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7 07:27최종 업데이트 21.04.07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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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사태가 중국 상하이(상해) 재개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도시 재개발로 철거될 상황에 놓였던 '세계 1호 일본군 위안소'가 당분간 유지될 수 있게 됐다.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진 1932년 1월 8일로부터 3개월 3주 뒤인 그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지금은 루쉰 공원으로 개명된 이곳은 상하이시 홍커우구(區)에 위치해 있다.

바로 이 홍커우구에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인 다이살롱(大一沙龍)이 있다. 1932년 1월 28일의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해 사변, 1·28 사변) 뒤에 세워진 이곳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이 이용한 최초이자 최장의 성착취 현장이다. 이곳이 철거될 뻔했다가 램지어 사태의 영향으로 보류됐다. '재개발'보다 '역사적 증거 보전'의 목소리가 더 높아진 결과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이 있던 건물 지난 1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의 옛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 건물 앞을 한 행인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고 있다. 이 일대는 노후 주거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재개발된다. 2021.3.21 ⓒ 연합뉴스

 
철거 위기 모면한 '세계 1호' 일본군 위안소

<연합뉴스> 기사 '첫 일(日) 위안소 다이살롱 보전된다(3월 24일자)'에 따르면, 홍커우구 문화재 당국은 이 신문의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문화재보호법 등의 관련 규정에 따라 허가 없이 해당 문화재를 함부로 이동하거나 철거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향후 철거 논의가 재기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보존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이 남중국 침략을 목적으로 해병대를 동원해 일으킨 제1차 상하이 사변은 어느 정도는 이봉창 의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홍인근 국제한국연구원 연구위원의 <이봉창 평전>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만주사변으로 인해 증폭된 중국 국민의 항일운동을 더욱 고조시켜 1·28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됐다"며 이렇게 서술한다.
 
일본은 중국 국민의 항일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상해에서 중국인을 매수하여 일연종(日蓮宗)의 일본인 승려를 한낮에 노상에서 살해하는 사건을 조작하고, 이 사건을 구실로 이봉창 의사 의거가 있은 지 20일 후인 1932년 1월 28일 상해 주둔 해군 육전대(해병대)로 하여금 중국의 19로군(路軍)과 전투를 벌이게 했다.

이봉창 의거로 확산된 항일감정에 대응하는 측면도 있었던 이 상하이 사변 뒤에 일본은 아치형 창문을 둔 서양식 2층 건물에 다이살롱 위안소를 설치했다. 장교들이 이용하는 이곳은 일제 패망 때까지 성착취 현장으로 활용됐다.

일본의 중국침략 전진기지 중 하나가 된 상하이에는 이런 위안소가 많았다.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가 최근 언론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확인된 위안소는 현재까지 172곳이다. 이 숫자만 놓고 봐도 이곳에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위 센터가 전한 바에 의하면, 현재까지 중국대륙에서 확인된 위안소는 총 1127곳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 중국대륙이고 상하이 한 곳에만 172곳이 있었다는 점은, 중국 내 위안소의 실제 숫자가 1127곳보다 많았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중국 내 위안소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한국인도 많았다. 한국인이 훨씬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의 성병 감염 실태에 관한 조사 보고서가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요시미 요시아키 츄오대학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은 "군 위안부의 민족별 구성도 일본인이 아닌 타민족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 대본영 육군부 연구반이 1940년에 작성한 조사보고 '지나사변 관련 군기풍속 견지에서 관찰한 성병에 대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라고 한 뒤, 지나(중국)에서 감염된 일본 병사의 상대 여성 국적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위안부들의 국적을 추정한다.

물론, 감염된 일본 병사가 반드시 위안부와 접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군 지도부가 위안부들과의 접촉을 권유했으므로 병사들이 상대한 여성은 주로 위안부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상대방 여자가 모두 위안부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위안부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요시미 교수는 추정한다.

