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8 20:13최종 업데이트 21.05.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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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18일 인천항 8부두에 입항한 프랑스 함선 잔 다르크 호. 이 배에는 프랑스 해군사관생도 1백36명과 3백29명의 장교·사병이 탔다. ⓒ 연합뉴스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가 동아시아에 온다. 11일부터 7일간 일본에서 전개되는 미국·일본·프랑스 연합군사훈련에 프랑스군의 잔 다르크 호가 참여한다. 대(對)중국 압박을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프랑스도 군사적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 전략에 가세한다. 5월부터 반년 동안 40여 국가를 순방하는 퀸엘리자베스 항공모함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할 뿐 아니라 미·일과의 연합훈련도 하게 된다.


현지 시각으로 4월 26일 자 영국 <인디펜던트>는 '퀸엘리자베스호, 중국과 긴장 관계인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항모전단을 이끌다(HMS Queen Elizabeth to lead carrier fleet to Indo-Pacific region over tensions with China)'에서 "이 항모전단은 광물이 풍부한 수역의 소유권을 놓고 중국이 이웃 나라 및 서방 국가들과 대결하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는 지역을 향하고 있다"는 영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소개했다. 동아시아 국가들과 중국이 대립하는 해역으로 퀸엘리자베스호가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나서고 있으니 유럽의 실질적 맹주인 독일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독일 역시 올 여름에 소형 군함인 프리깃함을 인도·태평양에 파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서 불필요한 군사행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는 독일이다. 그런데도 나선다는 것은 인도·태평양 전략이 독일에 어떤 의미를 띠는지 짐작게 한다.

미국·일본·인도·호주가 주도하던 전략에 서유럽 국가들이 초보적 단계로나마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력 파견이 중국을 자극할 게 뻔한 데도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인도·태평양에서 새로운 무대가 열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19세기에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로 몰려온 것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부른다. 이때 서양 열강이 앞세운 것 중 하나가 군함이었다. 그들은 군함을 이끌고 청나라를 집중적으로 압박했다. 청나라를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1840년과 1856년에 두 차례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 뒤 경쟁적으로 중국을 침탈하던 서양 열강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부터 주춤하는 양상을 보였다. 유럽이 주 무대인 세계대전에 주력하느라 중국 무대에 신경 쓸 여력이 적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높이는 원인이 됐다. 전쟁 뒤의 워싱턴 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에서 영국·프랑스·미국·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이 일본과 더불어 중국 및 태평양에 대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동아시아 무대에서 이미 앞서 나간 뒤였다. 서세동점이 제1차 대전을 계기로 한풀 꺾였기에,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및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며 동아시아를 자국의 독무대로 만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1945년에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영향력이 회복됐다. 하지만 서세동점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얼마 안 있어 되돌아갔다. 한반도 이남과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은 그 뒤에도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서세'라고 부를 만한 세력들의 집단행동은 없었다. 미국의 '단독 플레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동아시아에서 2017년 이후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아직은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미국이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뿐 아니라 역외 국가인 인도·호주까지 끌어들여 동아시아 대륙 세력을 압박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여기에 색다른 양상이 추가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동맹 복원' 움직임 속에 서유럽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때도 인도·태평양에 관심을 가졌던 이 국가들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에 연합군사훈련 같은 적극적 방식으로 숟가락을 얹고 있다. 신(新) 서세동점을 떠올리게 하는 현상이다.

인도·태평양에 뛰어든 서유럽 
 

미 전투기가 남중국해를 순찰한 후 항공모함 USS 로널드 레이건 호에 착륙하고 있다. 2019.8.6 ⓒ 연합뉴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압박에 서유럽이 립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군사력 파견을 통한 실질적 협력을 제공하는 현상은 '대서양 동맹' 차원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측면도 띠고 있지만, 그와 다른 측면도 함께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한다'(A)는 명분으로 '인도·태평양 전략'(B)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A와 B는 서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중국도 큰 나라이지만 인도·태평양은 세계의 절반 이상을 포괄한다. 세계의 절반 이상을 동원해 중국을 견제한다고 하니, 미국이 '중국 견제'뿐 아니라 '세계의 절반 이상 동원'에도 욕심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도·태평양 지역에는 세계 인구의 60%가 살고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0%가 생산된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추진 주체 중 하나인 일본 외무성이 4월 27일 발간한 <외교청서 2021>은 "인도·태평양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인도양을 지나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며 세계 인구의 절반을 거느리는 세계 활력의 중핵"이라고 평가했다.

이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인도·태평양은 아프리카대륙 동쪽에서 아메리카대륙 서쪽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연결돼 있다.

중국 역시 큰 나라이지만, 이런 거대한 지역을 동원해 중국을 견제하려면 중국을 견제하는 것 못지않게 이 거대한 지역을 동원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는 이 전략을 앞세우는 미국의 의도가 대중국 견제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동원에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 견제를 명분으로 세계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서유럽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합류하는 동기 중 하나를 설명한다. '대서양 동맹' 차원에서 미국을 지원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의도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태평양에서 형성될지 모르는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의도도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2019년 5월에 프랑스 국방부가 발표한 영문판 <프랑스와 인도·태평양 안보(France and Security in the Indo-Pacific)>의 서문에서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장관은 "프랑스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특별한 주의(particular attention)를 기울이고 있다"고 한 뒤 "경제적 역동성, 인구성장 및 기술혁신으로 인해 전반적인 번영의 원천인 인도·태평양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세계를 이끄는 '전반적 번영'이 인도·태평양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역시 인도·태평양에 연고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인도양 및 태평양 양쪽에 영토와 인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이며 아프리카 해안선에서 아메리카 해안 지방에 이르는 세계의 이 부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한 뒤 이 지역 안정을 위해 프랑스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런 의지를 갖고 상황을 관망하다가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자 '잔 다르크'를 동아시아에 파견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국방장관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유럽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는 것은 꼭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지역에서 형성될지 모르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을 돕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견제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이는 향후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개 과정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나라들의 상호 연대'뿐 아니라 '중국을 압박하는 나라들끼리의 상호 각축'도 심해질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미국에 더해 서유럽까지 인도·태평양 전략에 가세하는 지금 상황은 19세기 서세동점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19세기에는 동아시아가 위축돼 있었지만 지금은 기운이 상승하고 있다. 그래서 인도·태평양 전략이 격화되면 중국뿐 아니라 미국·서유럽에도 작지 않은 타격이 될 수 있다.

또 19세기에는 한국이 동점(東漸)을 당하는 쪽에 있었던 데 반해 지금은 한국이 미국·일본의 동참 요구를 받고 있다. 19세기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세동점에 편승해 한국·중국을 침략한 데 비해 지금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까지 비슷한 '초청'을 받고 있다. 19세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색다른 환경이 한국과 동아시아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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