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16 19:07최종 업데이트 21.06.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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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생인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국민의힘 대표로 선출된 일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만 36세인 이준석 대표의 개인적 성공이 보수 정당의 집단적 세대교체와 전면 혁신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젊은 대표를 내세운 보수 정당은 한국 정치의 전망을 밝게 할 가능성이 있다.

보수 정당이 아닌 민주계 정당에서 발생한 일이기는 하지만, 1969년 신민당에서도 세대교체론 돌풍이 일었다. 김영삼이 일으키고 김대중·이철승의 호응으로 번져나간 40대 기수론이 그것이다.


1969년 당시 김영삼은 만 42세, 김대중은 45세, 이철승은 47세였다. 이들이 신민당의 깃발을 '가로채' '우리가 기수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누구보다 당혹했던 지도자가 있었다. 머지않아 신민당 대표위원이 될 유진산이 바로 그다.

부모뻘 정치인

40대 기수들이 볼 때 유진산은 부모뻘이나 삼촌뻘이었다. 그해에 64세였던 그는 1905년 생이었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해에 태어났으니, 40대 기수들의 눈에 그는 '옛날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40대 기수들은 일제강점기 세대이지만, 유진산은 조선시대(대한제국 시대) 사람이었다. 그런 유진산이 최일선에서 40대 기수론과 맞부딪혔다. 그는 이 현상의 주요 희생자였다.

40대 기수들은 '이제는 우리가 이끌어야 한다'며 서로 경쟁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구도의 경쟁자는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이다. 동시에 이 구도는 40대가 부모 세대에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부모 세대 정치인들도 이 라이벌 구도에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유진산은 부모 세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이 구도에 휘말려 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정치인 유진산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1964년 당시의 제1야당인 민정당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을 반대하다가 갑작스레 법안 통과를 묵인한 배경에 민정당 거물 유진산과 민주공화당(공화당)의 묵계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박 정권의 언론 장악 의도가 담긴 이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그해 8월 3일 정해영 의원은 의원총회 때 책상 위에 뛰어올라 "너 죽고 나 죽자"며 "네가 원흉이다"라고 유진산에게 고함쳤다. 유진산이 표결 직전에 "언론은 길을 들여야 해"라며 야당 의원들의 퇴장을 유도했다고 정해영은 증언했다.

그해 8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인 '사꾸라 잡아내라'처럼, 유진산은 이 사건으로 사쿠라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해 10월 8일 민정당 중앙위원회에서 유진산 제명이 의결된 것은 '사쿠라 잡아내라'는 당내 여론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는 66세 때인 1971년에도 사고를 쳤다. 박정희가 제5대·제6대에 이어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지 열흘 뒤인 1971년 5월 6일이었다. 그달 25일 총선에 출마할 후보들의 등록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 신민당 대표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마감 3분 전에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갑구를 포기하고 자신을 1번으로 적어 전국구(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을 제출했다. 이 일로 인해 신민당은 내분에 휩싸였고, 사흘 뒤 그는 대표위원 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것이 유명한 '진산 파동'이다.

사쿠라 논쟁과 진산 파동으로 악명을 쓴 그였지만 8·15 해방 전에는 상당히 인상적인 행적을 남겼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항일 벽보 사건으로 학교를 떠났고, 1926년 일본 유학을 떠난 뒤에는 와세다대학 독서회 사건으로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 뒤 국내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투옥됐다.

만 40세 때 해방을 맞이한 그는 우파 청년운동에서 두각을 보이다가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는 이 때문에 계엄군에 체포됐다. 휴전 1년 뒤 제3대 총선 때부터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그는 이때부터 제9대(1973년)까지 7연속 당선됐고, 이 과정에서 한국 야당의 지도자로 성장해 나갔다.

사쿠라 논쟁 2년 뒤인 1966년 7월 19일, 그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운영회의 부의장이 됐다. 제1야당의 2인자가 된 것이다. 그가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대표위원이 된 것은 1970년 1월 26일 임시전당대회 때였다. 그랬기 때문에 1969년 당시만 해도 유진산은 1인자 자리를 염두에 두고 활동하는 2인자였다.

그런 그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벌어진 일이 42세 김영삼의 느닷없는 대권 도전 선언이었다. 박정희를 위한 3선 개헌 국민투표가 통과된 1969년 10월 17일로부터 3주 뒤인 11월 8일의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김영삼이 당권보다 위인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나섰으니, 아직 당권도 획득하지 못한 유진산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쿠데타'로까지 불렸던 김영삼의 도전 선언은 그가 4선 의원에다 원내총무(원내대표)였기 때문에도 파괴력을 발휘했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더욱 더 큰 파괴력을 발휘했다. 박정희의 독주가 가속화되는 속에서 야당 지도부를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10일 자 <경향신문> '전환점에 선 체질 개혁 작업'은 "당 지도체제부터 구조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당론이 집약되고 있는 과정에서 김 총무의 이 같은 폭탄선언은 당 개혁의 진통을 더욱 중첩"시켰다고 분석했다.

