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30 11:20최종 업데이트 21.05.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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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3년이 흘렀다. 그의 3주기에 즈음하여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함께 공동기획으로, 4월 16일부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우리 시대 '6411 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의 정치실천: 기록으로 기억하다] 기록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말]
노회찬은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사(2012.10.21.)와 당대표 퇴임 고별사(2013.7.21.)에서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며 투명인간분들을 아래처럼 구체적으로 호명한다.

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한 달에 85만원 받는,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인 50, 60대 아주머니분들"
② "현대자동차 고압선 철탑 위에 올라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③ "23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④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다섯 분"

이번 글에서는 "용산참사"과 관련한 노회찬의 이야기와 그들의 '지금·여기' 삶의 현주소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 기자말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특공대가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고공진압 작전을 벌이는 가운데 옥상에 설치된 농성 가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는 모습. ⓒ 권우성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 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그 다섯 분도 역시 마찬가지 투명인간입니다." - 노회찬의 '6411 연설'(2012.10.21; 2013.7.21.) 

2009년 1월 20일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해 온 세입자 등 30여 명이 턱없이 적은 보상비에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 용역 직원들과 충돌, 세입자들이 설치한 망루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6명(철거민 5명,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하는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 수사본부(본부장 정병두 1차장 검사)를 설치한 검찰은 2월 9일, 경찰은 무혐의로, 철거민 20명과 용역업체 직원 7명 등 27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 3주 만에 철거민의 화염병 사용이 화재의 원인이었고 경찰의 점거농성 해산작전은 정당한 공무집행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철거민 대책위원장 등과 용역업체 직원 7명을 기소한 것이었다. 2월 11일에는 청와대가 군포연쇄살인사건을 적극 활용해 용산참사 여론을 무마하라는 홍보지침을 이메일로 발송(2.3.)한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2월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피고인들 요청에 따라 국민참여재판 전담부인 형사합의 27부(한양석 부장판사)에 사건을 재배당했고, 검찰은 변호인단의 수사기록 열람 등사요청을 거부하였다. 법원의 판단도 철거민의 화염병 투척을 참사의 원인으로 결론짓는 등 검찰 수사와 다르지 않았다.

용산참사 국민참여재판 신청은 기각됐고, 검찰은 농성자 9명에게 징역 5년~8년을 구형했다. 10월 28일 용산참사 1심 공판 선고에서 농성자 7명에게 징역 5년~6년, 2명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2010년 5월 30일 고법 항소심에서 농성자 7명에 징역 4~5년, 2명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1월 11일 대법원 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 상고심에서 농성자 7명에 징역 4~5년을 선고한 원심 결과를 확정했다. 

"그들이 왜 올라갔습니까? 살려고 갔습니다"
 

2009년 1월 21일,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이명박 규탄 및 희생자 추모대회'를 마친 시민들이 서울 중구 명동 앞에 모여 경찰의 강제진압에 항의하며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유성호

 
용산참사 다음날인 1월 21일 노회찬(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과 정종권(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은 진보신당 당원들과 함께 용산 화재 및 참사 현장(남일당 건물)을 찾아가, (가칭)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대책위원회의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이명박규탄 및 희생자(열사) 추모대회'에 함께했다.

다음날인 1월 22일 밤 '용산참사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다룬 MBC <100분토론>(진행: 손석희)에 패널로 참석한 노회찬은 물었다. 

"그들이 반국가 단체입니까? 그들이 테러리스트입니까? 그들이 거기 왜 올라갔습니까? 살려고 갔습니다."

100분토론 하루 전날인 2009년 1월 21일 노회찬을 처음 만난, 고 이상림씨의 며느리 정영신씨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노회찬은 이랬다. (이승윤 기자 외, 을들이 비빌 언덕이 사라졌다-노회찬이 떠난 뒤 만난 을들에게 그는 갑들의 횡포 막는 '무기'…: 이제 누가 을들의 얘기를 들어주려나, <한겨레21>, 제1223호, 2018.7.30.)

노회찬(당시 진보신당 대표)이 정영신씨와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을 만나러 왔다. 남편은 사건 당시 부상으로 병원에 있었다. "사실 노 의원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열지 못했어요. 정치도 정치인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정치인이 과연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거리감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1월 22일 밤에 진행된 토론에서 노회찬은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


"그분들이 여기 왜 올라갔느냐. 반국가 단체냐, 봉기하려고 올라갔느냐. 살려고 갔습니다. 자구책으로 물품을 가져간 것이고, 경찰·깡패가 설치지 않았으면 왜 던졌겠습니까. 화염병 얘기는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정영신씨는 "노 대표는 평범한 이들이 왜 화염병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날카롭고 시원하게 물었다. '인간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진압해서는 안 된다'고 쉽고 친절하게 설명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우리는 그때 테러리스트,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적인 사람들로 비쳤어요."

