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5 19:52최종 업데이트 21.05.1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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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갈등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없다. 시아버지는 한자로 구(舅)다. 여기에는 장인이란 뜻도 있다. 만약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이 흔했다면 구부갈등이란 표현도 많이 쓰였을 것이다.

고부갈등보다는 적지만 구부갈등 역시 아주 없지는 않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싸우다가 집안은 물론이고 나라까지 휘청거리게 만든 사례가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 민씨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1866년에 대원군이 만 15세 된 민씨를 며느리로 맞이한 것은 그를 가벼이 본 측면이 있다. 사돈집이 막강해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 대원군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명문가의 일원이되 힘이 없는 집안을 사돈으로 선택했다.

고종보다 1년 빠른 1851년에 출생한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 즉 여주 민씨였다. 당시까지 이 가문은 왕비 두 명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와 숙종의 부인인 인현왕후가 이 가문에서 나왔다.

하지만 고종이 왕이 됐을 당시에는 이 가문이 막강하지 않았다. 명성황후 가정도 그랬다. 아버지 민치록은 군수급을 지내다가 은퇴했고, 명성황후가 만 7세 때 세상을 떠났다. 명문가이지만 최고 권력층은 아니었으므로 대원군이 사돈을 맺기가 편했다.

사람 잘못 봤다

명성황후가 결혼 뒤에 남편을 허수아비처럼 조종했다는 증거는 없다. 본인이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제3자를 앞세우는 고종의 스타일이 그런 오해를 낳았을 뿐이다.

고종은 부인과 처가를 앞세워 아버지를 압박하고 권력을 환수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명성황후와 민씨 가문이 정국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고종의 왕권 강화였으므로, 고종이 처가를 이용한 것인지 처가가 고종을 이용한 것인지 음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는 대원군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시민군을 피해 충주로 도주한 상태에서, 대원군은 며느리의 귀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중전의 국상을 선포했다. 그랬는데도 명성황후는 고종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상황 반전을 도모하고는 결국 귀환에 성공했다. 이런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인의 사진첩에 등장하는 4장의 사진.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1.고종과 순종 2.명성황후 추정 사진 3.대원군 4.대원군. 명성황후 추정 사진의 설명에는 `Die Ermodete Ko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시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 연합뉴스

 
또 지적인 면에서도 남달랐다. 이 점은 동아시아인들의 지적 능력을 낮게 평가했던 당시의 서양인들이 명성황후를 평가한 글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의 칼럼니스트이자 제임스 헨리 로렌스 상원의원의 부인인 메리 비올라 팅글리 로렌스(Mary Viola Tingley Lawrence, 1839~1931)가 초대 주한미국공사의 부인이자 자기 친구인 로즈 푸트(Rose Foote)의 한양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어느 외교관의 아내>(A Diplomat's Helpmate)에서도 그런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미 외교인 부인이 만난 명성황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왕후마마는 강하고 의지가 굳은 성격에다 똑똑하고 위엄 있고 동양 전체를 통틀어 가장 머리가 좋은 여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아시아인들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던 미국인의 글에서 이처럼 높은 평가가 나왔다. 의례적이고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인물을 대원군이 쉽게 생각하고 며느리로 들였다.

대원군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점은, 며느리가 생각 이상의 능력자로 밝혀진 것과 더불어 대원군이 며느리와 정치적 대결을 펼치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원군은 생각지도 못한 대결을 며느리와 벌이게 됐을 뿐 아니라 그 대결을 무려 4차례나 치렀다. 웬만한 시아버지들은 생각도 하지 못할 구부갈등을 직접 여러 차례 겪은 것이다.

1R

제1라운드는 며느리를 들인 지 7년 뒤인 1873년에 있었다. 이 대결에서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그 집안의 합세로 인해 아들 고종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9년간 조선을 이끌었다. 프랑스·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병인양요·신미양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동안에 아들 고종은 허수아비였다. 아버지 덕분에 얼떨결에 왕이 된 고종은 아버지가 자기를 대신해 나라를 이끄는 것을 내내 지켜봤다.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속에서 불만이 자라났다. 아버지가 권력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임금을 대신하는 왕실 어른은 임금이 18세 정도가 되면 수렴청정이나 섭정을 끝내야 했다.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것을 친정(親政)이라 했다. 보통은 18세 정도에 친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대원군은 고종이 나이를 먹어도 권력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고종은 아버지를 상대로 정치 공세를 벌였고, 부인과 민씨 집안을 앞세워 아버지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고종이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대든 것은 아니다. 임금이 아버지와 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효하는 임금은 통치자의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싸울 수 없었기에 부인과 처가를 내세웠다. 이 대결에서 고종이 실질적 승리를 거뒀지만, 명성황후 역시 적지 않은 승리를 거뒀다. 1873년인 이때 시아버지는 53세, 며느리는 22세, 아들은 21세였다.

2R

9년 뒤인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의 시장개방에 대한 불만과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이 겹쳐져 생긴 일이다. 군란의 주역들은 운현궁에 있는 대원군을 찾아갔다. 그와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대원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민군과 함께 궁을 점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했고 고종은 식물 임금이 됐다. 이 기회를 빌려 대원군은 며느리에 대한 보복전에 들어갔다. 구부갈등 제2라운드로 돌입한 것이다.

