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1 18:35최종 업데이트 21.04.1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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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왼쪽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1936년) ⓒ 몽양기념사업회

 
해방공간은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분점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중에도 상당히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한 한국인 지도자가 있었다. 외국 군대의 주둔으로 독립운동가 출신의 지도자들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여러 달 동안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38선 이북의 고당 조만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우고 한반도 전역의 최고지도자로 급부상한 몽양 여운형은 9월 8일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급격히 약해졌다. 이때부터는 더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38선 이남에서도 최고지도자가 아니었다.


한편, 38선 이북의 조만식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는 이북 전역을 포괄하는 단일 기구의 리더는 아니었다. 38선 이남과 이북이 군사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그는 이북의 중심지인 평양을 거점으로 뒀다. 그래서 이북의 최고 지도자로 여겨질 수 있었다.

여운형과 달리 조만식은 외국군 주둔 후에도 기존 지위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그의 영향력은 그해 11월 3일 만든 조선민주당이 창당 3개월도 안 돼 50만 당원을 확보한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해방 이틀 뒤 평양에 도착한 조만식은 이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평남 건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다. 평남 건준은 38선 이북의 건준 지부들과 형식상으로는 대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앞서 있었다. 평양에 거점을 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남 건준이 평안남도에서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남 건준보다 위상은 떨어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 존재했다. 현준혁이 이끄는 이 그룹은 훗날 남로당 지도자가 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조공)을 따르는 집단이었다.

장규식 중앙대 교수의 <민중과 함께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가 현준혁·김용범·박정애·장시우 등이 중심이 되어 8월 17일 조직"됐다면서 "소련군의 진주 이전에는 세력이 미약하였다"고 말한다. 그런 현준혁의 평남 조공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조만식 그룹과 경쟁하고 있었다.

소련과 4개월 만에 파국

이처럼 해방공간에서 38선 이북의 최고지도자였던 조만식은 임오군란 이듬해인 1883년 2월 1일(음력 12월 24일)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평양 서남쪽 강서군의 창녕 조씨 집성촌에 기반을 뒀다. 조선시대의 집성촌은 양반 가문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였다. 이 집안도 양반 가문이었다.

강서군의 창녕 조씨 집성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유학을 숭상해온 양반 집성촌이 신문명을 앞장서 수용했던 것이다. 이 점은 훗날 조만식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기독교 운동을 동시에 수행한 사실과 더불어 소련 공산주의와 거리를 뒀던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움이 될 또 다른 요인은 아버지 조경학의 '이중생활'이다. 조경학은 중소 규모의 지주이자 위탁판매를 하는 상인이었다. '지주이자 상인'인 양반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27세 때인 1920년에 조만식이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란 구호를 외치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펼친 배경을 가늠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서당과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세이소쿠 영어학원과 메이지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한 조만식은 32세 때인 1915년 오산학교 교장이 되고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민족운동 지도자로 부각됐다. 이런 이력을 거쳐 62세 때인 1945년 평남 건준 위원장이 됐다.

남쪽의 여운형이 경험했던 것처럼, 조만식도 건준의 한계를 체험했다.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군정이 볼 때도 건준은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조만식은 현실을 받아들여소련군정의 존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역에서 소련군 환영식을 한 다음 날인 8월 27일, 그는 소련군의 영향 아래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합쳐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했다. 정치위원회로 하자는 건준과 인민위원회로 하자는 조공의 의견이 절충돼 '인민정치위원회'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평남 조공은 소련군의 등장에 힘입어 평남 건준과 대등한 통합을 이뤘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조만식은 위원장, 현준혁(39세)은 공동부위원장이 됐다. 또 다른 공동부위원장 직은 조만식의 절친한 동지이자 건준 쪽인 오윤선에게 돌아갔다.

소련군정 및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체제에서도 조만식은 여전히 한국인 중의 최고지도자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인 중에서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대리인인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 소련 제1극동방면군 제25군 사령관이 거대한 장벽처럼 조만식의 앞에 서 있었다.

