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8 17:17최종 업데이트 21.03.2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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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삶은 그 자신의 의지나 능력뿐 아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기운에 의해서도 이끌렸다. 그가 만 19세 때인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과 서방세계가 분열됐다. 그때까지 영국·미국 등과 보조를 맞췄던 일본이 중국을 독점하려는 의도로 사변을 도발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서방과 척을 지게 됐고 이는 1945년 패망을 자초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

김일성이 일제의 주목을 받은 것은 17세 때인 1929년부터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시절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1997년 <한국사 시민강좌> 제21집에 기고한 '김일성의 소위 항일유격투쟁의 허와 실'은 "1929년 그는 일제 첩보 자료에 첫선을 보이게 된다"라며 이 해 가을 체포돼 생애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이 시기에 그의 항일투쟁이 일제의 주목을 받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일본과 서양이 서로 틀어지기 직전에, 그의 독립운동이 본격적 단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세계적 기운이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바뀌는 시기에 청년의 나이로 그 기운에 올라탄 것이다.

해방 이전에 그는 또 한 번 유리한 기운에 올라탔다.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의 간부였던 그는 일본군의 압박에 밀려 1940년 10월 23일 소련 국경 내로 진입해 소련과 협조체제를 구축한다. 이때 김일성과 함께한 세력이 훗날 북한 정부 수립의 4대 주역 중 하나인 만주파의 주축이 된다.

이 일은 김일성이 해방 뒤에 김원봉이나 김구와 다른 운명을 걷는 계기가 된다. 중국은 한국 독립군과 연합해 일본군 100만 대군의 발목을 대륙에 묶어놓음으로써 원자폭탄 2발 이상의 충격을 일본에 줬지만, 공산당과 국민당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해 1945년 이후에 미국·소련·영국·프랑스에 밀리게 됐다. 이 같은 중국의 운명은 막판까지 중국과 함께했던 김원봉·김구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에 비해 김일성은 해방 5년 전부터 소련과 함께했고 이는 해방 이후 그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 뒤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서울로 모여든 반면 김일성은 평양에 있었던 것이 김일성의 운명을 바꿨다'라는 설명도 어느 정도는 맞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그의 운명은 1940년에 이미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세계 기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그의 운명이 1940년부터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과 서방세계가 반목하는 기운이 1931년에 출현하기 얼마 전부터 독립운동을 본격화하고, 미국과 소련이 1945년에 세계질서를 양분하기 얼마 전부터 소련과 협조체제를 구축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북한 지도자가 되기 이전의 김일성은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기운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움직였다.

스탈린 사망 후 김일성에 도전장

그랬던 그의 앞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때가 있다. 한국전쟁 휴전 얼마 전의 일이었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의 원산항 귀국 얼마 전에 김일성을 면담하고 집권을 도와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74세를 일기로 1953년 3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쵸프)의 집권으로 이어지고,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서기장이 적대 진영과의 평화공존론을 제기하는 격변으로 연결됐다. 흐루쇼프는 이렇게 냉전 구도를 흔들 만한 외교 노선을 내세웠을 뿐 아니라, 스탈린 개인 숭배를 배격함으로써 1인 지배체제에 대한 경각심도 일으켰다.

이런 정세는 누구보다도 김일성에게 불리했다. 냉전을 기초로 집권한 그에게는 평화공존이 유리할 수 없었다. 개인 숭배 배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1인 체제를 상당히 구축해놓고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흐름이 다른 곳도 아닌 소련에서 생겨났으니, 1953년부터는 세계 기운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셈이다.
 

최창익 ⓒ wikipedia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일성에게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 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에도 언급된 옌안(연안)파 거두 최창익이 바로 그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만 22세의 김대중이 좌우합작 구호가 마음에 들어 참여한 정당이 바로 최창익의 당이었다. "신민당은 중국 옌안에서 돌아온 독립동맹 참가자들이 만든 정당인데, 김두봉·최창익 등이 전면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김대중은 말한다.

