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6 07:22최종 업데이트 21.03.2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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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투기 사태는 한국토지주택공사 임직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국가권력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직자나 공기업 임직원들이 부동산을 통한 돈벌이에 나서도록 조장한 것은 다름 아닌 역대 정권들이다.

첫 단추를 끼운 것은 미군정, 그 다음은 이승만 정권이었다. 이들은 적산 혹은 귀속재산으로 불리는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헐값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지지 세력의 환심을 샀다.


2004년 2월 <역사비평>에 실린 장상환 경상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부동산 투기'는 "남한에 진주한 미국은 자신에게 협력할 자본가 계급을 육성하기 위해 귀속 재산을 헐값으로 불하했고, 미국 후원 하에 성립한 이승만 정부는 이 정책을 계승했다"라고 말한다.

그런 뒤 "이승만 정부 수립 후 10년 사이에 26만 3774건, 44억 3700만 원이 처분되었는데, 공대지·부동산·주택 등이 24만 7810건으로 93.7%를 차지하고, 금액으로는 귀속 기업체가 22억 4500만 원, 부동산이 21억 7600만 원으로 절반씩을 차지했다"고 설명한다.

특혜 불하한 부동산이 전체 적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건수 기준으로 93.7%, 금액 기준으로 절반 정도였다는 것이다. 부동산을 사실상 거저 얻어 곳간을 늘리는 방식을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도 조장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쪽 땅을 사모으지"

박정희 정권은 한술 더 떴다. 1970년대 서울 강남 개발로 상징되는 부동산 투기 붐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정권 핵심부가 직접 투기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이 점은 박 정권 후반기인 1970~1977년에 서울특별시에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역임한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라는 요직을 지낸 그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제3권에 따르면, 박정희의 1971년 대통령선거 자금 일부도 부동산 투기를 통해 마련됐다. 부동산 정책 실무자를 비롯한 공무원들이 이 과정에 개입했고 이들도 이 과정에서 떡고물을 챙겼다.

손정목은 "아마 제3한강교가 준공된 1969년 12월 26일부터 약 한 달 정도가 지난 1970년 1월 말경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라며 이 이야기를 꺼낸다. 이 무렵 서울시장과 담당 공무원이 정권의 지시를 받고 벌인 일이 이야기의 소재다.

당시의 서울시장은 제14대인 김현옥(44세)이었다. 시장 재직 당시 그는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등의 도심재개발을 추진하고 서울 명동 지하도도 개설했다. 한강개발사업, 시민아파트 건설, 영동지구 토지 구획 정리도 그의 손에서 추진됐다.

그는 1970년 4월 8일에 벌어진 유명한 사건인 '와우 아파트 붕괴'에 책임을 지고 그날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하고 7일 뒤 시장실을 비웠다. 그 일이 있기 2개월 보름 전쯤이었다. 1월 말경 어느 날 오후 3시 무렵, 그는 윤진우 도시계획과장(당시 41세)을 호출했다.
 
(윤진우 과장이) 시장실에 들어가자 김 시장은 아무 설명도 없이 그를 차에 태워 용산에 있던 육군 헬리포트로 데려갔고, 거기서 헬리콥터를 함께 타고 과천·사당·서초·잠원·압구정·양재·내곡동을 거쳐 잠실·송파에 이르는 이른바 강남 일대를 선회했다.
 

경부고속도로 양재 나들목 양재 나들목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될 당시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이후 인근 지역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7년 9월에 설치되었다. 양재 나들목이 개통한 직후인 1977년 10월 1일 촬영한 사진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퇴근 시각이 가까울 무렵에 시장과 함께 강남 상공을 비행하게 된 윤진우 과장의 뇌리를 지배한 것이 있다. 김현옥의 지시 사항이 그것이다. '어느 지대가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판단해보라'는 지시였다. 김현옥 자신이 부동산 투기를 하기 위해 이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지시를 내린 이유는 이들의 다음 행선지에서 확인된다.
 
헬리콥터를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김 시장 승용차는 그 길로 바로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안에 있었던 박종규 경호실장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리사욕 없이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평가를 받던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당시 40세)이었다. 박종규는 윤진우에게 간단명료하게 질문했다. '헬리콥터로 돌아본 지역(과천·서초·강남·잠실)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윤진우는 지금의 잠실운동장 옆을 흐르는 탄천을 언급하며 설명했다.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 지역 일대가 가장 유망한 것 같다'고 그는 답변했다. 탄천 서쪽인 지금의 서울 강남구 일대를 지목한 것이다.

