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5 18:43최종 업데이트 21.03.2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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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달라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노랫소리에 맞춰 제식 훈련하듯 거리 청소를 하고 비료 포대를 나르던 그 옛날의 새마을운동이 아니다. '생명, 평화, 공경'의 가치를 내걸고 기후위기, 생명의 위기,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헤쳐 나가자고 새마을운동이 전면에 나섰다. 전국 228개 시군구 단위의 지회조직에 200만 명 이상 회원을 가진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생태운동 조직으로 '대전환'의 길을 결의했다. 취임 3년 만에 새마을운동을 생명살림운동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이 정성헌(75) 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이다.
 

정성헌 선생은 지난 3년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 봉직하면서 ‘생명살림, 평화나눔, 공경문화’로 새마을운동의 대전환을 선포하고 전국 새마을운동 기층조직에서 자발적 생명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 ⓒ 와글

  
2018년 3월 취임한 정성헌 회장은 관사가 있는 경기도 성남시 소재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을 살아있는 생태체험장으로 만들었다. 주차장을 걷어내어 각종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밭을 일구고, 숯가마와 연못을 만들었다. 유기농 밭 위에 친환경 부품으로 만든 태양광 패널을 세우고, 이산화탄소 분해능력이 일반식물의 10배 이상인 친환경식물 양삼(케냐프)밭을 조성해 양삼심기운동의 표본실로 삼았다. 취임 직후부터 110일간 전국의 새마을 지도자들 3천여 명을 차례로 만나 교육과 토론을 거듭하며 '새마을운동 대전환'에 대한 중앙이사회의 전체 결의를 끌어냈다. 새마을운동의 모토로 불리는 '근면, 자조, 협동'의 자세로 하되, 그 궁극의 목표와 가치는 '생명, 평화, 공경'의 세상을 만드는 데 두자는 그의 주장은 새마을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3년 임기 후 연임이 당연시되던 그가 지난 2월,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자의로 물러난 것이 아니니 사실상 해임이나 다름없다. 2019년 대의원총회에서 의결한 제2차 새마을 대전환 사업(2022년~2024년) 추진계획도 이제 그의 손을 떠났다. 그가 애써 씨 뿌린 사업들은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지난 3년간 새마을운동의 경이로운 변화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우려와 탄식을 표했지만, 정성헌 전 회장은 정작 태평하고 담담해 보였다. 이제 곧 나무 심을 철이 되니 원래 기거하던 강원도 인제군의 DMZ 평화생명동산으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 부랴부랴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지난 11일, 경복궁 옆의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나 여섯 시간에 걸쳐 긴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 중인 정성헌 전 회장과 이진순 와글 이사장 ⓒ와글 ⓒ 와글

  
명패 없이 심은 기념 식수 천 그루

- 갑작스레 물러나신 것에 대해 충격과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력이 없어 밀려난 거지(웃음). 정치검법에 무심검법(無心劍法)으로 대응하다가 졌어요."

- 새마을운동 안에서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던데요.

"얘기하다 우는 사람도 있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날 좋게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모처럼 두 발로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게 꺾였다는 무력감이나 좌절감 때문인 것 같아. 실무자들한테 '우리가 변화를 만들기로 했는데 뭐가 변했냐?'고 물으니까 그래요. '전에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기후위기고 뭐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라고."

- 스스로 주체라는 자부심이 생겼군요.

"예전엔 누가 '어디 근무하냐?' 물어서 '새마을 중앙회 다녀' 대답하면, '그게 아직도 있어? 거기서 뭐하는데?' 한대요. 그럼 '그냥 밥이나 먹자' 하면서 말을 돌렸었는데, 이젠 자꾸 설명을 하고 싶어진다더군. 기후위기가 어떻고 생명 위기가 어떻고. 그러면 대부분 '아, 좋은 일 하네.' 그런대요. 새마을운동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내부적으로도 있었는데,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그런 자부심이 생긴 거죠."

- 3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어떻게 그런 변화를 이루신 건지 궁금합니다.

