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9 15:14최종 업데이트 21.04.1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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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누구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꿈꿉니다. 심적, 경제적 자유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바라는 마음이 선을 넘어 욕망 덩어리가 되는 순간, 분별력이 흐려집니다. 실제 자신의 능력보다 목표 설정치가 과하게 높으면, 어느새 열정이 탐욕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련이 우리를 단련시켜주는 건 맞지만, 예상 못 한 시기에 감당하기 힘든 강도로 덮쳐오면 하릴없이 휘청대기 마련입니다.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선, 평소 의지라는 이름의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둬야 합니다. 그러면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습니다. 폭풍우는 언젠간 그치기 마련이고, 버텨낸 만큼 더 힘차게 줄기를 뻗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이치입니다.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의 루이비통 만년필
 

루이비통(Louis Vuitton) 금장 만년필 F촉 ⓒ 김덕래

 
흔히 3대 명품을 이야기할 때 '에르메스(Hermes)'와 '샤넬(Chanel)', 그리고 '루이비통(Louis Vuitton)'을 거론합니다. 1854년 프랑스에서 탄생한 루이비통은 세계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힙니다. 가죽 가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의류, 신발, 시계, 보석, 패션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템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루이비통은 만년필을 포함한 필기구 라인업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 펜은 이탈리아 출신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가 디자인했습니다.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캡과 배럴 모두 23K 금도금이고, 18K 금촉을 사용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생산되었으니, 얼추 30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셈입니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과 문양으로 치장한 게 아니라, 오로지 골드 하나로 첫 획을 그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명투수가 던지는 묵직한 직구처럼 미끈하게 뻗은 외형이, 마치 순금 장신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벼 가늘게 꼰 것만 같습니다. 외양은 손에 쏙 들어올 만큼 날렵하지만, 결코 존재감은 가볍지 않습니다.

한동안 쓰지 않을 펜이라면
 

사진 상단 - 펠리칸 M205 / 하단 - 루이비통 금장 ⓒ 김덕래



'고시용 만년필'이란 애칭이 있을 정도로 많은 만년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펠리칸 M200(205)의 전체 무게는 대략 14g 정도, 캡을 제외하면 9g이 채 못됩니다. 이 펜은 그보다 무려 네 배가 넘는 38g입니다. 캡까지 포함하면 55g에 달하는 묵직한 펜입니다.

비 오는 날 산길을 걷고 나면 운동화가 젖고, 흙이 묻는 게 당연합니다. 젖은 부분을 말리고 흙을 털어낸 다음 보관해야 언제든 필요할 때 다시 신을 수 있지요. 집에 오자마자 그냥 신발장에 넣고 방치하면 흙이 말라 외피에 얼룩이 질 수밖에 없고, 또 물기로 인해 냄새가 나거나, 더러는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동안 쓰지 않을 펜이라면, 내부를 세척한 다음 물기를 말린 후 보관해야 합니다. 그러면 1년, 아니 10년 후에도 새 펜처럼 쓸 수 있습니다. 쓰던 펜에 잉크가 남아 있는 채로 무심히 서랍에 넣고 오래 놔두면, 비 오는 날 신고 버려둔 운동화와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됩니다.

세척을 한 다음 보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잉크가 세월의 힘을 빌어 펜을 망가뜨렸습니다. 아무리 좋은 만년필도 잉크가 없으면 그저 장식품일 뿐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혈액에 비유될 만합니다. 하지만 그 유용한 잉크가 펜을 망치기도 합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합니다.

펜이 흉해졌다고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어도 멀쩡히 제 기능을 다하는 펜이 무수합니다. 잘만 관리해주면, 아버지가 사용하던 펜을 넘겨받아 평생 쓰다, 내 아이에게 물려줘 대를 이어가기도 하는 게 만년필입니다.

사람의 성정과도 닮은 만년필

사람도 성정이 모질고 악하면, 사나운 눈매와 뾰족한 말투를 통해 품은 속내가 삐져나옵니다.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숨길 수도 없고, 숨겨지지도 않습니다. 만년필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분이 이렇단 얘긴, 내부는 더 심각하단 뜻입니다. 오래 묵은 펜은 분해 자체가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말라붙은 잉크가 마치 접착제처럼 부속과 부속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분해하기 위해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힘을 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피드가 부러지거나, 멀쩡했던 펜촉이 휘기도 합니다. 적시에 했더라면 그리 고되지 않았을 일인데, 때를 놓쳐 몇 배의 애를 쓰고도 그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게 어디 만년필 세척에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만년필 한 자루를 관리하는 일은 마음 다스리기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립섹션에서 펜촉과 피드를 분해하니 예상대로입니다. 잉크가 '콜타르(Coaltar)'처럼 끈적끈적한 반고체 상태로 틈새 구석구석 참 촘촘히도 엉겨 붙어 있습니다. 마치 유성잉크처럼 찐득해 여간해선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에 담그면 표면에 묻은 잉크는 술술 풀어지지만, 피드 콤 사이사이 박혀 굳은 잉크 찌꺼기는 아무리 오래 담가놔도 요지부동입니다. 이럴 땐 부드러운 브러쉬를 사용해 닦아내고, 펜촉은 면봉을 물에 적셔 닦아내면 효과적입니다. 충분히 제거한 다음 다시 물에 담그길 반복해, 물기가 닿아도 잉크 잔여물이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위 - 잉크가 주입된 상태로 방치된 펜촉과 피드 / 아래 - 세척하는 과정 ⓒ 김덕래