조만식보다 17년 뒤인 1900년 태생인 치스차코프는 18세 때 병졸로 적군(赤軍)에 입대해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로를 세웠다. 그런 그가 조만식과는 비교도 안 될 거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해방공간에 출현했다. 해방공간에서 조만식이 좀 더 신경 써야 할 대상은 김일성이 아니라 치스차코프였다.

하지만 치스차코프가 일방적으로 유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평양을 점령한 치스차코프가 조만식의 평남인민정치위원장 취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11장에서 1945년 하반기의 소련군정은 북한 정치의 상층부만 장악한 상태였다고 설명한다.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물리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1945년 8월에서 12월까지는 북한의 최고 수준의 직위만을 차지하거나 관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민위원회·농민조합 및 노동조합들이 모든 곳에서 결성되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색채는 비록 좌익으로 향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기 천차만별이었다.
 
소련 군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기에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조만식과 치스차코프의 관계는 힘이 후자 쪽으로 크게 기울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경쟁 양상을 띨 수 있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우)이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중)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좌)도 입회하였다. ⓒ 위키백과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괜찮은 편이었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의 <북한의 역사> 제1권은 평양역 환영식 뒤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와의 첫 만남에서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를 물었고, 치스차코프는 '소련군이 온 목적은 조선 해방'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련군의 호의를 믿은 조만식은 이들에게 협조했다. 소련군은 조만식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와 협조하며 주둔 정책을 펼쳤다.
 
조만식의 권위를 인정해주며 기분 좋게 출발했던 이 관계는 불과 4개월 뒤에 파국을 맞는다. 조만식이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표명한 뒤인 1946년 1월 5일,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8월 26일만 해도 조만식의 심기를 배려해야 했던 치스차코프가 4개월 10일 정도 지난 뒤에 그 심기를 무시해도 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변한 데는 김일성이 신속히 입지를 구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산주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팽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들이 조만식 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파 민족주의자의 한계

우선 1945년 9월의 사건을 간과할 수 없다. 조만식과 현준혁이 회의를 마친 뒤 자동차를 함께 타고 갈 때 발생한 사건이었다. 자동차가 200미터쯤 움직였을 때 길목에 서 있던 공산당원이 운전사에게 눈짓을 했고, 자동차 속도가 늦춰지자 요원은 차창으로 접근해 권총 2발을 쐈다. 2발 다 현준혁을 겨냥했다.

현준혁은 박헌영 노선을 따랐지만 조만식과도 협조했다. 그래서 조만식과 공산당의 창구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현준혁이 암살됨으로 인해 조만식은 인간적 아픔을 겪는 것과 더불어 공산당과의 창구 하나를 잃게 됐다.

소작제 및 토지개혁 문제가 조만식의 리더십에 끼친 파급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한 갈등이 1945년 10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격화했다. 공산주의 그룹은 지주가 수확물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부조리를 근절하고자 '소작인 7 대 지주 3'의 7·3제(흔히 3·7제)와 더불어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 아래 토지개혁을 관철하고자 했다.

조만식과 비슷한 배경에서 성장한 우파 민족주의 그룹은 무상몰수·무상분배는 물론이고 7·3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이 서울도 아닌 평양에서 용납될 수는 없었다. 조만식은 파국을 막지 않으면 안 됐다. 결국에는 그의 중재로 7·3제만 수용되고 무상몰수·무상분배는 보류됐다.

이 논쟁은 조만식의 중재력을 부각하기보다는 그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공산군대의 점령하에서 지주·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그의 입장을 노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민족주의자들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이탈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이들이 38선 이남으로 망명하는 사태로 연결됐다.

위의 조만식 전기는 "이 일이 있은 뒤 가장 절친한 동지였던 오윤선 장로가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사실상 사퇴하고 우파 위원들이 하나씩 월남하면서 고당은 점차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11월 24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명칭에서 '정치'가 떨어져나간다. 좌우합작기구에서 좌파 기구로 바뀐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만식은 정치적 자산들을 대거 상실했다. 그런 상태에서 1945년 12월 말 이후의 신탁통치 정국을 맞아 외롭게 반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치스차코프가 자신을 연금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숙청된 조만식은 장기간의 연금과 함께 잊혀 가는 존재가 됐고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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