36최종 업데이트 21.06.2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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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문벌귀족의 생활상을 그린 <아집도 대련 雅集圖 對聯)>의 일부. ⓒ 호암미술관 소장

 
고려사를 넘어 한국사를 뒤흔든 한판 승부가 있었다. 교과서에서 '이자겸의 난'으로 서술되는 인종과 이자겸의 대결이 그것이다. 고려 건국 208주년인 1126년에 벌어진 이 일은 민심을 동요케 하고 귀족사회를 혼란케 하며 서경 천도론(평양 천도론)을 유발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개경의 왕업은 이미 쇠했습니다"(승려 묘청)라는 목소리가 나오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 대결로 조성된 정치 환경은 9년 뒤 발생할 또 다른 메가톤급 대결의 원인이 됐다. 1135년에 벌어진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묘청의 난)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조가 심하게 요동치자, 묘청이 서경 천도론을 주장하며 역사무대에 등장했다가 김부식의 제동을 받고 사라졌던 것이다.


1929년에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 실린 논문에서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자주파 묘청이 사대파 김부식에게 패배한 이래로 한민족 지배층의 대륙적 기질이 감소된 것은 물론이고 사상과 문화도 한반도 중심주의로 퇴색해 20세기 초까지의 천년 동안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의 씨앗이 된 사건이 이자겸의 난이었으니, 이것의 역사적 의의가 얼마나 심대한지 느낄 수 있다.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의 씨앗

대결의 당사자인 인종과 이자겸은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사적으로는 사위와 장인이었다.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되기 전에도 이들은 남남이 아니었다. 그때는 외손자와 외할아버지였다. 인종의 어머니이자 예종의 부인인 순덕왕후 이씨가 이자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이들의 관계는, 인종이 예종에 이어 왕이 된 1122년을 계기로 뜻밖의 관계로 '둔갑'했다. 만 13세의 인종이 왕이 됐기 때문에 수렴청정(대리 통치) 해줄 태후가 있어야 했지만, 순덕왕후는 4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섭정을 해줄 태후가 없는 비상시국을 이용해 왕실 외척의 지위를 내세우며 정국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이자겸이다.

정권을 차지한 이자겸은 외손자와의 관계 재설정에 나섰다. 셋째와 넷째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인종을 사위로 만들었던 것이다. 인종의 이모였던 두 여성은 이로써 인종의 아내로 '둔갑'했다.

두 여성은 조카의 첩이 됐다. 후(后)가 아니라 비(妃)가 된 것이다. '비'가 됐다는 점을 근거로 일부 역사책들은 두 여성이 인종의 정실부인이었던 것처럼 서술하지만, 조선의 왕후가 왕비로도 불린 것과 달리 고려의 왕후는 왕비로는 불리지 않았다. 중국의 '비'가 후궁인 것처럼, 고려의 '비' 역시 후궁이었다.

경원 이씨(인주 이씨, 인천 이씨)인 이자겸의 가문은 남북국시대 말기와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초까지 득세했던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경주 이씨는 박혁거세와 함께 신라를 세운 가문인 반면, 경원 이씨는 허황옥과 김수로의 후손인 허기(許寄)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었다. 가야 시조 부부의 열두 아들 중에서 둘은 어머니 성을 따랐다. 그래서 허씨가 가야 왕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허기는 양귀비의 남편인 당나라 현종을 도운 일로 이씨 성을 하사받고 인천에 집단 주거지를 형성했다. 이 집안은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의 세 딸이 태조 왕건의 4대손이자 인종의 할아버지인 문종에게 시집가면서 유력 가문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할아버지 때부터 강력해진 가문의 힘을 배경으로 이자겸이 인종의 왕권을 억압하고 자기 딸들을 그 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임금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정권을 차지한 이자겸은 관료 그룹의 리더인 한안인(韓安仁)을 역모죄로 몰아 숙청하고 인종의 숙부인 왕보도 함께 엮어 유배를 보냈다. <고려사> 인종세가(인종 편)를 살펴보면, 이자겸의 권력이 공고해진 시점이 1123년 초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두 딸을 인종의 첩으로 만들고 외손자와의 결혼동맹을 성사시킨 이자겸은 군부 실력자인 척준경과 제휴 관계를 체결했다. 외척 지위를 바탕으로 관료 집단을 무력화시키고 군부를 끌어들였으니, 철통같은 권력을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