 
이 만년필의 펜촉은, 측면 숄더가 피드를 둥글게 감싼 형태입니다. 강성 펜촉일수록 숄더의 휨 정도가 급합니다. 어느 정도의 필압도 버텨주는 펜촉이란 의미입니다. 파이롯트의 FA촉은 숄더를 펴다 못해 아예 일부 삭제한 형상입니다. 극단적인 탄력감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책이지요.

축구 경기도 모르고 보면 공 하나를 두고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양 팀 사령탑의 치밀한 전략 아래 움직이는 것처럼, 다 똑같이 생긴 것만 같은 펜촉도 관심을 기울이면 전에는 안 보이던 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위 - 파이롯트 FA촉 / 아래 - 루이비통 F촉 ⓒ 김덕래

 
캡을 제외한 무게만 40g에 가까운 펜입니다. 최대한 가볍게 쥐고 써도, 펜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강성 펜촉이란 뜻은 그만큼 촉의 낭창거림이 덜하기에, 펜촉이 틀어질 확률도 낮단 말로 해석됩니다. F촉이지만 그렇게 두껍지 않은 흐름입니다. 다이어리 메모용으로도 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균일하고 끊김 없이 나올 때까지 시필은 계속됩니다. 만년필은 감성으로 쓰는 도구라지만, 그 바탕은 과학입니다. 마치 정밀 부품을 다루듯, 기계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조정도 사람의 손끝을 통하면 가능합니다.

지금 낙심하지 마세요, 언제나 길은 있습니다
 

흡수율이 서로 다른 종이에 그어가며 테스트하는 과정 ⓒ 김덕래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아직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름 없는 작은 꽃씨가 움트는 데도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 이상의 경이로운 힘이 필요하다는데, 하물며 당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는 일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단련시키고, 안온한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대장장이가 쇠를 담금질하듯 적절한 강약이 조화를 이룰 때, 수축과 이완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마음 근육도 점점 단단해집니다.

고작 촉끝이 살짝 틀어진 펜 한 자루를 손보는데도 무수한 밤낮이 소요됩니다. 분명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싶은데도 턱없을 때가 있습니다. 수천 자루를 손봤어도 자세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틀어진 펜촉을 손으로 매만지다 손톱이 갈라지고 부러지면, 촉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무른 나뭇조각에 펜촉을 대고 그어가며 반듯하게 잡아냅니다. 내 눈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뿐, 언제나 길은 있습니다.
 

펜촉을 다듬을 때 도구로 쓰는 연한 나뭇조각 ⓒ 김덕래

 
수많은 모조품 생산 업체의 잽을, 루이비통은 보다 강력한 스트레이트로 맞받아쳤습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만들어내며 몇 단계 더 높은 곳에 올라섰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성급히 낙담하지 마세요. 불안은 결과를 빨리 보려는 조급함을 먹고 자랍니다. 괜찮습니다. 시련을 발판 삼아 더 높이 도약하면 그뿐입니다. 일확천금은 없습니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이면 됩니다.

더워서 몸이 흘리는 땀과, 몸을 움직여 뽑아내는 땀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후자는 되려 개운해집니다. 똑같은 땀도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그것이 됩니다. 내가 원해서 차를 몰면 드라이브지만, 억지로 하는 운전은 노동입니다.

이번 생은 망쳤다 자학하지 마세요. 그저 시련일 뿐입니다. 거짓말 같은 바람을 담아 보냅니다.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아 속상할 때, 이 펜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 시름이 잊히고, 그저 한 줄 긋는 것만으로도 막힌 일이 술술 풀리길 바랍니다. 꼭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 루이비통(Louis Vuitton)
- 185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탄생했으며, 만년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워터맨(Waterman)'보다 근 30여년 전 세상에 선을 보인 명품 브랜드. 모조품들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다미에 캔버스(Damier canvas)'와 '모노그램 캔버스(Monogram canvas)'라는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며 부동의 자리를 공고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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