노회찬 "검찰의 수사가 공정성을 잃고 있다"

노회찬은 '용산철거민 참사' 관련 검찰의 철거민 5명에 대한 구속수사에 대해 성토하면서, 용역직원과 시행사의 탐욕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조현호 기자, 용산 참사 원인 가리지 않고 철거민 구속 맞나: MBC <100분토론> 원인 놓고 과격시위냐 과잉진압이냐 격론, <미디어오늘>, 2009.1.23.).

"검찰도 화재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임을 인정하면서도, 이들 철거민이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단정하고 구속했다. 검찰의 수사 자체가 공정성을 잃고 있으며 한쪽으로만 책임을 몰아가는 것이 역력한 상황이다."

이어서 노회찬은 검찰과 경찰, 조중동 등 보수신문이 운운하는 '외부세력 배후론'에 대해 이렇게 질타한다. 

"경찰이 외부세력이고 용역직원이 외부세력이다. 돌아가신 분 중에 '외부세력'이라고 지칭되는 이들도 다 철거민이고, 철거민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달려와 돕게 된 것일 뿐이다."

"용역깡패들 말 안 듣는다고 하는데, 다 철거업체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누가 불러들였나. 조합이다. 이들은 돈이 없다. 결국 시행사가 조합에게 지급해준다. 끝으로 올라가면 사업비 28조 원 중 삼성중공업, 포스코 등의 개발이익만 4조 원이다. 4조 원의 1%만 양보해도 100% 해결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깡패나 다름없는 용역업체 동원한다. 협상 통해 마무리 안 하고, 손실 입을지 여부에 대해 협의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진상조사단에 참여하고 있는 오창익(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조합과 세입자라는 사인 간의 분쟁에 경찰이 어떻게 개입하느냐가 문제의 핵심 아니냐. 양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서 타협점을 찾든지 해야지, 약자가 농성에 들어가자마자 특공대를 투입할 수 있느냐. 농성하던 세입자 중에는 1930년대 생으로 70대인 분도 있다. 이런 자국민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특공대를 투입하는 국가가 어디 있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논객으로 자리한 임원식(취업준비생)은 변철환(뉴라이트전국연합 대변인)을 상대로 "변 대변인 자신의 땅이 재개발에 묶여 턱없이 부족한 영업보상금을 받고 협박을 하면서 나가라면 나가겠느냐"고 묻자 변철환은 "내가 상인 입장이라면 나갈 수 없다. 권리금이라도 더 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고 답했다.

전화연결된 시민 박철환(헌법강의)씨는 "이번 사태의 원인은 폭력시위 떼쓰기가 아니라 악법으로 사회적 약자를 내몰아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쓰게 해놓고 폭력시위했지 않느냐고 덮어씌운 데 있다"며 "사랑하는 가족이 내몰리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지 대통령 방패막이여선 안 된다. 가진자들을 위한 방패막이여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1월 31일 오후 4시 서울 청계광장.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규탄 및 철거민 희생자 추모를 위한 제2차 범국민추모대회'가 1만 명 이상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2009년 1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2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인근 청계1가 한국관광공사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는 모습. ⓒ 권우성

 
노회찬은 "테러범 잡기 위해 창설된 경찰 특공대가 국민에게 테러를 하고 있다. 생존권을 지키려 20일치 식량을 갖고 망루에 올라간 이들이, 테러범을 잡기 위해 창설된 경찰특공대 진압에 의해 하루 만에 주검이 돼서 내려왔다"면서 "이명박 정권은 광주 시민이 폭도이고 배후에 고정간첩이 있다던 전두환과 똑같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철거민들을 폭도로 몰며, 촛불집회 당시 양초를 무슨 돈으로 샀느냐며 다그치던 짓 그대로 이제는 철거민들 계좌를 조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전두환이 내란음모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듯이 역사가 이명박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유죄를 선고할 것을 확신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하고 김석기를 구속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책을 바꿀 때까지 용산참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우리 모두 분명히 하자"고 역설했다.

"함께 손을 잡고 보듬어 주소서"

2009년 7월 18일 오후 5시 서울 시청광장 옆 분수대 앞. 

유가족들과 노회찬은 서울광장에서 청와대로 삼보일배에 나섰다. 문정현 신부는 펼침막을 잡았다. 노회찬은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6개월이 됐는데도 고인들은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당장 달려와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회찬은 "하늘에서 내리는 장대비도, 경찰의 방패와 곤봉도 우리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유성호·전관석, '용산참사' 유가족 눈물 따라 하늘도 펑펑 울었다, <오마이뉴스>, 2009.7.18.).
 

용산참사 유가족,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 문정현 신부가 2009년 7월 18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용산참사 문제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삼보일배를 진행하다가 경찰들에게 막혀 무산되자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용산참사 유가족,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 문정현 신부가 2009년 7월 18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용산참사 문제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삼보일배를 진행하다가 경찰들에게 막혀 무산되자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고 이상림씨의 며느리 정영신씨는 이날을 똑똑히 기억한다(이승윤 기자 외, 을들이 비빌 언덕이 사라졌다-노회찬이 떠난 뒤 만난 을들에게 그는 갑들의 횡포 막는 '무기'…, <한겨레21>, 제1223호, 2018.7.30.).

