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0 18:39최종 업데이트 21.04.1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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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에서 이어집니다.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2018년 9월 사진. ⓒ 민병래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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