40대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선언이 신선했던 데는 여야 지도부의 나이 차도 중요한 몫을 했다. 2019년 창원대 박사 학위 논문인 역사학자 이명인의 '박정희 시대 제일야당의 파벌 연구'는 만 나이가 아닌 한국 나이로 여야 지도부의 나이를 설명하면서 "박정희(1917년 생, 1969년 당시 53세)와 김종필(1926년 생, 1969년 당시 44세)은 젊은 리더십으로 공화당 정권을 이끌어가는 데 비해, 신민당은 당수 유진산(1905년 생, 당시 65세)을 비롯하여 정일형(1904년 생, 당시 66세), 조한백(1908년 생, 당시 62세) 등 줄줄이 노장파들"이었다고 말한다.

3선 개헌을 관철할 정도로 무법자처럼 막강해진 여당은 50대 1인자와 40대 2인자에 의해 움직이는 데 반해, 여당의 독주를 지켜보기만 하는 야당은 60대 지도부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요인 때문에 40대 김영삼의 대권 도전 선언이 대중의 마음에 낯설지 않게 안착된 측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여당이 무법자가 돼도 괜찮을 정도로 너무 강력해진 현실이 김영삼의 선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이런 현실이 조성된 데는 국제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반민족적인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입장에서는 일본의 지원을 얻고 한·미·일 삼각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됐다. 군부가 전면에 나섬에 따라 국가 공권력의 강도(强度)가 달라진 데다가 한·미·일 삼각체제로 박정희의 국제적 배경이 단단해졌기 때문에, 기존의 야당 시스템으로는 박 정권에 대항하기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의 대권 도전 선언과 40대 기수론 제창이 공감을 얻은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어처구니없는 대응
 

25일 회담을 가진 김대중씨와 유진산씨. 1972.8.25 ⓒ 연합뉴스


그 같은 시세를 등에 업은 김영삼의 '쿠데타'에 유진산은 당황했다. 그가 당황했다는 점은 김대중과 이철승의 가세로 40대 기수론이 위력을 더해가자 그가 비합리적으로 반응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후배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상황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처럼, 그는 김영삼 발 변화 앞에서 가외(可畏)의 정서에 매몰되어 차분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보여주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유진산이 자신도 대권후보가 될 자격과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국민과 당원을 상대로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40대 기수들과 경쟁하는 편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만 치중하는 측면이 있었다. 40대들과 경쟁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한다는 외형을 만드는 데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

김영삼 '쿠데타' 2개월 뒤인 1970년 1월 26일 임시전당대회에서 대표위원이 된 그는 위 논문에 정리된 바와 같이 '나는 40대들과 경쟁할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세대교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40대 기수들을 "구상유취(口尙乳臭)의 정치적 미성년자들"로 폄하했다. 40이 넘은 사람들한테 젖비린내가 난다고 깎아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줘야 했지만, 그는 경쟁한다는 인상도 주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는 40대와의 경쟁이 시작됐는데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싸늘해지자, 그는 이런 행동을 보였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의 이야기다.
 
자신이 출마할 기회가 점점 멀어지자 유 총재는 다시 세 명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는 지명권을 달라고 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나흘 앞둔 9월 25일에 나와 이철승, 김영삼씨를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이 같이 제안했다.
 
40대 기수들과의 경쟁을 피하고 그들 중 하나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왕적 총재의 권위를 갖고 40대 기수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다. 민주주의 정당에 맞지 않은 꿈을 꿨던 것이다.
 
그때 당내는 크게 김영삼씨가 포함된 진산계가 주류였고, 나와 정일형·이재형계는 비주류였다. 유 총재는 같은 야당이지만 나와는 계보가 다를 뿐 아니라 걸어온 길과 정치노선이 달랐다. 유 총재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김영삼·이철승씨는 유 총재의 지명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유 총재가 나를 지명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민주주의와 당원의 총의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40대의 기세를 당할 수 없게 된 유진산은 같은 계파인 김영삼을 지원하고 싶어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전날인 1970년 9월 28일에는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면 거부에 더해 이철승의 이탈로 김영삼이 아닌 김대중이 선출되는, 그의 입장에서 최악인 상황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산은 조직력과 자금력에서는 40대 기수들을 앞질렀기 때문에 그 일이 있은 뒤에도 1974년까지 당권을 지켰다. 그 뒤에도 그는 진산 파동이라는 과오를 또 한번 저지른다. 그러다가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중인 1974년 4월 28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진산은 40대 돌풍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포용하지도 못했고 경쟁하지도 못했다. 항일투쟁과 반(反)이승만 투쟁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그는 언론 파동과 진산 파동이라는 흠집과 더불어 40대 기수론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또 하나의 흠집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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