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5 20:19최종 업데이트 21.05.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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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라이벌'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하여가)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단심가)를 주고받았으며, 1392년 4월 26일(음력 4월 4일) 개경 선죽교에서 그를 쓰러트린 이방원이 떠오른다.

대학자 이색의 문하생으로서 정몽주의 후배이자 동지였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 사이가 갈라져 정몽주가 죽이려 했다가 실패한 삼봉 정도전도 떠오른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 이래로 정치적 명운을 함께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정몽주와 갈라진 이성계도 떠오른다.

한편,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지만 정몽주의 라이벌로 얼른 인식되지 않는 인물이 있다. 정몽주가 이성계·정도전·이방원과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했는데도 정몽주와 얼른 대비되지 않는 인물이다. 조선 후기 시조집인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에 아래 시조를 남긴 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술에 대취(大醉)하고 오다가 공산(空山)에 지니
뉘 날을 깨오리 천지즉금침(天地卽衾枕)이로다
동풍이 세우(細雨)를 몰아다가 잠든 날을 깨오도다
 
이성계·정도전·이방원과 함께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조준(趙浚, 1346~1405)이 남긴 시조다. 바로 이 조준 역시 정몽주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지만, 세 사람에 가려서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시조 속의 조준은 오후 늦게까지 취하도록 마시고 산을 넘다가, 해가 서산에 지듯 그 역시 거기서 지게 됐다. 산길에 누워 잠을 청해 보니, 하늘과 땅이 이부자리처럼 아늑했다. 깜빡 잠이 든 그를 깨운 것은 한밤중에 떨어지는 가랑비였다. 정신이 맑아졌는지, 그는 산속에서 풍향을 감지했다. 바람이 자기 쪽으로 가랑비를 몰고 왔음을 느끼게 됐다.

술에 취해 걸어가다가 아무 데서나 잠들 수 있는 그였다. 그런 그의 걷는 모습에 주목한 사람이 있다. 정도전보다 4년 뒤에 태어난 조준이 청년 유생 시절에 별궁인 수덕궁 앞을 걷다가 일어난 에피소드를 <고려사> 조준 열전은 이렇게 소개한다.
 
공민왕이 수덕궁에 있다가, 준(浚)이 책을 끼고 궁 앞을 지나는 것을 바라봤다. (조준을) 불러서 보더니 기특해 했다. 집안 내력(원문은 家世)을 묻고는 즉시 명령을 내려 보마배 지유(寶馬陪指諭)에 임명했다.
 
임금이 타는 말을 뒤따르는 보마배에 배속된 그는 공민왕이 피살되고 아들 우왕이 즉위한 1374년에 28세 나이로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법무부 차관 격인 전법판서도 지내고, 임시 관직인 체찰사를 맡아 최영 장군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조준의 개혁이 불러온 파급

조준은 책을 끼고 걷다가 공민왕에게 발탁됐지만, 그로 인한 인간적 의리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민수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1388년 이들에게 가세해 공민왕 아들인 우왕을 폐위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 뒤에 조준이 특별한 열의를 갖고 착수한 개혁 과제가 있다. 공직자 토지제도를 손보는 일이 그것이다.


음력으로 조선 태종 5년 6월 27일 자(양력 1405년 7월 23일 자) <태종실록>에 인용된 <조준 졸기>에 그가 고려 말에 "사전을 혁파하여(革私田) 민생을 안정시키기를 요청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 일대기에 나오는 '사전 혁파'라는 표현을 근거로 그의 부동산 개혁인 과전법이 개인 사유지까지 포괄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전은 경작자로부터 조(租)를 징수할 수조권이 관료 개인에게 있는 토지였다.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토지는 공전(公田)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 사유지는 공전·사전과 별개인 민전(民田)이었다.

조준의 개혁은 공전과 사전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그가 민전 체제까지 뒤엎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토지개혁은 20세기 초중반의 공산주의 토지개혁보다는 범위가 좁았다.

하지만, 특권층이나 부유층 중에서 공직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높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공직자 토지를 건드리는 일은 오늘날 공무원 봉급이나 연금에 손대는 일보다 파급력이 훨씬 컸다. 상당 수준의 사회적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유지 체제를 흔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과전법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이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은 시대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어느 시대나 토지제도는 항상 부조리했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정도가 특히 심각했다.

고려 말에는 공직자 생계를 돕고자 제공된 토지들이 소수 특권층 가문(권문세족)에 집중되고 그 내부에서 세습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 말에 등장한 개혁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이 토지를 받기가 힘들게 됐다.

또 공전 및 사전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권문세족의 지배력이 강해지다 보니 소작인들의 경작권이 한층 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작인들이 권문세족들의 자의적 '갑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2004년에 <한국사 시민강좌> 제35집에 실린 역사학자 위은숙의 논문 '조선 건국의 경제적 기초로서의 과전법'은 이렇게 설명한다.
 
고려 후기 사전의 세습은 국가권력의 규제를 벗어나 사사로이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실제 현직 관료나 직역 담당자는 사전을 분급받지 못하고 무자격자가 사전을 세전(세습)하는 사례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전의 겸병과 탈점(奪占)이 확대되면서 농장이 발달하고 있었다.
 
