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12 11:58최종 업데이트 21.06.1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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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검사 받을 때는 불법체류자여도 괜찮아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를 하지 않으니까 마음 놓고 검사 받으세요."

김하나 순경은 요즘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오늘도 발안만세시장과 화성 인근 여러 공장을 돌며 한국말로 세 번, 네팔어로 일곱 번을 설명했다. 그가 일하는 화성서부경찰서 관내에는 외국인 노동자들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다.


김 순경의 모국 네팔 출신 노동자도 3000명에 가깝다. 그런데 문제는 불법체류자였다. 이들은 신원이 밝혀져 쫒겨날까 봐 코로나 검사를 기피하고 있다. 그래서 김 순경은 외사계 동료들과 함께 "코로나 검사시, 불법체류자에 대한 통보의무 면제제도가 생겼다"고 홍보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업소를 찾아다니며 "손님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것은 물론 소독제도 갖춰놔야 한다"라고 하나하나 알려줬다. 한국말로 된 방역수칙을 이해 못하는 업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외사계 직원들이 다른 업무를 하면서 수백 개가 넘는 업소를 모두 찾아다녔으니 힘든 노릇이었다. 

네팔 출신 한국 경찰, 김하나
 

김하나 순경과 경찰서 앞 카페에서 화성서부경찰서 앞에서 얘기를 나눴다. ⓒ 민병래

 
네팔 이름으로는 라이 삼자나(Rai Samjhana)인 김 순경이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10년. 노총각이면서 히말라야를 좋아하는 남편을 카투만두에서 만났다. 당시 김 순경은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튜리뷰 대학(Tribhuwan Univercity) 1학년생, 남편과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두세 차례 깊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김 순경의 아빠가 카타르에 노동자로 나갈 때처럼 칸첸중가에 절을 드리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처음 정착한 곳은 여수, 김 순경은 경찰을 꿈꾼 적이 있지만 네팔에서는 키가 150cm 이상 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포기했었다. 그랬던 자신이 한국 경찰서 외사계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오전 외근 후 김 순경은 오후 늦게 경찰서로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외사계 사무실은 옅은 햇빛 사이로 타닥타닥 자판 소리만 일렁인다. 이때가 외근을 마치고 들어와 보고서를 쓰는 시간이다. 김 순경도 '코로나 검사'에 관해 홍보한 일과 여러 첩보 등을 적어나갔다.

바깥 일보다 문서 꾸미는 게 쉬울 것 같으나 김 순경에겐 반대다. 한글을 배운 지 10년이지만, 아직 서투르고 어렵다. 남편과 결혼하기로 마음 먹고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탔다. 7시간 걸려 다다른 인천공항을 하늘에서 바라보니 우주선 기지 같았다.

내려보니 청사 바닥은 매끈거려 미끄러질 것 같고, 무빙워크를 타니 신기하게도 저절로 걷게 되었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는데 이도 잠시 겨우 두어 달 한국어 공부 시늉을 한지라 입국심사대에서 그만 얼어붙었다. 질문을 못 알아들으니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김 순경은 남편의 권고로 2011년 전남대 여수캠퍼스 한국어학당에 들어갔다. 2015년에는 조선대 경찰행정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읽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글쓰기는 골칫거리다.

특히 경찰서에서 쓰는 '계도기간', '불심검문', '통보의무면제' 같은 한자어들이 어려웠다. 보고서는 이런 용어를 쓸 수밖에 없으니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게다가 파워포인트 작업까지 해야 하고 계장님은 "김 순경, 문제의식과 대안이 담겨있어야 해요"라고 강조하니 이래저래 머리를 싸맨다.

지칠 때마다 힘이 된 네팔의 산, 칸첸중가
 

김하나 순경이 첫 번째로 발령받은 남양파출소. 김하나 순경은 현재 화성서부경찰서 외사계에 근무하고 있다. ⓒ 김하나제공

 
김 순경이 화성서부경찰서 외사계(외국인 관련 모든 범죄에 대해 수사 및 단속하는 부서)에서 일한 지는 6개월 남짓, 그래도 중앙경찰학교에서 8개월 연수를 마치고 2019년 처음 배치되었던 남양파출소에 비하면 한결 낫다. 그곳은 주야 12시간 교대 근무였다. 낮밤이 바뀌는 것도 힘들지만 야간 근무 때는 오후 4시 반경 출근해서 다음 날 오전 6시경 퇴근했다. 남편도 일을 다니니 아이는 늘 시어머니 몫이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파출소 관할구역에는 술집들이 적지 않아 싸움이 벌어졌다는 신고가 끊이지 않았다. 함께 출동하는 동료가 있지만 남자들의 체격이 크니 자그마한 김 순경이 상황에 대처하긴 쉽지 않았다. 경찰학교에서 합기도를 배웠지만 동작 몇 가지만 익혔을 뿐이다.