"폭우가 쏟아졌다. '누가 비옷을 건넸는데 한사코 거절하시고 굵은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시더라고요.' 유가족들의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어머니·할아버지·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지켜봤다. 경찰들이 가족들을 끌어냈다. '어머니들한테 손대지 마라!' 정영신씨는 '아무 말 없던 노 대표가 처음으로 격앙된 순간이었다. 그도 끌려나가던 참이었다. 그 모습을 속절없이 바라봐야 했다'고 고개를 떨궜다."

용산참사 1주기를 한 달 보름 남겨둔 2009년 11월 29일. '사람 사는 서울'을 슬로건으로 앞세우며 노회찬은 서울시장 출마선언을 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유가족들에게 '중앙정부가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정운찬 국무총리의 발언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했다(내가 서울시민의 평균…친구같은 서울시장 되고 싶다, <프레시안>, 2009.12.4.).

"돌아가신 분들은 시민이면서 동시에 국민이다. 그것을 지자체 차원에서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경찰특공대가 작전을 펴는 것은 청와대와 협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어디까지 책임질 것이냐의 문제는 있지만 중앙정부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관광 온 외국인이 사망해도 총리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데 민간인끼리 싸우다 사망한 것도 아니고 공권력이 투입돼서 생긴 문제인데 유감표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울시는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서울에서 발생한 문제이고 재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제도적,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다 져야 한다. 총리도 총리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오세훈 시장이 현장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협상과 별개로 시장으로서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마 서울시민들 중에 안간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10년 1월 9일 낮 12시 서울역광장. 355일 만에 용산참사 희생자 5명에 대한 영결식이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범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학살주범 이명박 정부'·'열사여 편히 가소서'와 같은 문구를 적은 수백 개의 만장도 세워졌다. 노회찬은 조사(弔詞)를 읊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참사 발생 355일 만에 거행된 2010년 1월 9일 오전, 서울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열린 발인식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진보신당 대표가 참석해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유성호

  
"언제까지 죄송해 하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고인들의 뒤에 남은 가족과 함께, 그리고 벗들과 함께 철거민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언젠가는 저 뻔뻔한 대통령이 고인들의 무덤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겠습니다. 용산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바꾸어 약자들이 힘을 갖는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때까지 고인들이시여, 오늘의 고통, 억울함, 서러움 모두 잊으시고 편히 하늘나라로 떠나소서. 먼 훗날 우리가 새 세상에서 만날 때에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고 왔노라고 같이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결식 현장에 있던 <뉴스보이> 권근택 기자는 당시 상황을 정리하며 노회찬의 조사에서 받은 강한 인상과 감흥을 전했다(노회찬, 꽤 괜찮은 남자더라: "용산참사 희생자들이여 김남훈 경사 만나거든 위로해 주소서" , <뉴스보이>, 2010.1.11.).

"마지막으로 조사를 읽은 것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4인의 조사 중 가장 강하게 뇌리에 각인됐다. 그 이유는, 조사의 마지막 부분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 영결식의 추모대상인 희생자 5인뿐 아니라, 당시 함께 목숨을 잃은 김남훈 경사를 함께 언급한 부분이었다.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 테러 진압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살인 진압 명령에 강제 동원되어 그 참사 과정에서 함께 운명하신 특공대원 고 김남훈 씨, 돌아가신 열사들과 마찬가지로 무허가 건물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특공대원 생활을 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남훈 씨를 만나시거들랑 위로해 주소서. 함께 손을 잡고 보듬어 주소서.'

깊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망자들에게 부탁하는, 생사의 선을 넘어 전하는 한마디였다.

영결식장에서 조사를 읽던 야당 대표 4인 중 노회찬 대표가 마지막 순서, 마지막 순간에 김 경사를 다섯 희생자와 더불어 억울하고 아까운 목숨, 용산참사의 엄연한 희생자로서 추모한 것은 내게 강한 울림을 전하기 충분했다. 쉽지 않은 분위기, 자칫하면 곱지 않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던 찰나에 기꺼이 또 한사람, 그간 쉽게 밝힐 수 없었던 또 한사람의 희생자를 배려한 것이었고 이는 분명 용기가 필요한 언행이었다.

…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그 추모의 말 한마디가 실상은 절대 쉽지 않은 것이 사실. 그런데 노회찬 대표는 이것을 감수하고 입을 뗐다. … 그 한 순간, '이 남자, 꽤 괜찮은 남자인 것 같다'는 감흥을 받았다. 정말로 저 세상이 있다면, 또 한사람의 참사 희생자 김 경사는 그의 배려에 필시 감사했을 거라고 믿는다."


오전 9시 순천향병원을 나서 명동성당에서 수배자들을 만나고 서울역광장에서 영결식을 치른 유가족들과 장례위원들은 운구행렬을 뒤따른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후 5시10분경 용산참사 현장에 도착, 노제를 진행했다. 
  

영결식 후 노회찬 의원의 모습 ⓒ 노회찬재단


기록 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6411 투명인간과 약자들의 벗 노회찬] 용산참사와 노회찬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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