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0 13:50최종 업데이트 21.03.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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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밭에서 일하고 점심 후 오수를 즐기는 어머님들. 충남 금산군 추부면 행정리 천년은행나무 아래의 오수. ⓒ 최수경

 
봄 밭에서 일하고 낮잠으로 노곤함을 덜고 계신 어머니들. 자세히 보면 다 다른 모습이지만 스치며 보면 유니폼을 입은 듯하다. 열에 아홉은 같은 바지. 바로 '몸뻬' 바지다.

우리 어머니들과 친숙한 바지라 정겹지만 사실 근원을 캐면 서글프다. 일제강점기에 일하기 쉽도록 강제적으로 보급된 바지라고 하니 한국의 아녀자들이 치마에서 바지로 입문한 시작이다. 몸뻬는 일본어다. 우리말로 하자면 일복, 작업복이라 칭한다. 이 바지는 작업복으로 자리를 잡아서인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르신들이 활동하는데 이만한 바지가 드물다. 그래서인가 일복에 국한하지 않고 이미 어르신들에게 평상복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골 어르신들께서 일할 때 입는 일복. 올갱이국을 끓이고 계신 마을 어르신들(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 최수경

 
우리들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즐겨 입어서인지 편안함과 더불어 수더분함, 정겨움을 자아낸다.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일복을 입으신 것을 보는 일은 이미 흔하다. 도시 색시도 시골 시댁에 내려가 시어머니의 일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일할 준비가 되었다는 무언의 표시다.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날, 내가 시어머니의 일복을 입는 것은 소통의 시작이다.

슬로 패션 일복

김장 시즌 일복은 김장 의류라는 김장 용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고무줄이 허리를 조이지도 않고, 고춧물이 물들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텍스타일 무늬가 때를 덜 타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잔잔한 아메바 무늬나 현란한 꽃무늬가 가장 많고, 겨울 일복은 민무늬의 어두운색이다. 뚱뚱해도 날씬해도 모두를 소화해내는 착한 디자인, 여름에는 쿨 몸뻬, 겨울에는 보온용 누빔 몸뻬까지 사계절을 감당해낸다.
  

김장철 마트에 전시되어 있는 김장용품들 김장시 편한 의상으로 일복이 김장용품 가운데 진열되어 있다. ⓒ 최수경

 
활동성과 실용성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일복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 노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활동성에서 따라올 수 없으므로 화려한 색과 무늬로 파자마 파티를 즐기거나, 작업복의 대명사였던 청바지를 제치고 공사장 근로자들이 쿨 소재 일복을 즐겨 입는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충북 옥천군 군북 이원의 마을에서 김장을 마친 후 일복을 빨아 널어놓았다. ⓒ 최수경

 
어머니들의 신발은 어떤가. 특히 시골 어르신들의 신발은 단출하다. 일상이 노동이다 보니 일하기 편하고 신고 벗기 편한 고무 슬리퍼와 겨울엔 솜을 두른 덧신이면 부족할 게 없다. 경로당 현관에 간혹 꿰매어 신은 고무 슬리퍼를 발견할 땐 근검절약하던 당신들의 시대를 짐작하게 한다. 유행을 타지 않는 덕에 여러 개가 필요 없는 일복과 슬리퍼는 소재만 친환경적이었다면 진정한 슬로 패션이다.
 

어르신들의 여름 신발 충북 청주시 문의면 노인정 현관 풍경 ⓒ 최수경

          

어르신들의 겨울용 신발 전북 장수군 마을 노인정 현관 풍경 ⓒ 손지수

   
도시 가족의 신발장은 옷장의 옷처럼 종류가 많다. 계절과 격에 어울리게 신어야 할 신발들이 넘쳐나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넘쳐서 버린 신발이 설치예술의 소재가 된 적이 있다. 어마어마한 양에 놀랐고, 멀쩡한 상태에 놀랐고, 예술품을 위해 신발에 구멍을 뚫어 영원히 못 쓰게 만든 데 놀랐다.
 

버린 신발로 만든 설치예술 버리긴 했지만 멀쩡한 신발에 구멍을 뚫어 설치 예술의 재료로 사용했던 2017년 5월 서울역 광장의 슈즈 트리. 미관상 논란이 일면서 곧 해체되었다. ⓒ 최수경

 
슬로 패션에 대비되는 것이 패스트 패션이다. 패스트 패션은 최신 유행하는 옷을 빠르게 만들어 유통하는 것으로 패스트푸드인 햄버거를 연상하면 쉽다. 패스트 패션은 가격이 저렴하고 종류가 다양해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어 구매자의 선택을 촉진한다. 이때 제품의 품질은 중요하지 않다. 가격이 싸기 때문에 언제든 살 수 있고 싫증이 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싸고 빠르게 만들어야 하다 보니 패스트 패션은 주로 후진국에서 만든다. 아무래도 생산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70년대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려고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작은 방에서 재봉틀을 돌려야 했던 누이를 생각하면 된다.