대원군은 며느리의 국상을 선포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7월 24일(음력 6월 10일)에는 "중궁전이 오늘 오시(11~13시)에 승하했다"는 왕명이 나오고, 다음날 오후에는 대행왕비(죽은 왕비)의 시신을 목욕하는 의식까지 치러졌다.

죽지도 않은 며느리를 죽었다고 선포하고 시신 목욕 의식까지 치렀으니, 대원군이 며느리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명성황후는 죽은 사람이 되고, 구부 갈등은 1승 1패가 됐다. 이때 대원군은 62세, 명성황후는 31세, 고종은 30세였다.

3R

하지만 제2라운드 결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한 달 뒤 새로운 라운드가 벌어졌다.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상황이 뒤집어지게 됐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은밀히 불러들인 이 군대가 구부갈등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갔다.

청나라 군대는 한양에 진입해 고종 임금과의 교감 하에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다(양력 8월 26일). 그런 뒤 왕십리로 몰려갔다. 그곳에 임오군란을 일으킨 시민군 주역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9월 12일(음력 8월 1일), 중전 민씨가 궁으로 귀환했다.

중전 민씨가 제2라운드의 결과로 '저세상'으로 쫓겨났다면, 대원군은 제3라운드의 결과로 청나라로 쫓겨났다. 구부갈등이 죽기 살기식으로 격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정권을 뺏고 뺏기는 차원을 넘어 패자를 어디론가 멀리 보내버리는 양상이 제2라운드 때부터 나타났던 것이다.

제3라운드 승자는 명성황후였지만, 실질적 승자는 청나라였다. 임오군란 이전까지 조선과 청나라의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상하관계에 불과했다. 일례로 1866년에 청나라 정부가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조선은 속국이기는 하지만, 내치·외교는 자주"라고 천명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청나라가 사대관계를 빌미로 내정간섭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던 것이 임오군란 진압을 위한 파병의 결과로 청나라가 내정간섭을 하는 관계로 변질됐다. 이 내정간섭을 현장에서 지휘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은 인물이 바로 원세개(위안스카이)다. 제3라운드가 명성황후보다 청나라에 훨씬 더 큰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만약 청나라가 대원군을 계속 붙잡아두고 있었다면 구부갈등은 그렇게 종결됐을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로서는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게 유리했다. 고종을 자기 편으로 묶어두려면 고종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게 유리했다. 이런 의도에 따라 대원군이 3년 뒤 귀국하고 그와 명성황후의 재대결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4R

제4라운드는 1895년에 벌어졌다. 1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전쟁)이 그 씨앗이 됐다. 이때도 정부군은 민중의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고종은 이번에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이것은 불청객도 함께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국민 보호 등을 명목으로 일본군도 덩달아 출동한 것이다.

일본군의 참전은 조선군과 청나라군 양쪽을 당황하게 했고, 일본군은 이 틈을 타서 조선 정부를 장악한 뒤 청일전쟁까지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그런 뒤 동학군마저 진압함으로써 조선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조선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자, 고종은 명성황후와 함께 상황 반전을 도모했다.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일본이 대원군을 끌어들여 자행한 끔찍한 사건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이 참극은 대원군과 민씨의 최종 대결이 됐다. 대원군 75세, 명성황후 44세, 고종 43세 때의 일이다.
 

건청궁 내부 명성황후 침전인 곤녕합. 오른쪽 끝을 따로 옥호루라 부른다. 일제는 곤녕합에서 잠자던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 윤종훈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를 단독으로 벌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원군과 조선군을 끌어들였다. 한편에는 대원군과 조선군을 세우고, 한편에는 일본군과 낭인(실직자 무사)들을 세운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경복궁에서 참혹한 만행을 자행했다. 위 날짜 <고종실록>은 을미사변을 이렇게 서술한다.
 
이날 날이 샐 무렵에 전(前) 협판 이주회가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함께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을 호위해 대궐로 들어왔다.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들도 따라 들어가 갑자기 변이 발생했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대신 이경직은 전각 뜰에서 해를 입었다. 난동이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더니, 결국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됐다.
 
이 시기의 대원군은 권력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계획에 넘어갔다. 그는 자기가 권력을 되찾게 되는 줄 알고 일본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은 채 경복궁에 들어갔다. 이참에 며느리의 기를 꺾어놓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일어난 일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나라와 왕실의 멸망 재촉

제4라운드는 대원군의 승리가 됐지만, 그가 거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일본에 돌아갔다. 이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한층 견고히 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원군의 승리는 이때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부끄러운 승리를 거두며 구부갈등을 종결시킨 지 1년 뒤, 아들 고종은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에 숨었다(아관파천). 고종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권력은 고종에게 넘어갔고 대원군의 위상은 다시 추락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싸우는 과정에서 조선은 더 약해지고 외세의 간섭은 더 심해졌다. 이 대결은 집안 내부의 싸움으로 그치지 않고 나라의 운명을 건 싸움으로 확대됐다. 이 틈을 타서 외세가 조선을 더 많이 장악했고 조선의 멸망은 가속화됐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구부갈등을 수십 년간 방치한 것이 나라와 왕실의 멸망을 재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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