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1 20:18최종 업데이트 21.05.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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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에서 이어집니다. 

야마다쇼지 같은 교수는 우익의 위협 속에서도 일평생 간토 조선인 학살의 일본 책임을 연구하고 발표했다. 가토나오키 같은 작가는 민족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블로그 '9월 도쿄의 거리에서'를 운영하며 학살 증언을 모으고 있다.


2003년 일본변호사협회는 당시 고이즈미 총리 앞으로 "간토 대지진 직후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학살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사죄를 해야 한다"고 권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렇게 뜻있는 일본인들의 노력에 비하면 우리 국회나 정부는 '간토 조선인 학살'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았다. 김종수가 이 문제에 매달린 이래 그 끔찍했던 당시의 실상은 그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살육의 현장
 

김종수가 간토에 매달린 이래 그 끔찍했던 당시의 실상은 그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 민병래

 
자경단의 살육행위는 끔찍했다. 당시 자경단의 주축은 재향군인회원. 이들은 러일전쟁, 시베리아 간섭전쟁 그리고 3.1운동 탄압 등으로 호전성과 조선인 탄압이 몸에 배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인에게 심어진 조선인 멸시풍조까지 더해져 이들의 난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옷을 입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쥬고엔고주센'(15엔 50전)을 말하라고 해 발음이 서투르면 죽창으로 찔러댔다. 팔다리를 붙잡아 장작불에 태우거나 살아 있는 채로 톱질을 하고 조선인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이것이 조센징의 폭탄이다'라고 외치며 만세를 불러댔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학살 이후에는 보호를 한답시고 수천 명의 조선인을 영장도 없이 나라시노 수용소 등에 가뒀다. 여기서 경시청의 특별고등경찰은 '불령선인'으로 찍은 동포들을 피에 굶주린 자경단원에게 몰래 넘겼다. 조선인들은 밤사이 사라지는 동포들을 보며 죽음의 공포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군대는 또 하루 주먹밥 한 개를 주고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는 동포들의 시체 더미를 치우게끔 내몰았다. 도쿄에 있던 영친왕은 계엄사령부를 격려방문 했고, 언론에는 이 강제노동이 '일선융화'와 지진복구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원봉사를 했다고 보도되었다.

김종수는 이렇게 지옥불에 고통받았던 동포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간토 학살을 평생 연구한 강덕상 선생은 김종수를 'Mr 간토'라고 불렀다. 열심히 진상규명에 노력하라는 의미였다. 조선인 학살의 증언을 찾고 학살지마다 추모비를 세우는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은 늘 '고맙습니다'란 말을 빼놓지 않았다. 재일동포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격려를 해줬다.

김종수는 한신대에서 기독교교육과를 마치고 성남 주민교회의 이해학 목사 밑에서 전도사 일을 했다. 거기서 '협동조합'과 '공동체의 가치'를 배웠다. 그 후 아내와 교육공동체를 꿈꾸며 성남 상대원동에 '신나는 놀이방'과 '푸른교실 공부방'을 만들었다. 단칸방의 전세금을 빼 92년도에 시작한 일이다. 교육공동체 일을 하며 즐거웠지만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서 생활은 언제나 고달팠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을 때 스페인의 실바 신부가 쓴 <아이들의 공화국>이란 책을 만났다. 김종수는 이제까지 아이들을 '선교 대상'으로, 뭔가 해준다는 접근이었는데 실바 신부는 "아이들 스스로의 힘으로"란 철학이 확고했다. 그게 깨달음이 되어 '아힘나'를 만들었다.

한일 청소년들이 모인 '아힘나평화캠프'에서 접한 '야끼가야타에코'의 증언은 업보처럼 그를 진상규명의 길로 이끌었다. 김종수가 간토 학살에 매달려 있는 동안 생활비를 제대로 못 벌었지만 아내 조진경은 언제나 동지였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아들 김강산은 간토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며느리 한지영은 간토 학살 민간인 조사활동을 같이하며 <엿장수 구영학>의 삽화를 그렸다. 흔들리지 않는 가족의 지지와 한마음이 큰 힘이었다.
 

엿장수 구학영 - 1923년 9월 5일, 사이타마에서 학살된 조선인 청년의 이야기, 김종수 지음. ⓒ 기억의서가

 
100주년 되기 전에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 받아야

김종수는 다시 일어서서 시민의 힘을 모아 나갔다. 민간조사단을 꾸려 현장조사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일본정부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재일 변호사들을 만났다. 학살 피해자 명부를 실마리로 유족들을 찾아 전국을 헤맸고 추도비의 탁본을 위해 도쿄, 지바, 사이타마 어디든지 다녔다.