 
친위 쿠데타와 시해 계획

열세 살에 가업을 물려받은 인종은 '왕씨 고려'가 아닌 '이씨 고려'처럼 국가가 운영되는 상황을 묵과하지 않았다. 17세 때인 1126년, 그는 이자겸을 겨냥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기편 무장들을 규합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자겸의 역공으로 친위 쿠데타는 실패했고, 척준경의 방화로 궁궐이 불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코너로 내몰린 인종은 고려왕조의 간판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했던 그는 왕권을 넘긴다는 조서를 전달했다. 경원 이씨에게 왕권을 이양하면, 왕씨 나라가 망하고 이씨 나라가 설 수밖에 없었다. 건국 208년 만에 왕조의 간판이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면서도 다소 색다른 <고려사절요>의 인종 편에 따르면, 이자겸은 왕위 등극을 거부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씨 왕조인 당나라(618~907)의 건국을 합리화했던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신봉했다. 십(十)과 팔(八)과 자(子)가 성에 들어간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겸은 뜻을 접고 말았다. 육촌동생 이수(李壽)가 공식 석상에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며 호통을 쳐대는 바람에 중신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십팔자(十八子)가 위왕(爲王)을 포기하자, 이번에는 인종이 꿈틀댔다. 인종은 제2차 친위 쿠데타를 기획했다.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씨의 나라'가 언제 또다시 돌출할지 알 수 없었다. 17세의 군주는 그 위험성을 제거하고자 또 다른 거사에 착수했다.

제1차 때보다 인종은 더 신중했다. 이자겸과 군부의 연대를 차단하고자 척준경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군부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이자겸보다 위상이 낮은 척준경의 경쟁심을 자극해 두 사람의 동맹에 흠집을 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이자겸은 군주 시해 계획을 세웠다. 그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인종에게 독이 든 떡을 선물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로 인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인종의 첩이 된 그의 넷째 딸이 아버지와 남편의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이로 인해 이 대결은 이자겸이 예측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고려사> '폐비 이씨 열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독살 음모를 알게 된 넷째 딸은 인종에게 이 사실을 귀띔했다. 아버지가 아닌 남편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인종은 독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인종은 이자겸이 보내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다. 떡을 먹은 까마귀는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넷째 딸의 '배신', 아니 '선택'을 눈치 채지 못한 이자겸은 그 딸을 제2차 암살 작전에 이용하고자 했다. 넷째 딸에게 독 사발을 주면서 인종에게 먹일 것을 지시한 것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데릴사위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은 이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군주의 결혼에서는 데릴사위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 시집가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출가외인이란 표현이 적용될 수 있었다.

넷째 딸은 '출가외인'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와 가문의 이해관계를 무시한 그는 예전에는 조카였지만 지금은 남편이 된 인종을 선택했다. 약사발을 들고 인종에게 다가가던 그는 그 앞에서 일부러 넘어졌다. 넷째 딸이 복병이 되어 이자겸의 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암살 계획이 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병력을 동원해 궁궐로 달려갔다. 하지만, 또 다른 복병의 출현을 보게 된다. 척준경의 군대가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외손자 겸 사위를 억누르고 이씨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로써 17세의 인종은 왕씨 고려를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에 그는 이자겸과 함께한 죄를 물어 척준경까지 유배를 보냈다.

한편, 인종과 이자겸의 대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넷째 딸은 셋째 딸과 함께 폐위됐다. 국정의 잘잘못을 간쟁하는 간관(諫官)들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넷째 딸에 관한 기록이 '폐비 이씨 열전'이란 제목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은 폐비가 된 그를 박대하지 않았다. 인종의 두 아들인 의종과 명종도 그랬다. '폐비 이씨 열전'은 이렇게 전한다.
 
"자겸이 실패한 뒤에 간관들의 말에 따라 폐위시켰다. 왕은 사발을 엎은 공로를 생각해서 토지와 집과 노비를 하사하고 매우 각별하게 은혜를 베풀고 돌봐줬다. 의종·명종 두 임금 역시 삼가는 마음으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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