"스스로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거든. 보통 개혁주의자들은 마음이 급하잖아. 개혁이란 단어에 얽매여서 개혁, 개혁 하면, 겉으로만 말을 듣지 속으론 승복을 안 해요. 논리로만 해서 통하는 거면 세상이 벌써 천국이 다 되었게? 내가 3월에 취임했는데 보통 4월에 나무를 심잖아요. 역대 회장들이 기념식수 해 놓은 게 있어요. '회장님, 기념식수 안 하세요?' 묻길래 '해야지' 그랬어요. 근데 방식이 다른 거지."

- 어떻게 달라요?

"보통 기념식수는 향나무나 주목 같은 거 몇십만 원짜리 한 그루 사다가 구덩이 파놓고 두 삽 퍼서 덮으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하잖아요."

- 하얀 장갑 끼고 나무 옆에 이름 적힌 명패 박고 사진 찍고요.

"내가 나무를 좀 아는데, 20~30년생 된 나무를 옮겨 심으면 새로운 토양에 적응하느라 한 2년간 나무가 몸살을 앓아요. 이산화탄소 흡수를 제대로 못 하는 거지. 근데 작은 나무를 심으면 빨리빨리 크느라고 CO2 흡수량이 커지거든. 나물이나 약으로 쓸 수 있는 2천~3천원 짜리 묘목들이 좋은 게 많아요. 큰 소나무 한 그루에 1억씩도 하는데, 작은 거 천 그루를 심는 데 이백만 원이면 돼. 게다가 작은 나무는 작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죠. 큰 나무는 중장비 회사가 다 하는 거고."

- 그래서 직접 직원들과 천 그루를 심으셨어요? 명패는요?

"안 하지. 세울 필요가 없지(웃음). 자기 이름 남겨서 뭘 하게? 그냥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건데."

- 관사에서는 혼자 생활하셨습니까? 식사는 어떻게?

"아, 내가 해 먹지. 집사람이 가끔 오긴 했지만 밥하는 덴 내가 도가 튼 사람인데. 인제에 있을 때도 손님 오면 내가 밥해줘요. 직접 기른 채소나 산나물 뜯어다가. 우리 교육 방침 첫 번째가 '좋은 밥을 대접해야 한다'거든. 좋은 밥을 대접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 통한다고." 
 

정성헌 선생은 정성스런 밥상으로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70대의 나이에도 손수 나물을 캐고 채소를 다듬어 부인에게 줄 밥상이나 손님상을 차려내곤 한다. ⓒ 와글

  
정성헌 선생은 재직기간 동안 제공되는 관용차를 거부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업무상 꼭 필요할 때는 직원들과 업무용 승합차를 같이 타고 다녔다. 장거리 출장을 갈 때면 직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다.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부임했을 때에도 관용차를 반납하고 차관급 연봉 9700만원 가운데 2400만원만 남기고 나머지를 반납했다. 2009년부터 맡아온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직도 연봉을 거부한 채 지금껏 무급으로 봉직해 왔다.

운동의 기본은 '스스로 하게 하는 것'

- 2018년 새마을중앙회 회장으로 부임하시고 3년 임기 동안 새마을운동의 좌표를 놀랍게 바꿔놓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낫지, 헌 부대에 새 술을 담는 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요.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면 술맛이 더 좋을 수도 있지 뭐(웃음). 2018년 내가 선임될 때 새마을 지도자들의 제일 절실한 건의가 뭐냐면, 대통령이 새마을대회나 우리 새마을중앙회를 한번 방문하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수락 연설할 때 그런 얘길 했어요. '우리가 좋은 운동체가 되어서 대통령이 스스로 여길 방문하고 싶게 만들어야 옳지, 내가 청와대 아는 사람 있다고 교섭해서 오게 하는 건 올바른 게 아니다. 난 여기 일하러 온 사람이지, 대의원들한테 아부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 그랬더니 박수가 우레와 같이 나왔어요. 그때 직관적으로 깨달았지. 가고자 하는 길을 충분히 협의하면 진짜 대화가 되겠구나 하고."

