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2 18:51최종 업데이트 21.05.0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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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 해남 쪽 우수영에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이 있고, 진도 쪽 녹진리에 '지휘하는 이순신 동상'이 있다. ⓒ 정명조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대결, 조선·명나라 연합군 대 일본군의 대결, 동아시아 대륙세력 대 해양세력의 대결이라는 측면을 띠었지만, 이순신에게는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그에게는 일본 수군과의 전쟁인 동시에 어느 정도는 원균과의 라이벌 대결이기도 했다. 1592년에 발발한 7년 전쟁의 상당 기간을 그는 원균과의 갈등으로 소모해야 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성옹지소록'에 따르면, 이순신과 원균은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데릴사위 문화가 약해지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어 아이들이 친가보다는 외가에서 더 많이 출생하던 시절에 강릉 외가에서 태어난 허균은 친가가 있는 한양 건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 해당하는 건천동은 서울지하철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의 중간쯤에 있었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 저택 뒤로 본방교까지 고작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國朝, 우리 조정, 우리나라) 이래로 명인이 많이 나왔다. (중략) 근세에는 유 서애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같은 시대가 된다. 

1569년생인 허균이 볼 때, '근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서애 유성룡(1542년 생), 이순신(1545년 생), 원균(1540년 생)이 한양 건천동에 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 집안은 문신 가문이고 원균 집안은 무신 가문이기는 했지만, 지역마다 양반들의 네트워크가 끈끈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서 성장한 다섯 살 터울의 선후배라면 친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심각한 대립

그렇지만 두 사람은 후세 사람들이 훤히 알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각각 47세의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 및 52세의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로 맞이한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은 두 사람을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았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전라좌도와 경상우도가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전라좌도 오른쪽에 전라우도가 있고, 그 오른쪽에 경상좌도, 그 오른쪽에 경상우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이 아닌 군주가 주권자인 시대였기 때문에, 왼쪽·오른쪽 구분도 임금을 기준으로 결정됐다.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군주를 기준으로 하면, 경상좌도-경상우도-전라좌도-전라우도의 순서가 됐다. 그래서 원균의 경상우도와 이순신의 전라좌도는 서로 이웃한 지역이었다.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이 근무지마저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기질뿐 아니라 경력이나 가문 같은 측면에서도 충돌의 소지가 있었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의 <이순신 평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았고, 무과 급제는 10년이나 빨랐다. 경력 면에서도 수군만호를 2회 역임한 이순신에 비해 만호·첨사·부사를 두루 역임한 원균이 훨씬 화려했다.

거기다 원균은 이순신과 달리 무신 가문 출신이었다. 평시에는 문신 가문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균 입장에서는 갑자기 이순신에게 뒤지게 된 전쟁 발발 이후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에 더해 두 사람은 당파도 달랐다. 이순신은 동인당의 후원을 받았고, 원균은 서인당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 두 사람이 충돌했으니 감정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인격자인 이순신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이 대립은 심각했다. 이순신이 일기장에다 원균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썼을 정도다. 

이순신은 '동료 원균'이 아니라 '인간 원균' 자체를 혐오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기 얼마 전인 음력으로 선조 26년 7월 21일(양력 1593년 8월 17일)에 쓴 일기에도 그런 정서가 묻어 있다. 원균 등과 함께 작전회의를 한 그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우 흉악하고 기만적이었다(元水使所言, 極凶譎). 무어라 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함께 일하는 데 있어서 후환이 없을 수 있을까.

무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하고 기만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사악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회의 도중에 원균이 입을 열 때마다 이순신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음주 습관마저 좋지 않다는 게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이순신은 원균의 '술 문화'까지 일기장에 적어 놨다. 선조 임금이 파견한 순무어사 서성과 충청도·경상도 수군 지휘관들이 이순신 전함에서 술자리를 갖고 돌아간 날인 선조 27년 4월 12일(1594년 5월 31일) 이순신은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썼다. 이때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원균보다 상급자였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원 수사가 거짓으로 취한 척하며 광란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들을 쏟아내니, 순무어사가 괴이함을 억누르지 못했다. (원균이) 의도하는 바가 극히 흉악했다(所向極凶).