국가가 공직자 봉급으로 나눠준 토지가 소수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이런 토지들이 농장 같은 개인 기업 형태로 운용되는 현실은 "(세금) 수취체제의 문란을 가져왔고 국가재정의 약화와 농민 몰락을 가속시켰다"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조준은 그런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현직 관료가 토지를 받아야 하고 소작인이 경작권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특히 사전 분야를 개혁하고자 했다. 개인 사유지처럼 전락한 사전을 재정비하는 한편, 소작농들의 경작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이런 목표를 위해 그는 가장 열심히 토지개혁을 부르짖었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그가 정도전보다 앞서 있었다.

정몽주는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며 임금에 대한 절절한 충성심을 표현했지만, 실은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을 폐위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님'을 두 번이나 폐위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일편단심'을 두 번이나 거두면서 그는 이성계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 그랬던 정몽주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표방하면서 이성계와 갈라섰다. 그 계기가 된 게 바로 조준의 과전법 개혁이다.

정몽주가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은 위화도 회군 이듬해인 1389년 중반기에 드러났다. 이때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고려사> 축약판이면서도 내용이 약간 다른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평의사사에서 전제(田制)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문란해서 겸병하는 집들이 토지를 빼앗아 산과 들을 차지하였으니, 해독이 날로 깊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이성계가 대사헌 조준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했는데, 이색이 옛 법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며 그 논의를 따르지 않았다. 이림·우현보·변안열도 모두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이색은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그런 그 역시 전제 개혁을 반대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53명 중에 개혁 반대파는 10명 내외 혹은 5명 내외였다. 그렇지만 이색이 반대했기 때문에 단순히 표 계산만으로 끝내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주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가 위 인용문 바로 뒷부분에 나온다.
 
이색을 유종(儒宗, 유교 거두)으로 여기고 그 말을 빌려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으므로, 개혁하여 사전을 공전으로 회복하려는 논의가 결정되지 못했다. 예문관제학 정도전과 대사성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찬동하고, 후덕부윤 권근과 판내부시사 유백유(류백유)는 이색의 주장에 찬성하고, 찬성사 정몽주는 양쪽 사이에서 우물쭈물했다. (중략) 53명 중에 개혁하려고 하는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는데, 개혁하지 않으려는 자는 모두 대갓집 자제들이었다.
 
조준의 토지개혁은 이성계 캠프 실세인 정몽주가 딴마음을 품는 원인이 됐다. 양쪽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던 그는 결국 반대파를 선택했다. 이는 1392년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요양하는 사이에 정몽주가 보수파와 함께 조정을 움직여 조준·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측근들을 탄핵하고 귀양 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때 정몽주는 정도전뿐 아니라 조준도 죽여 없애려 했다. 이방원의 선죽교 테러가 없었다면 조준은 1392년에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고려 멸망 직전에는 "해독이 날로 깊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동산 문제가 대중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사진은 광명·시흥 신도시가 들어설 부지를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이 사전 개발정보를 이용해 사들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토지인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 341번지 ⓒ 유성호

 
고려판 부동산 이슈 

어느 시대건, 토지개혁이 쟁점화 되면 개혁파보다는 보수파가 유리하다. 국유지만 손보는 것이든 민전까지 손보는 것이든, 민전(民田) 대지주들은 보수파에 가담한다. 대개의 경우 이들 대지주들은 비판 여론을 조성하면서 '경제가 위태해진다', '정권이 서민들을 죽인다'며 일반 대중과 개혁파를 갈라놓으려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동일하게 이럴 때는 대지주들이 서민경제를 염려한다.

하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는 대지주들이 대중과 개혁파를 갈라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해독이 날로 깊어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부동산 문제는 대중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를 이미 초월한 상태였다.

공전이나 사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일반 민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래서 특권층과 대지주들의 여론전이 농민들에게 먹혀들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거기다가 개혁파를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이성계 군단이 있었다. 이 군단을 포함한 공권력이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는 점은 이들이 부동산 이슈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의 토지개혁은 발의 얼마 뒤 여론의 역공을 받고 좌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세계 최강국인 몽골(원나라)이 무너진 지 얼마 뒤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질서가 혼란스러웠다. 중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고 오키나와 왕국도 그랬다. 이랬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배층의 응집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과도기 상황도 토지개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토지개혁의 선두주자인 조준의 성격도 한몫했다. <조준 졸기>에 설명된 것처럼 그는 특권층 가문에서 출생했으면서도 귀공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는 모습에서도 그 점을 느낄 수 있다. 또 포부가 클 뿐 아니라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가 기득권층의 저항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됐다.

완전한 의미의 토지개혁은 아닐지라도 조준의 개혁은 한민족 토지문제가 한 단계 전진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정몽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성계 진영과 손잡고 개혁을 추진하던 정몽주는 토지개혁이 이슈화되자 생각을 바꾸게 됐고, 결국에는 개혁파와 맞서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몽주를 그 방향으로 움직인 근본 원인은 조준한테서 나왔다. 정몽주는 자신이 이성계 캠프를 떠나야 할 이유를 조준을 바라보면서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준 역시 이성계·정도전·이방원 못지않은 정몽주의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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