패스트푸드가 비만을 유발하듯이, 패스트 패션은 환경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 패스트 패션은 유행 주기를 짧게 하고 소량 생산을 해 소비자에게 암묵적으로 희소성 메시지를 보낸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사재기를 부추긴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구매한 옷이나 신발은 버리는 양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패스트 패션은 쓰레기 문제로도 그렇고 소각 처리 과정에서 이산화탄소와 다이옥신 등 유해 물질을 발생시켜 지구 온난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도 비판받는다.
 

장터에 쏟아져나온 신발 한켤레에 삼천원씩 하는 신발이지만 제품의 홍수시대에 선택받는 것은 쉽지 않다. ⓒ 최수경

 
나는 잘 입는가

나는 멋쟁이가 아니다. 몇 벌 없는 옷으로도 잘 매치해 입어내는 센스도 없다. 바쁘다 보니 쇼핑할 시간도 없다. 그래서 오래 입다 보니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우연히 홈쇼핑이 권하는 대로 세 장짜리 옷을 주문한 적이 있다. 막상 입어보니 모델이 입었던 것과 다르게 평범했다. 게다가 내 체형과 안 맞아서 그냥 쌓아두고 있다. 디자인이 갖는 힘의 척도는 감각과 속도라는데,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여러 경로에서 다양한 옷 정보를 제공하는데도 나는 외면하는 건지 둔감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과연 나는 '잘 입는가'를 생각해 봤다.


얼마 전 연구실 책장이 하나 더 필요해 당근마켓에서 5천 원에 책장을 구입했다. 중고품치고는 거의 헐값이었기에 이후 당근마켓을 재미 삼아 보게 되었다. 집에 쌓아두자니 버거운 물건들의 교환 장소로 가히 최적이다. 일반적으로 장롱 속에서 3년간 안 입는 옷은 영원히 안 입는 옷이다. 비워야 미니멀 라이프가 된다. TV에서도 정리하기 프로그램이 인기다. 아파트 분리 수거장에 멀쩡한 옷들, 멀쩡한 가구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사철이 시작되니 분리 수거 마당에 진을 치면 제법 건질 것이 많다.

처녀 때 비싸게 주고 산 옷, 애 키울 때 아이들 옷값에 치여 변변한 옷 한 벌 없을 때 마련한 옷, 심지어는 유행이 돌아오면 입어야지 하며 이십 년을 장롱에서 버틴 옷들도 있다. 사연이 있거나 아까워서 못 버리거나 살 빼서 입겠다고 버틴 멀쩡한 옷들이다. 결국 나이와 습관을 의식하고 그 옷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는 날, 옷은 장롱을 떠난다. 긴 머리를 깎듯, 생머리를 파마하듯, 마음의 변화가 일어 결심을 하는 날이다.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당근마켓에 올렸다. 다시 시집 보내는 심정으로 잘 세탁해서. 삼천 원에 주인을 만난 옷들은 우리집 현관 앞을 떠났다. 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중고마트 동네 중심으로 중고 구매 및 판매를 하는 앱.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최수경

 
중고 의류 구입에 흥미를 갖고, 유행과는 관련 없이 옷을 소비하고 처분하는 일은 옷의 수명 주기를 늘리는 작은 실천이다. '낡고 오래된 제품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업사이클을 설명할 때 나오는 말이다. 중고 옷을 팔고 사서 입는 것이 재활용이라면, 못 입는 옷 자원에 미적인 창조성을 입혀 고부가가치의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업사이클이다.

금속이나 플라스틱은 리사이클 과정에서 여러 혼합물질이 섞이면서 질 낮은 다운 사이클 물질이 된다. 첨가제가 들어가고 환경을 오염시킨다. 그러나 옷 자원은 분해하는 과정 없이 다른 형태로 가공하는 업사이클로 그 자체가 환경의 가치를 함유하는 일이다. 
  

청주새활용시민센터 전시품목. 헝겊으로 브로치를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이다. ⓒ 최수경

 
진짜 멋쟁이는 미적 욕구만을 만족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 윤리적인 정당성과 환경보호, 인권보호라는 사회적 가치도 옷의 구매와 소비에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옷의 수명 주기를 늘리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나는 멋쟁인가? 나는 멋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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