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9 13:54최종 업데이트 21.03.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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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전에는 검사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6월항쟁 이후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속에서 판사와 더불어 검사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런데 6월항쟁 이전에, 특이하게 검사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린 인물이 있었다. '반공 검사' 오제도가 그 장본인이다.

오제도는 5년 차 검사 시절인 33세 때 하마터면 경을 칠 뻔했다. 그는 1950년인 이해에 이승만 대통령의 라이벌로 몰려 잘못될 뻔했다. 그가 '큰 뜻'을 품은 것 같다는 '고변'이 이승만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젊은 검사가 큰 뜻을 품는 것은 지금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일왕(천황)의 지배가 끝난 지 5년밖에 안 되는 데다가 이승만이 대통령 직을 임금 자리처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뜻이 잘못하면 '역심'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의도치 않게 이승만과의 라이벌 구도로 엮인 것은, 좋게 표현하면, 그가 일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반공을 너무 악랄하게 하다 보니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를 때릴 뻔했다.
 

서울지검 부장검사 시절의 오제도 검사 모습. 그는 빨갱이 제조기로 알려졌다. 1951.9.9 ⓒ 연합뉴스

 
특별임용 후 반공 검사로 명성

1917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출생한 오제도는 상인인 부모와 기독교 신앙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 때 몰락한 이 집안은 아버지 때 압록강 너머 안동현에서 상업으로 기반을 잡은 뒤 1935년 무렵부터 신의주에서 대규모 상점들을 경영하는 갑부로 발전했다.

이런 배경과 그 자신의 노력에 힘입어 그는 와세다대학에 유학하게 됐고,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게 됐다. 일본인 법관이 재판했으므로 법정에 통역생이 필요할 때였다.

그런 그에게 8·15 해방은 행운이었다. 그의 처지에서 해방은 직장 상사들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미군정은 일본인 법조인들을 해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로 인해 판·검사가 부족해져 서기 출신들의 특별 임용이 확대됐기 때문에 오제도 같은 서기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쉬움'을 주는 행운이었다. 그가 법원 서기의 판·검사 특별임용 조건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의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임용은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로서 해방 당시 7년 이상 법원 또는 검사국의 서기로 근무한 자 중(에서) 소속장인 법원장 또는 검사장이 추천한 자'로 한정되었다"라고 말한다.

오제도는 1940년부터 서기로 근무했기 때문에 이 특혜를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해방 이듬해 9월 19일 시행된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치른 뒤 그는 검사가 됐다.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일본인 법조인들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5년 이상의 서기 경력자들만 시험을 쳤으니 그 역시 8·15의 혜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기보다는 검사에 잘 맞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공안 분야에서 실적을 축적해 갔다. 훗날 두고두고 기억될 국회 프락치 사건(친일청산 지지 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매도), 남로당 거물 김삼룡·이주하 사건, 김수임 간첩 사건 등이 그의 손에서 처리됐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이전에 그는 이 분야의 독보적 인물로 우뚝 서게 됐다.

반공 분야의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검사의 본분과 어울리지 않는 일에도 나섰다. 좌파 전향자들에게 갱생 기회를 준다는 명목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반(反)이승만 성향의 국민을 관리하는 기구였던 국민보도연맹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가 보도연맹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직후인 그달 중순, 그는 전향자들을 억지로 몰아세워 서울 시내에서 반공 시위를 열었다. '플래카드 비용도 주지 않으면서 시위 행사를 하라는 거냐?'라고 행사 직전까지 시위 참여를 거부하는 전향자들 앞에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질책성 연설을 했다.

그런 뒤에 그는 수천 명의 전향자들을 거리 시위로 내몰았다. 1976년 6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그때 그 일들 <142>'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 타도', '대한민국 절대 지지' 등의 플래카아드와 오랏줄에 묶인 김일성의 허수아비를 앞세운 최초의 이색적 반공을 위한 가장 시위가 서울 중심가를 누볐다. 연도의 시민들은 수천 명의 반공시위 행렬 속에 양모·백모·소모 씨 등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4백여 명이 낀 데 놀랐으나, 이들의 새롭고 떳떳한 출발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 김효석 내무부 장관(당시 54세), 신성모 국방부 장관(58세), 권승렬 법무부 장관(54세)이 시위를 참관하고자 동아일보 앞 사열대에 대기하고 있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서울 서소문 인근에서 오전 10시 출발할 예정이었던 전향자들이 비용 문제 등을 거론하며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에, 오제도가 그들을 설득해서 출발하도록 만드는 데 2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부의 핵심 인물들인 세 장관들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32세의 젊은 검사를 대해줬다. 이들은 2시간 이상을 길거리에서 아낌없이 허비했다. 오제도가 '반공 몰이'를 하면서 어느 정도의 위세를 누렸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한국전쟁 뒤에는 좀 더 유리한 환경에서 반공 검사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1960년의 벽을 넘지 못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뒤인 그해 5월 3일 오제도 파면을 건의하는 안건이 국회에 제출됐다. 자유당 의원들이 아직 건재한 국회가 안건을 부결하기는 했지만, 이 일은 그가 검사직에 회의감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검사직을 던지고 변호사로 전업했다.