- 기존의 조직을 일신하겠다고 할 때 기관장들이 제일 먼저 쓰는 전략이 인사관리입니다. '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자기 사람들을 대거 발탁하고 말 안 듣는 사람을 좌천시키는 것. 대개 그런 식으로 권력을 사용하죠. 교육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추출하는 건 너무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새마을운동은 50~60대가 주력이고 75%가 여성이에요. 보통사람들도 기후위기나 이런 게 문제라는 건 알아요. 그걸 자기 언어로 정리를 못 해서 그렇지. 그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해요. 보통 신임회장이 취임하면 대표 구호를 새로 내다 걸어요. 내가 오기 전에 걸려 있던 구호가 '나의 피와 땀을 조국과 마을에' 였다고. 취임하고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 말 안 하니까 직원들이 물어봐. '회장님, 이거 바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대답이 '그걸 내가 왜 바꿔? 바꾸려면 당신들이 바꿔야지.' 그랬더니 직원들끼리 궁리해서 새로 짜오더라고. 그래야 자기 것이 되지."

- 오랫동안 관변화된 조직으로 타성에 젖은 문화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해서 내부 혁신이 가능한가요?

"뭘 바꾸려면 현장의 주체적인 노력, 중간층의 촉성(促成)작업, 그리고 중앙의 지도력, 이 세 개가 합쳐져야 해요. 취임 8개월 되었을 때 '현장을 이해 못 하면 어떻게 운동이 되겠냐? 전부 현장에 나가서 실태조사를 해봐라' 했어요. 전국 950개 지역에 나가서 실태조사를 해보니 '생명평화공경운동으로 대전환하길 잘했다'는 평가가 80% 나왔어요. 근데 그것만으로 운동이 되진 않아요. 현장 회원들이 충분히 자기 언어로 이해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전파할 수 있어야지. 그래서 3개년 계획으로 '생명살림 현장강사'를 2천 명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새마을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돈 내고 와서 배우라 했지. 미리 교재 나눠주면서 각자 교안을 만들어 와서 2박3일 동안 10만 원씩 내고 교육받도록 했어요. 거기서 통과 못 하면 탈락이고."

- 조직원들한테 자기 돈 내고 와서 교육받으라고 하는 건 이례적인데요.

"자기가 절실히 필요해서 교육을 받고 싶다고 와야 성공이지, 그냥 시장, 구청장이 오라고 해서, 가면 대우해주고, 그래서는 교육 효과가 없어요. 우리 교육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떨어졌어요. (책을 들어 보이며) 화가 나서 이 책을 120번을 읽었대(웃음). 그러니까 알겠더래요. 기후위기가 뭐고 이걸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그게 진짜 운동가로 바뀌는 과정이지. 지금까지 그렇게 1200명이 교육받고 1000명 넘게 강사 자격을 얻었어요. 그 사람들이 현장에 가서 1년에 5회~20회를 교육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했어요."
 

생명살림강사 양성을 위해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만든 교재 중 하나. <2020 대전환-생명, 평화, 공경의 새 세상>이란 제목의 만화책으로 꾸며서 누구나 읽기 쉽게 만들었다. ⓒ 와글

  
- 조직원들의 자발적 열의로 운동을 이끌어 가는 건, 지금 시민단체들에게도 큰 과제입니다.