만약 이순신이 원균을 좋게 봤다면, 술 취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노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원균이 일부러 취한 체 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의도하는 바가 극히 흉악했다'라고 썼다. 번역을 세게 한다면 '노리는 바가 지극히 흉측했다'가 될 수도 있다. 술 먹는 모습까지도 죄다 거짓으로 비쳤던 것이다. 원균을 대할 때마다 이순신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몸까지 고달프게 한 원균 

그런데 이순신의 '마음'이 아닌 '몸'이 원균 때문에 힘들었던 일도 있었다. 전쟁 중의 역병으로 부대원들뿐 아니라 이순신 본인까지 '확진 판정'을 받은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순신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보다 역병과의 전투에서 훨씬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선조 26년 8월 10일자(1593년 9월 4일자)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전염병까지 크게 번져 군영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594년 봄에 이순신 휘하의 충청·전라·경상 수군은 2만 1500명 정도였다. 전투가 별로 없었던 1595년 봄까지의 1년 동안 이 숫자는 4100명 정도로 감소했다. 병력 감소는 상당 부분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1594년 봄에 이순신도 확진 판정을 받아 약 3주간 악전고투를 했다. 이 기간의 <난중일기>에는 '몹시 괴롭다', '불편했다', '종일 신음했다' 등의 표현이 많다. 전투도 준비하고 군대도 관리해야 했기에 이중삼중의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3주 동안에도 원균이 <난중일기>에 등장한다. 이 기간의 원균은 이순신의 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이순신의 몸을 자극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이 몸조리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게 됐다. 

발병 이틀째인 선조 27년 3월 7일(1594년 4월 26일), 이순신은 명나라 군영에 보낼 답서를 준비했다. '강화 협상에 방해가 되니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나라 담종인의 <토벌 금지 공문(禁討牌文)>에 대한 답서였다. 

답서인 <담종인 도사의 금토패문에 답함(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에서 이순신은 상대방을 살살 달래면서도 '일본 전함 1척은 물론이고 노 1개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시는데, 이곳이 다 우리 땅인데 무슨 말씀이시냐?' 등등의 말로 상대방의 요구를 우회적으로 거부했다. 

위 날짜 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몸이 너무 아파 처음에는 부관에게 문서 작성을 맡겼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이어 원균이 자기 부하를 시켜 문서를 지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병을 누르고 일어나 앉아 문장을 지었다"라고 이순신은 말한다. 그렇게 아픈 몸을 억누르며 작성한 것이 위 공문이다. 

발병 7일째인 음력 3월 13일(5월 2일) 아침, 이순신은 전날 작성한 보고서를 조정에 발송했다. 이날 오후 원균이 찾아오더니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오전에 발송한 공문을 도로 찾아와 재작성해야 했다. 오전에 발송한 공문과 관련된 내용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음력 3월 12일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래서 봄날이지만 쌀쌀했다. 그런 날씨에 그는 아픈 몸을 일으켜 공문서를 작성했다. 그 문서를 다음날 오후에 다시 작성해야 했던 것이다.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13일 신묘일. 맑음. 아침에 보고서를 봉해 발송했다. (중략)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거짓으로 속인 일을 말했다. 그래서 보고서를 도로 갖고 와서, 원사진·이응원 등이 거짓으로 왜적을 베어 바친 일을 수정해서 보냈다.

이순신은 더 이상의 자세한 정황은 적지 않았다. 원균의 '신묘한 고백'으로 인해 한번 더 수고한 사실만 적어놨다. '흉악하고 기만적'으로 보이던 사람이 평소와 달리 솔직하게 고백하는 바람에 확진자 이순신은 이날 한번 더 고생해야 했다. 이로부터 2주 뒤 이순신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순신의 눈에, 원균은 거짓돼도 문제이고 솔직해도 문제가 될 만한 사람으로 비친 것 같다. 그렇게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과 힘을 합쳐 대 일본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 이순신 개인뿐 아니라 조선군 전체에도 전력 손실을 줄 만한 문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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