요시미의 책에 인용된 일본군 대본영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에 중국에서 감염된 일본 병사는 1만 4757명이다. 이들이 만난 여성들 중에는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한국인이 51.8%, 중국인이 36.0%, 일본인이 12.2%였다. 이 비율은 현재까지 확인된 1127곳의 중국대륙 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일했던 여성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한국인이었을 가능성을 추정케 한다.

중국 내 위안소의 한국 여성들

일본군이 한국 여성들을 얼마나 많이 동원했는지는, 상하이에서 자동차도로로 서남쪽 약 330킬로미터 떨어진 저장성 진화시(절강성 금화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작성된 <금화계림회 회칙 및 명부(金華鷄林會 會則及名簿>가 그 증거다.

전쟁 중인 1944년 4월 작성된 이 자료는 금화 지역에 거주했던 계림회 회원들의 명단을 담고 있다. 청나라 정부가 발행한 <만주원류고>에서 '계림은 신라의 별칭이며 신라의 일시적인 만주 점령으로 길림(吉林, 계림과 중국 발음 같음)이라는 중국 지명이 생겼다'라는 취지로 설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계림은 중국에서 신라인 즉 한국인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진화시의 계림회는 한국인들의 동향 모임이었던 것이다.

이 명부를 분석한 상하이사범대학의 수즈량(蘇智良)·첸리페이(陳麗菲) 교수의 논문 '중국 금화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는 "여기에 기록된 200여 명의 명단에는 당시 일본 침략군이 금화 지역에서 위안부 즉 성노예 제도를 건립한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2018년에 <한국학 연구> 제49집에 수록된 위 논문은 "문헌 연구와 현지조사를 거쳐 이 명부에 11개의 위안소 및 위안소 업주 8명, 관리 인원 7명, 위안부 126명의 명단이 기록되었음이 확인된다"고 말한다. 성노예와 관리직원 및 업주까지 합하면, 141명이 위안소 종사자였다는 것이다.

계림회 명부에 위안소 업주로 명시된 경우도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명부상으로만 보면 '위안부 126명'이 도출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결론이 나왔다.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화의 조선인 210명 가운데 100여 명의 나이가 20세부터 30세 전후이며, 이름으로 보아 틀림없이 여성으로 인식되는 사람들 중 직업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가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바, 이는 소홀함으로 인한 누락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30세 안쪽의 여성으로 보이면서 직업이 명기되지 않은 회원들이 전체 회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금화에 가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이들의 주소지다.
 
명부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 부류의 여성들은 기본상에서(기본적으로) '현재 주거지'란에 한 무리씩 집단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집단 주거지 주소는 '위안소 업주', '국수주(菊水主)', '금천관주(金泉館主)' 등으로 직업을 기재한 자들의 주소와 동일하다. 즉 그들은 명확히 규정된 위안소 또는 국수루(樓)·금천관 등의 꽃별명을 가진 위안소들과 종속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직업이 표기되지 않은 여성들은 동일 주소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주소는 위안소 소재지나 위안소 업주의 주소와 일치했다. 이런 여성들이 126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금화를 점령한 시점은 1942년 5월 18일이다. 그 뒤 벌어진 현상 중 하나가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집단 이주였다. "그 후 일본군의 사주 아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들도 분분히 금화 지역으로 몰려와서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며 "1945년 초에 이르러 금화 지역에서 생활하는 조선인들은 적어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1944년 4월 금화에 거주한 한국인 210명 중 126명이 성노예 피해자로 보인다는 사실은, 나머지 사람들의 상당수가 일본군의 성착취와 관련된 이유로 금화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위해 얼마나 체계적인 준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이살롱 같은 중국 내 위안소는 중국인들이 겪은 피해와 관련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들이 겪은 피해와도 관련된 곳이다. 다이살롱처럼 이미 확인된 위안소를 보존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위안소를 새로 발굴하는 일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절실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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