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4 14:58최종 업데이트 21.05.1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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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가자지구 경계에서 12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 야포가 포탄을 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무장 정파 하마스와 사흘째 화력전을 벌이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 2021.5.12 ⓒ 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주력하고자 중동 문제의 불안정 요인을 해소하는 접근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북핵 문제보다 이란 핵문제 해결에 우선 착수했다. 현지 시각으로 4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2015년 이란 핵 합의 당사국들의 회담이 열렸다.

바이든 행정부는 서유럽 동맹국들의 의사를 일정 정도 무시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개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현지 시각으로 2월 15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이 '적절한 시기까지는 아프간에서 나토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서유럽의 의지를 전달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리전으로도 불리는 예맨 내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맨 후티 반군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예맨 정부군의 대립을 완화하고자 사우디에 대한 군사적 협력을 거둬들이고 있다. 중국 및 러시아 견제에 중점을 두고자 전 세계 미군을 재배치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예맨 내전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도 함께 담긴 조치다.

그렇지만 중동의 평화는 멀기만 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막는 데는 더더욱 역부족이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10일 이스라엘 정부군이 팔레스타인 서남부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일으킨 무력충돌이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로켓포가 올라가는 대규모 격전 양상이 사태를 악화하고 있다. 

13일 새벽 2시까지 국내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번 충돌로 인한 희생자는 최소 62명이다. 이스라엘군이 상대편 지도부를 공격한다는 명분하에 주거용 13층 건물까지 공습해 사망자가 대거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바셈 이사 하마스 사령관도 목숨을 잃었다. 하마스는 "바셈 이사 사령관이 순교했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중동 문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중동에서 날아오는 이런 뉴스들을 보며 드는 생각 중 하나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나 유럽에 관한 뉴스는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반면 중동에 관한 뉴스는 맥락을 잡기 힘든 경우가 많다.

1980년대 후반까지의 미·소 냉전 시대에도 이 지역 상황은 냉전보다는 열전에 가까웠다. 냉전 이념인 트루먼 독트린(공산주의 확대 저지를 위해 반공 정부에 군사적·경제적 원조 제공)이 발표된 이듬해인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는 열전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대 세계질서에서 비껴간 듯한 양상이 이곳에서 전개돼 왔던 것이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아랍민족주의의 분출이었다. 공산주의냐 반공이냐의 이념 대결이 강조되던 냉전 시절에도 이곳에서는 아랍민족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세계질서에 영향을 끼친 1970년대의 오일쇼크(석유파동)도 아랍민족주의와 관련이 깊다.  

이곳이 복잡한 지역이라는 점은 외견상 이해하기 힘든 정세가 펼쳐진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2011년 재스민 혁명(아랍의 봄)으로 촉발돼 지금까지 계속 중인 시리아 내전이 그런 사례다. 처음에는 '정부군 대 반군의 대결'이었던 이 내전은 나중에는 '정부군·러시아·이란(A) 대 반군·미국·터키·이스라엘·사우디·쿠르드족(B)의 대결'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이슬람국가(IS)가 가세하면서부터 'A 대 B'의 기존 구도는 물론이고 'A 대 IS', 'B 대 IS', 'A+B 대 IS'의 구도들도 함께 나타났다. 

1948년 5월 14일 일어난 사건

중동 문제는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지역 패권이 해체되고 영국·프랑스 제국주의가 이곳을 지배한 후에도 복잡했지만, 지금처럼 뒤엉켜진 기원은 미국 시각으로 1948년 5월 14일 저녁에 벌어진 사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당시 미국과 국제연합이 고심한 사안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문제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유대인 난민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인구의 비중이 급증한 데다가,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미국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이 막강해져 이들의 고토 회복 요구를 외면하기 힘들던 때였다. 그래서 이 문제의 국제적 중요성이 한층 부각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제시됐다. 팔레스타인인(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따로 세우고 예루살렘은 유엔이 관리하는 방안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 방안을 거부했다. 국무부가 내세운 것은 '유엔에 의한 당분간의 신탁통치안'이었다. 해결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는 유엔에 떠넘기자는 정서가 이런 주장을 낳은 측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신탁통치안을 반대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1948년 3월 25일 공식 발표를 통해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랬던 트루먼이 5월 14일 저녁에 팔레스타인 분할안도 무시하고 신탁통치안도 무시한 채 뜻밖의 행동을 했다. 이스라엘을 승인해버린 것이다. 국제적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도중에 아랍인들의 반대 의견을 무시한 채 유대인들의 요구에 떠밀려 자신의 공식 언명을 뒤집었다.