그래도 근무하면서 요령도 생겼다. 김 순경은 현장에 가면 몸싸움을 하는 가운데로 파고 든다. 그가 "이제 그만하세요. 신고 접수되었습니다"고 외치면 순간 조용해진다. 키 작은 여자 경찰이 야무지게 말하니 몸싸움을 벌이던 무리들이 순간 멈칫하는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김 순경은 무슨 사연인지 말로 하라고 설득한다. 그의 콧등에서는 땀방울이 떨어진다.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권총과 수갑을 매만지며 "실수하지 말자"라는 다짐을 굳게 하다보니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간 탓이다.

남양파출소에서 새벽을 맞을 때면 거리를 밝히던 네온사인도 점점이 꺼지고 시끄럽던 민원전화도 제풀에 지친다. 파출소 문을 걷어차는 행인도 잠자리를 찾아간 오전 4시부터 6시까지 파출소는 고요함에 젖어든다.

창문 밖으로 희붐하게 다가오는 새벽을 보면, 카투만두에서도 버스로 12시간을 가야 하는 고향 보즈푸르에서 매일 바라보던 칸첸중가가 떠올랐다. 눈보라와 구름을 뚫고 새벽 햇살을 껴안으며 일어서는 봉우리는 신비로웠다. 그 시절 아빠는 "히말라야의 기운과 바람이 우리를 지켜준다"라며 함께 절을 올리자고 했다. 그 기운덕분인지 신입경찰로서 파출소 근무를 잘 견뎌냈다.

경찰 되기까지 뒷바라지 해 준 남편과 시어머니  

김 순경은 외근 업무에 대한 PPT 작업까지 마무리하고 오후 6시가 넘어 사무실을 나섰다. 남편이 마련해준 경차 스파크에 시동을 걸었다. 카투만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의 깊은 눈매가 좋았다. 자기의 미래를 그 안에 담아줄 것 같았다. 남편의 얼굴 뒤로 보이는 히말라야 봉우리들이 그의 너른 어깨와 잘 어울렸다.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어학당 1년을 다니게 하고 우리나라는 키 제한이 없으니 경찰이 돼보라고 조선대 경찰행정학과 입학을 권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의 네팔어 담당 특별채용공고도 먼저 찾아냈다.

김 순경이 화성서부경찰서로 발령을 받았을 때 남편은 광주에 있는 그의 거래처들을 정리하고 경기도에서 새로 일을 시작했다. 한국 국적을 얻고도 김 순경은 계속 라이 삼자나(Rai Samjhana)라는 이름을 썼다. 남편은 'Samjhana'에서 'hana'를 따고 자기 성 '김'을 붙여 "김하나가 어떻냐"라고 했다. 덕분에 2018년부터 김 순경은 '김하나'가 되었다. 고마운 남편이다.

남편만이 아니라 시어머니 사랑 또한 컸다. 한국에 온 날, 인천공항에서 여수까지 대여섯 시간을 더 온 터라 김 순경은 녹초가 되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한낮이었다. 시어머니가 푸짐한 밥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젓가락질, 반찬은 삐져나갔다. 시어머니는 숟가락에 찬을 올려줬다. 아마 갈치속젓이었던 것 같다. 너무 짜서 머리가 찌르르 했다. 서둘러 물을 마셨건만 옅은 화약내에 이마저도 뱉어낼 뻔했다. 시어머니는 웃으며 "괜찮다. 천천히 먹어라"고 하셨다.

시어머니는 김 순경이 2015년부터 조선대 경찰행정학과를 다니는 내내 뒷바라지를 했다. 그때는 담양에 살 때라 광주의 조선대까지 거리는 45km지만 버스로 다녀야 해서 어려웠다. 차는 60분에서 90분마다 한 대씩 오고 우치공원에서 한번을 갈아타야 했다. 필수과목 수업은 오전 8시부터여서 6시에 집을 나서면 "애 걱정은 말고 차 조심해라" 하며 어머니는 배웅을 해주셨다.