김종수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100주년인 2023년 이전에 한일 두 나라 시민운동의 힘을 모아서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압박, 진실규명과 공식추모, 공식사과를 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간토 학살기념관 건립, 피해백서 발간, 특별법 제정을 과제로 삼았다. 책 <엿장수 구영학>도 이런 노력의 하나로 만든 것이다.

2021년 2월 13일 후쿠오카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놀랍게도 트위터에는 '지진으로 조선인이 좋아한다' 같은 유언비어가 간토 대지진 때처럼 돌았다. 재일동포들은 두려움 속에서 이를 지켜봤다.

최근 간토 일원에서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인 추도비를 철거하라고 우익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도지사는 수년째 간토 희생자 추모제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고 주최 측에 준법서약서를 요구하고 있다.

김종수는 이 거꾸로 가는 현실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고맙게도 최근 국내에는 김종수와 뜻을 같이하는 종교인, 대학동문들, 단체들이 많이 생겼다. 아우내 재단과 주민신용협동조합의 협력으로 천안 아우내 동산에 작게나마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을 열었다. 개관에 맞춰 일본의 뜻있는 연구자, 시민들이 일기와 증언집 관련 자료들을 기증해 줘 백서발간작업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전시실에서 간토학살기념관을 만드는 게 그의 숙원이었다. 천안 아우내 동산에 작게 나마 기념관을 열었다. ⓒ 민병래

 
그는 아우내 동산에서 묻는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에서 그 누가 일본 정부의 학살 책임을 꾸짖고 죄 없는 겨레의 죽음에 목놓아 울었는지? 1923년 12월 14일, 무소속의 '다부치 도요키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회에서 "천명 이상의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연설하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런 기개를 가진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왜 없었던 말인가?

그는 아우내 동산에서 외친다. 독립신문은 한기복을 일본에 몰래 들여보내 '동포위문단'이라 가장하고 실태조사를 통해 6661명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임시정부시절의 일이다. 그렇다면 독립국가가 된 이래 우리 정부는 간토 조선인 학살에 대해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제 100주년인 2023년까지는 불과 2년, 김종수에게는 시간이 없다.

<못다한 이야기>

① 김종수 대표의 더 많은 이야기나 후원에 관한 방법은 http://www.1923news.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② 도쿄대지진은 1923년 9월1일 도쿄를 포함하는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지진으로 강도는 7.9였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에 탔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40만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③ 신문의 왜곡보도는 도쿄일원의 지방신문에서 더 심했다. 당시 도쿄는 지진으로 인해 신문사들이 정상 발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선정적 내용이 가득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신문에 거리낌 없이 실었다. 1923년 9월 3일자 도쿄니쯔니찌신문은 "정부 당국에서는 급히 2일 오후 6시를 기해 계엄령을 내렸는데 동시에 200명의 (조)선인이 칼을 빼들고 메구로 경마장에 집합하려다가 경관대와 충돌이 나 쌍방에서 수십명의 부상자가 났다는 급보가 경시청에 달했기에 쇼오로끼주사, 야마다 고등보통과장이하 30명이 현장으로 급행하고 한편 군대 측의 응원을 요청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냈다.

⑧ 김종수의 노력은 정말 다양하게 이루어져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현장조사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학살 실태조사를 위해 민간조사단을 이끌고 조사보고서를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고, 법적 소송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재일변호사를 만나고, 쟁점이 되는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본에서 연구자들을 초청해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학살피해자 명부가 발표되자 유족을 찾기 위해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순회전시회를 열았다.

또 간토 학살 현장에 세워진 추도비의 탁본을 뜨기 위해 탁본 전문팀을 이끌고 채탁을 하고, 국가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2023년까지 민간의 힘으로라도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간토 학살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역사관을 만들기로 하고 현재 건물을 완공하였다. 장차 이 역사관의 전시업무와 운영을 맡길 사회적 협동조합 '기억과 평화'를 조직하고, 부설로 <1923 제노사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⑨ 이 글을 쓰는 데 아래 자료들이 참고가 되었다.
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일본국가와 민중의 책임」, 논형출판, 2008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동대지진」, 역사비평사, 2005
가토 나오키,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갈무리, 2015


엿장수 구학영 - 1923년 9월 5일, 사이타마에서 학살된 조선인 청년의 이야기

김종수 (지은이), 한지영 (그림), 기억의서가(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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