트루먼은 이스라엘 수립이 선포되자마자 곧바로 국가 승인을 단행했다. 그해 5월 16일 자 <동아일보> 기사 '미(美) 유태국 승인'은 "트루만 대통령은 돌연 미국의 '신생 팔레스타인 유태 승인'을 발표하였다"며 "14일 오후 6시 1분에 팔레스타인 유태국가 수립이 선언된 지 수분 후"였다고 보도했다.

위 기사에서는 '수분 후'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11분 후였다. 논란이 많은 지역에서 신(新) 정부나 신 국가가 수립되면 정부 승인이나 국가 승인을 미루기 마련인데도, 11분 만에 신속히 처결했던 것이다. 유대계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경쟁국 소련이 먼저 승인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한 이런 조치를 통해 트루먼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속히 봉합해버리려 했다.

트루먼의 조치는 미국 정부 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국무부의 의견을 무시한 채 트루먼 주변의 몇몇이 성급한 국가 승인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냉전의 이념적 기초인 트루먼 독트린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소련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자 그렇게 했다손 치더라도, 그런 승인을 해주는 순간에 아랍 진영과 척을 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중동에서 전개될 소련과의 대결 구도에서 자연스레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냉전 구도의 정착 역시 덩달아 요원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트루먼은 그런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랍 진영의 분노를 자초하면서 이스라엘 한 나라만을 위한 조치를 선택했다. 아시아와 유럽에 적용되던 냉전정책을 중동에는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2012년에 <서양사론> 제113호에 실린 김봉중 전남대 교수의 논문 '탈식민주의 프리즘과 반공주의 렌즈'는 "냉전적 합의는 트루먼의 외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임에는 틀림없지만"이라면서 "그것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11분 만의 승인'은 미국 외교정책의 모순을 반영하는 예외적 사건이었다.

트루먼의 조치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모순에 빠트렸을 뿐 아니라 중동에서 고조되는 아랍 민족주의도 적으로 돌렸다. 투르크족(돌궐족)인 오스만제국의 말기 때부터 싹터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와의 갈등 속에서 성장한 아랍민족주의의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아랍인들은 미국에 호감을 가졌다. 미국이 영국·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미국이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아랍인들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동아시아나 유럽과 달리 중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전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민족주의운동이 고조됐기에 아랍민족주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45년에 이라크·레바논·사우디·시리이·트란스요르단(요르단왕국의 옛 이름)·예맨 등으로 구성된 아랍연맹이 결성된 것은 그 같은 아랍민족주의의 역량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아랍민족주의의 역량은 4년 뒤인 1952년에 이집트 청년장교 나세르가 이집트 혁명을 일으킨 데 이어 영국·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지배권을 몰락시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여세를 몰아 나세르는 시리아까지 끌어들여 아랍연합공화국을 창설했다. 이 같은 아랍인들의 역량을 감안하지 않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성급하고도 일방적으로 편들었던 것이다. 

11분 만의 승인이 너무 성급했다는 점이 입증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신속히 승인하자, 아랍국가들도 신속히 저항 의지를 선언했다. 이집트·이라크·트란스요르단·시리아·레바논·사우디·예맨 등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다음 해까지 계속된 이 중동전쟁은 현대 세계사의 주요 사건인 중동분쟁의 예고판이 됐다. 11분 만의 승인이 20세기 후반은 물론이고 21세기 초반까지 이어질 오랜 분쟁의 신호탄이 됐던 것이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스라엘 건국 선언 후 불과 11분 만에 트루먼이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 건립 과정을 둘러싼 복잡한 갈등과 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1분이라는 마법의 숫자로 압축되어 버렸다.

미국이 중동 정세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11분이라는 마법의 숫자'로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은 유대계 미국인들에게 휘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동에 대한 영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 이어 중동을 지배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미국의 입김이 강해진 것은 그 뒤였다.

이는 1948년 당시에는 미국이 중동 문제의 결정권을 확실히 갖고 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급하게 중동 문제에 개입해 이스라엘 건국에 힘을 실어준 것이 중동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아랍인들의 희망이나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1948년의 조치는 중동이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화약고로 남아 있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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