오제도는 1년 뒤 발생한 5·16 쿠데타로 되살아났다. 1966년에 반공연맹 이사가 되고, 1971년에 중앙정보부 산하 북한연구소 이사장이 된 데 이어, 1975년에는 아시아반공연맹 및 세계반공연맹의 한국 대표가 됐다.

그런 상태에서 1977년에 서울시 종로·중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이때는 '김일성을 때려잡겠다'는 선거 공약으로 주목을 받았다. 1977년 6월 5일 자 <조선일보> 기사 '정견 만발 보선 후보 15인의 마이크'에 따르면,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안보문제 전문가로서 국회에 들어가 김일성을 때려잡고 더 많은 자유의 길을 터놓겠다"라고 공약했다. 이 선거에서 그는 1위를 기록해 2위인 정대철과 함께 국회에 들어갔다.
   

당선이 확정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하는 초선의 오제도씨 1977.6.11 ⓒ 연합뉴스

   
오제도에게 반공이 얼마나 큰 자산이었는지는 반공 경력을 발판으로 국회의원이 된 일뿐 아니라 그의 활동을 소재로 하는 '특별수사본부'라는 드라마가 제작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987년 이후에 비해 검사의 위상이 낮았던 그 시절에도 그는 반공을 무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데 바로 그 반공 때문에 그는 자칫하면 된서리를 맞을 뻔했다. 이승만과의 라이벌 구도로 엮힐 뻔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1976년 6월 24일 자 <동아일보> '그때 그 일들 <145>'에 실린 오제도의 회고담에 그 사연이 소개돼 있다.

한국전쟁 2개월 전인 1950년 4월이었다. 대통령이 그를 호출했다. 그는 몸에 권총을 찬 채로 검찰총장과 서울지검 검사장을 따라 경무대에 들어갔다. 뒤뜰에 있던 이승만 앞으로 안내된 그는 고개를 숙이며 "부장검사 오제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반응이었다. 위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박사는 냉담하게  '오 검사가 공로가 많다지. 그러나 말썽이 많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말썽 많은 사람은 쉬어야 해.'
 
오제도는 순간 아찔해졌다. "당시 이 박사의 '공로가 많다'는 말은 '그만두라'는 말로 통용"됐다고 그는 말한다. 이승만이 호출한 것은 그를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직접 불러 '쉬어야 해'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당시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오제도는 공산주의 진영뿐 아니라 대한민국정부 내에도 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크게 부각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해석했다.
 
나는 유력한 일부 정치인들에게 미움을 샀다. 그들은 내가 전국 규모의 국민보도연맹을 조직·선도하는 것이 대통령을 꿈꾸기 위한 것이며, 고향이 평북으로 흥사단 계열이니 야당에 속한 것이라는 등 모함을 했다. 심지어 공산당의 전향을 위해 아량을 보이는 점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오제도가 예예 하고 그냥 나왔다면, 정말로 쉬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돌발행동이 그를 살려냈다.
 
나는 이 박사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 정원에 놓인 탁자를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치면서 '각하를 민족의 태양 같이 믿고 젊은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일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조 5백 년의 파쟁을 되풀이하시렵니까?' 하고 외쳤다.
 
흥분 상태이기는 했지만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나는 당신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민족의 태양으로 믿고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조선시대 당파싸움의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간신배들의 농간 때문이다'라는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전달한 셈이다.

권총 찬 검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무대 경찰서장 등이 만류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승만의 '공로가 많다' 운운은 없던 일이 됐다. 오제도는 '빨갱이'뿐 아니라 '상관'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승만 발(發) 위기에 강하다는 점은 그날 소동을 일으켜 자기 자리를 보전한 사례와 더불어, 이승만의 부정선거로 인한 4·19 와중에 국회에서 파면동의안이 부결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라이벌이 될 형편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을 능히 이길 만한 자질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과 검사가 아닌 다른 관계로 만났다면 그와 이승만의 구도가 어떻게 펼쳐졌을지 알 수 없다.

1977년 국회에 들어간 그는 전두환 정권에서 집권당 출신의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고, 2001년에 사망한 뒤에는 검사로서는 이례적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현충원 홈페이지에 표기된 그의 계급은 '검사'다.
 

국립 대전현충원에 있는 검사 오제도의 묘비 ⓒ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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