이 답변이 박정희 정권의 강남 땅 투기에 불을 붙였고 '강남 신화' 형성에도 역할을 했다. 윤진우의 말을 들은 박종규는 "그러면 그쪽 땅을 사모으지"라고 말했다. 지시성 답변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후, 윤 과장이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모으라'는 것이었다.
 
고태진한테서 자금을 받은 윤진우는 박 정권을 위한 토지 매입에 본격 착수했다. 공무원이 투기꾼으로 전락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윤진우는 등기 명의자를 박정희로 하지는 않았다. 조병순·윤유업·박민형 등의 명의를 차용했다. 윤진우는 꽤 신속하게 착수했다. "토지 매입은 1970년 2월 초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한 뒤 손정목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최초로 매입한 땅을 청주 대성학원 이사장 김준철 소유의 땅 약 4만여 평이었다고 (그 자신이) 기억하고 있으나, 그 매매계약서는 찾을 수 없었다. 매매계약서가 남아 있는 것 중에서 최초의 것은 1970년 2월 1일 김형목 소유 삼성동의 밭 1만 평이었고, 다음이 2월 3일 함경자 소유 대치동 임야 2만 평, 2월 5일 단사천 소유 삼성동 임야 22개 필지 6만 7232평, 2월 15일자 함경자 소유 대치동·도곡동 임야·전답 30개 필지 6만 9974평으로 이어지고 있다.
 
1월 말경 지시를 받고 2월 1일 무렵부터 대거 매입했다는 것은 윤진우가 그만큼 활발히 뛰어다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격 흥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수자들을 쉽게 만족시킬 만큼의 자금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정권 핵심부가 앞장서 부동산 투기

그런데 제일은행 전무가 준 돈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윤진우는 집권당 실세이자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에게서도 자금을 받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윤진우 자신이 '박정희 땅'을 사고팔아 자금을 불린 뒤 이를 토지 매입에 재투입했다.

그해 2월 초부터 5월 20일까지 그가 정권 자금으로 사들인 토지는 23만 7366평이고 투입 자금은 12억 7088만 원이었다. 2월 초부터 6월까지 쓴 금액은 20억을 훨씬 상회했다.

지금은 아파트 1채가 20억이 넘는 경우도 있지만, 1970년에 20억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해에 40평짜리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571만 원에 거래됐다. 이런 아파트 350채 이상을 살 수 있는 20억 이상이 5개월간 윤진우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현대·대림·동아건설 같은 대기업들이 중앙정부나 서울시 국장에게 돌린 명절 떡값은 10만 원 내지 20만 원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윤진우가 받은 돈은 대기업이 고위인사 1만 명 혹은 2만 명에게 돌릴 떡값에 해당했다.

윤진우의 활약은 윤진우 개인에게도 이익이 됐다. 정권 수뇌부의 관심을 받게 됐을 뿐 아니라 동원 자금의 3%를 '판공비'로 쓸 수 있게 됐다. 또 그해 5월 2일에는 도시계획과장에서 도시계획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그의 씀씀이에 관해 손정목은 이렇게 회고했다.
 
윤 과장의 호주머니에는 항상 10만 원짜리 수표 몇 장, 많을 때는 수십 장이 들어 있었다. 중앙도시계획위원회가 끝나면 으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의 안내로 공평동에 있던 요정 다성에서 술을 마셨으니 윤 과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윤진우에게 떨어진 것은 떡고물에 불과했다. 훨씬 더 큰 이익은 박정희에게 돌아갔다. "이 강남 토지 투기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통령선거에 대비해서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좀 마련해주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라고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는 말한다. 이렇게 조성된 목돈이 1971년 김대중-박정희 대선 경쟁 때 박정희 캠프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윤진우 한 사람만 박 정권의 투기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다른 시기, 다른 인물들의 활동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정권의 투기 규모는 훨씬 더 컸을 수밖에 없다.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을 개발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는 양택식 서울시장 ⓒ 서울역사박물관

 
이처럼 대한민국 부동산 투기의 주범 중 하나는 국가권력 자신이다. 재벌 대기업도 못지않게 했고 복부인들도 상당 부분 했지만, 누구보다 국가권력이 은밀하게 앞장을 섰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나 공기업 임직원들도 떡고물을 챙겼다.

대한민국은 정권 핵심부가 앞장서서 부동산 투기를 벌인 나라다. 투기를 근절해야 할 쪽이 그런 '모범'을 보였으니, 투기에 대한 국가형벌권의 위력도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LH 투기'를 비롯한 대한민국 부동산 투기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정권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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