"직접 해봐야 주인의식이 생기고 실력이 생기는 거지, 남이 해줘선 안 돼요. 우리 농촌이 안 되는 게 마을발전계획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는 거거든. 밤낮 남이 해주지. 기획도 남이 해주고 자본도 기술도 바깥에서... 자기가 하는 건 품파는 것밖에 없어요. 시민운동 출신 기초의원이나 단체장들도 그 이상을 안 해요. 내가 군수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의 핵심이 뭐냐?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똑똑하고 훌륭하게 되는 것'이에요. 소득증대가 목표가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좋은 심성과 지식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건 돈도 얼마 안 들어요. 그리고 오래 가지."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생각으론 안 돼

- 새마을운동이란 오래되고 거대한 조직을 바꾸는 게 가능한 거라면, 늘 문제라고 지적되어 온 공직사회 전반의 관료주의를 없애고 혁신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난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아요. 사람들 대부분은 상식적이고 괜찮아요. 아주 뛰어난 사람, 아주 못된 놈도 있지만 그건 다 소수지. 대국착안(大局着眼) 소국착수(小局着手)라는 말이 있어요. 생각은 크게 하고 실천은 구체적으로 하라고. 안 되는 일을 자꾸 내세우지 말고, 되는 일을 중심으로 1/3이 '가자!' 하면 중간층 1/3이 '아, 이거 되는구나' 해서 따라오고 그렇게 해서 2/3가 주류가 되게 해야지. 그게 실사구시이고 정도실천이야. 안 듣는 1/3을 혼내려고 '적폐청산'이니 뭐니 하면 일이 안 되죠. 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는 올바르고 상대는 틀려먹었다고 해선 아무 일도 못해요."

- 선생님이 쓰신 <현장에서-평화, 생명, 통일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좌우 양극단을 배제하고 역동적인 중도통합의 길'로 내부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쓰셨더군요. 많은 이들이 중도를 얘기하는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중도란 뭡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변비중(離邊非中)이죠. 양극단 변두리를 떠나되 기계적 중립은 아니란 얘기예요. (책의 양옆, 책등과 책배를 가리키며) 극좌와 극우는 서로 반대편을 못 보고 자기 앞쪽만 보는 거지. (책 표지 위를 쓰다듬으며) 여기 있으면 전후좌우 다 볼 수가 있어요. 중도라는 건 기계적으로 가운데라는 말이 아니고 가장 올바른 길이란 뜻이에요. 진리의 길은 자기 스스로 양극단에서 해방되었을 때 조금씩 보이는 것이지 한 가지로 규정할 수가 없어요."

- 지금 한국 정치는 양쪽 극단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를 가지고 다투는데, 내가 볼 때는 상식에서 어긋나는 논쟁이에요. 기본은 작은 정부, 큰 정부가 아니고, '유능하고 좋은 정부'예요. 기본에 충실할 생각은 않고 자꾸 방편만 가지고 얘기하니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근대화나 민주화나 지금까지는 '따라잡기'형 압축성장 동원전략이었지. 지금은 미국이고 일본이고 따라잡을 데가 없으니까 우리가 방향을 잡고 나가야 해요.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게 정치세력이고. 근데 87년 이후론 그런 정치세력이 없어 보여요. 지금 문명으론 절대 안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문명이 되어야 한다는 걸 국민의 7할 정도는 대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힘이 나오는데."

운동과 삶이 분리되면 안 된다

정성헌 선생은 1946년생으로 춘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 입학해서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운동에 참여해 내란죄로 구속된 이후 민주화운동과 가톨릭농민회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 평화생명운동에 헌신해 왔다. 1998년 강원도 인제군에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조성을 제안해서 2009년부터 현지에 상주하며 한해 5천~6천 명에 이르는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생명과 평화에 대한 체험교육을 진행해 왔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한국 DMZ평화생명동산(환경부, 강원도, 인제군 협력사업)의 숙소와 교육동 전경 ⓒ DMZ평화생명동산

 
- 60년 가까이 한국의 현대사 길목마다 중요한 족적을 남기셨는데, 지금껏 변변한 회고록이나 평전에 해당하는 자료가 없더군요. 선생님이 쓰신 책 뒤에 실린 연보도 그간 활동에 비해 너무 간략하고요. 그간 4번의 옥고를 치르고 6번의 재판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던데, 어떤 사건들이죠?

"(손사래를 치며) 에이, 그거 재수 없어 간 거지. 뭐 대단한 거라고. (웃음)"

- 이제 다시 인제의 DMZ평화생명동산으로 돌아갈 거라셨는데, 거기가 뭐하는 뎁니까?