2018년 김 순경이 경기남부경찰청 외사계 네팔어 담당으로 특별채용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담양 읍내를 휘저으며 "우리 며느리 경찰됐소"를 외치고 다녔다. 그런데 남양파출소에 배치되고 주야 교대근무를 하게 되니 손주를 봐주기 위해 정든 이웃들과 아쉬운 작별도 했다.

담양에서 만난 동남아 새댁들은 "시어머니가 밉다"고들 얘기했는데 김 순경은 시어머니에게서 친정엄마의 품을 느꼈다. 칸첸중가에 드린 기도 덕도 있지만 시어머니의 사랑 덕에 파출소 주야근무를 견뎌냈지 싶다.

'살아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느끼는 순간들
 

시어머니와 남편의 사랑 덕에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김하나 순경. ⓒ 민병래

 
김 순경은 경찰서 정문을 빠져 나와 오전에 들렀던 발안만세시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민물매운탕거리를 살 작정이다. 쑥갓과 미나리 듬뿍 넣고 무도 큼지막이 썰어 얼큰하게 끓일 생각이다. 열 살 아들은 카레를 넣은 네팔음식 달바뜨를 좋아하니 돈가스 한 덩이만 곁들여주면 되리라. 녀석은 요즘 친구들한테 "우리 엄마 경찰이다, 나는 네팔어도 배운다"라고 하도 자랑을 해서 탈이다.

시장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다. 가재 사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서니 멀리 아산만으로 까치놀이 빛난다. 한국에 와서 경찰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돌아보면 보람찬 시간이었다. 생명을 구한 적도 있다. 순경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남자가 "아내가 전화를 안 받는데 불안하다. 아내가 우울증이 있다. 나는 직장 일로 멀리 있는데 집에 한 번 가봐 줄 수 있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거실은 평온했다. 안방을 확인하려고 보니 안에서 문이 잠겨 있었다. 억지로 따고 들어갔을 때 한 여자가 방문과 창문에 테이프를 발라놓고 번개탄을 피운 상태였다. 119를 불러 응급실로 보내고 민원인에게 알렸다. 그날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외사계에 와서 동포들에게 힘이 되는 것 또한 기뻤다. 어떻게 알았는지 화성서부경찰서 바깥에서도 동포들이 자주 연락한다. "외국인 등록증을 잃어버렸어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와 줄 수 있나요?", "월급을 못 받았는데 경찰서로 가야 하나요, 노동부로 가야하나요?" 간절한 목소리들이 수화기 너머에서 건너왔다. 다 쫒아갈 순 없지만 김 순경은 마음을 다해 도왔다.

고향 네팔에서는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축복이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신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사말도 나마스테, "당신 안에 깃든 신에게 절을 드립니다"라고 한다. 경찰이 되어 죽음 앞까지 이른 사람을 구하고 고향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정말 "살아있는 순간이 축복"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다만 남편과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만 빛나는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 또한 컸다.

김 순경은 까치놀을 보면서 차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꾸물거리면 신선한 매운탕거리가 다 팔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어서.
 

외사계에 와서 동포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 기뻤다는 김하나 순경. ⓒ 민병래

 
<못다한 이야기>

① 칸첸중가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 위치한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다섯 개 빙하의 보고'라는 뜻을 갖고 있다. 김하나는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매일 칸첸중가를 보고 다녔다고 말한다.

② 코로나로 대면 활동의 어려움이 있어 화성서부경찰서 외사계에서는 온라인 계몽활동을 함께 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화성서부경찰서와 함께 하는 외국인 치안소식방'이라는 페이스북페이지가 바로 그것. 김 순경은 여기에도 코로나 검사시 불법체류자에 대한 '통보의무면제제도'를 설명하고 '퀵보드를 탈 때 헬멧을 꼭 써야 하는 규정' 등 새로운 제도에 대해서 네팔어로 번역해 글을 올리고 있다.

③ 김 순경이 다니던 대학의 정식 명칭은 튜리뷰대학 파슈푸티캠퍼스(Tribhuwan Univercity Pashuputi Multiple Campus)다.

④ 김 순경이 남양파출소에 근무하면서 접한 자살신고 전화는 많았다. 자살을 막아서 뿌듯할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찰이 '한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에까지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의문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⑤ 'Dall bhat'(달바뜨)는 네팔의 전통 가정식 백반이다. 쌀밥, 콩으로 만든 국, 각종 야채, 고기 반찬을 곁들여 카레를 버무려 만든다. 김 순경의 아이는 이 음식을 특히 좋아하고 네팔 식당에 가서도 종종 외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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