최창익은 김일성보다 16년 전인 1896년 함경북도 최북단인 온성군에서 출생했다. 1925년에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과 관계없어 보이는 곳에 '취직'했다. 29세였던 이 해에 그가 시작한 일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을 잡고자 제국주의의 천적인 공산주의에 뛰어든 최창익은 1928년에 체포되는 시련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고, 1942년에는 중국 내륙인 산시성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부주석에 취임했다. 전공인 경제학과에 맞는 자리는 해방 뒤에 찾아왔다. 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이 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열국장을 거친 그는 북한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 9일 재정상에 임명됐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내각의 공동 2인자에도 올랐다. 1952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 '북한 괴뢰정권 부수상 2명을 증가'는 11월 18일 자 인사 조치를 보도하면서 "재정상 최창익과 농업상 정일룡이 새로 부수상으로 임명되었는 바, 이로써 괴뢰정권의 부수상은 종래의 박헌영(외상 겸), 홍명희, 허가의(허가이)에 전기(前記) 2명을 합하여 5명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도부에 오른 그는 문제의 1956년에 김일성에 대한 일격을 준비했다. 국내파·만주파와 더불어 북한 정부 수립의 4대 주역인 소련파·옌안파 양대 세력이 그와 함께했다. 소련 귀화자 출신들인 소련파와 옌안 등지에서 투쟁한 옌안파는 흐루쇼프가 일으킨 태풍을 타고 김일성 공격에 나섰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의 <북한의 역사> 제1권은 소련 외교 문서에 근거한 백준기의 연구를 기초로, 최창익에게 김일성 공격을 건의한 사람은 소련대사 이바노프였다고 한 뒤 최창익과 소련파·옌안파의 목표와 관련해 "그들은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김일성을 당 위원장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다"라고 설명한다. 노동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김일성의 위원장직을 박탈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노동당 중앙위원장뿐 아니라 노동당 밑의 내각을 통할하는 내각 수상이기도 했다. 또 인민군 최고사령관도 겸했다. 최창익은 그 직책들 중에서 노동당 및 인민군 직책을 거둬들인 뒤 노동당 중앙위원장은 자신이 맡고, 최고사령관은 최용건이 맡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김일성은 오로지 내각 수상에만 전념하도록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스탈린을 끌어내린 소련과 보조를 맞춰 김일성의 위상을 떨어트리고자 했던 것이다.

김일성을 '1인'에서 '3인 중 1인'으로 끌어내리는 구상은 상당히 낭만적이었다. 군대 동원 없이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릴 계획을 세운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끌어내린 뒤 내각 운영에만 전념하도록 만들겠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도 그렇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버티고 있으므로 김일성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낭만적 계획을 세운 데는 그 직전 사례에 대한 믿음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2019년 3월호 월간 <북한> 기사 '소련 비밀자료 속 북한 인물들 : 이상조 주소련대사의 망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계획의 모델은 같은 해 4월 벌어진 불가리아 공산당 당수이자 수상인 벌코 체르벤코프 해임 사건이었다.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토도르 지프코프 제1비서를 비롯한 야권 세력은 스탈린주의자인 체르벤코프를 공격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전원회의는 당수로 지프코프를 선출했지만, 체르벤코프를 숙청하지 않고 수상에서 부수상으로 강등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야권 세력의 계획도 김일성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만 박탈하자는 것이었다.
 
최창익은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틈타 준비에 착수했다. 이 순방은 그해 6월 1일 시작돼 7월 19일 끝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동안에 중앙위원들을 포섭해두려 했던 것이다.

싱겁게 실패한 쿠데타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사진은 지난 2020년 8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제7기 제6차 당 전원회의 ⓒ 연합뉴스=조선중앙통신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됐고, 이 소식은 순방 중인 김일성의 귀에 들어갔다. "김일성은 조기 귀국하여 8월 2일 예정되었던 중앙위 전원회의를 8월 30일로 연기하며 사전에 대비했다"라고 <북한의 역사> 제1권은 말한다.

김일성이 조기 귀국한 데 이어 전원회의를 연기한 동기를 파악하지 못한 소련파·옌안파는 8월 30일 전원회의 때 공격에 착수했다.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이 회의는 본래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 결과를 듣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상업상 윤공흠이 갑자기 김일성을 독재자로 몰며 비판을 쏟아냈다. 최창익과 소련파·옌안파의 공격이 예정대로 개시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엉뚱하게 흘러갔다. 윤공흠은 단상에서 끌어내려졌고 그의 출당이 의결됐다.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이 김일성 편을 들었다. 최창익의 합법적 쿠데타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역사는 이를 '8월 전원회의 사건' 혹은 '8월 종파 사건'으로 부른다. 최창익 등은 분열을 조장하는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됐고 그해 만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창익은 소련에서 불어오는 기운을 타고 김일성 1인 체제를 막고자 했지만, 낭만적인 계획과 정보 단속 실패로 역공을 허용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반대파를 숙청할 명분을 제공했다. 그 후로 북에서는 파벌 단위의 김일성 반대 그룹이 더는 형성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김일성이 이 사건을 역이용한 것이다.

최창익의 이런 시도는 결과적으로 김일성 1인 체제를 확고히 해주고 말았다. 라이벌이 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연이 됐다.

최창익의 공격을 사전에 방어한 결과로 김일성은 자신의 운명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뻔했던 1953년 이후의 기운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운을 1931년 이후 및 1945년 이후의 기운처럼 매우 '요긴'하게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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