"평화와 생명을 체험하고 교육하는 곳이에요. 여기가 남한과 북한의 식물이 만나는 아주 중요한 생태지역이고 북한의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어느 정권이건 DMZ 평화 어쩌구 말은 많아요. (남북정상회담 이후) 초소 몇 개 폭파한다고 해서 잠깐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난 그런 거 별로 믿지 않아요. 금방 또 지으면 그만인 걸 뭐. 진짜 평화가 되려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바뀌어야 해요. 그 지역을 아예 '평화생명특구'로 만들어서 주민들이 평화산업으로 먹고 살게 해줘야 진짜 평화의 기초가 닦이는 거지."

- '평화'에 '산업'이란 말을 붙여서 쓰는 건 처음 들었어요. 평화산업이 가능한가요?

"(그림을 그리며) 여기 군부대가 있다. 그럼 주변을 태양광발전을 하면서 그 아래 생명산업을 유기농으로 한다. 그래야 군대와 주민 사이에도 평화로운 공생관계가 생길 거 아니야? 거기 지명도 서화(瑞和: '상서로운 평화'란 뜻)면인데 하늘이 주신 생명자원을 가지고 평화롭게 쓸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내고 그게 삶의 양식이 되었을 때 북한에 너희도 이렇게 해라 제안할 수가 있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갈라서지 않고 생명을 살리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게 진짜 평화예요."
  

DMZ평화생명동산 부지 안에 있는 오래된 탱크에 천지인을 뜻하는 색동색을 입혀서 평화의 상징물로 재창조했다. 채색작업에는 서화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서화노인회, 인근 포병부대원들, 그리고 탈북민들이 함께 참여했다. ⓒ DMZ평화생명동산

 
어떤 이에게 땅은 재산증식과 지위세습의 수단이지만, 그에게 땅은 모든 생명의 보고이며 평화의 터전이고 섬김의 대상이다.

- 선생님 책에서 '한국인의 얼을 가진 지구촌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나 '생명을 살리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이 퍽 놀라웠어요. 그 연세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운데요.

"5월 광주사건이나 87년 단일화 실패를 겪으면서 진짜 많은 좌절과 반성을 했어요. 우리도 잘못한 게 있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해야지.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이 없이는 목표와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요. 운동과 생활이 분리되면 안 돼요."

-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촛불집회 때 내가 세 번을 인제에서 와 봤어요. 광장을 다녀보면 참 대단하더군. 폭언 한마디 없이 평화롭고 남을 배려하고 질서가 없는 것 같은데 질서가 있고. 근데 집에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타면 그렇게 대단했던 공중(公衆)의 모습은 싹 사라지고 다들 스마트폰 꺼내서 30분씩 떠들더라고. 난 그 두 개가 모두 촛불의 모습이라고 봐요. 하나만 가지고 칭송하는 건 맞지 않아. 운동은 '스스로, 함께, 꾸준히' 하는 근사한 일입니다. 헬조선이란 말을 쓰는데 한국이 지옥 같다면 적극적인 사람은 들고일어나 고쳐야지. 소극적으로 헬조선이라고 욕하고 댓글이나 쓰고 그러면 나보다 더 늙은 사람이지. '야, 이놈들아, 정신 차려!' 하고 싶어져요. 이렇게 말하니 내가 인기가 없지. (웃음)"

정성헌 선생은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새로운 문명을 주장한 사상가이자, 현장과 지역, 상식과 실용을 내세운 탁월한 대중운동가이다. 그 이후로 그를 대체할 만한 사상가이자 현장실천가를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그의 책을 다시 펴들었다. 구어체로 평이하게 써 내려간 글들이 죽비처럼 매서웠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운동인데, 사람의 변화를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를 무너뜨릴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입니다... 운동은 사회를 변혁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개인도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 정성헌 저, <현장에서-평화, 생명, 통일이야기> 중에서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진순씨는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으로, 와글 간행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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