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7 18:30최종 업데이트 21.03.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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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핀란드 대사 재직 당시 김평일 ⓒ 연합뉴스

 
김일성을 많이 닮은 둘째 아들 김평일은 1980년대부터 동유럽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그의 외형적 삶은 그간 북한에서 전개된 격동의 역사에 비하면 비교적 순탄했다.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벌어지고, 1994년에 이복형 김정일이 정권을 승계하고, 뒤이어 미증유의 경제난에 맞서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지고,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지고, 2011년에 조카 김정은이 정권을 승계하는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평일의 삶은 커다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민무력부에서 일한 1984~1988년을 제외하고 1981년부터 2019년까지 김평일이 주재한 국가는 유고슬라비아·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폴란드·체코였다. 핀란드를 제외한 나머지는 동유럽 국가들이다. 동유럽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사적 변화에 휩싸였다. 1989년 가을부터 동독·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루마니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11월 9일 밤에는 동서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는 1988년 12월부터 불가리아주재 대사였다. 이곳에서도 1989년 가을에 시위가 벌어졌다. 이듬해 11월, '불가리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ulgaria)' 국호에서 '인민(People's)'이라는 글자만 떨어져 나갔다. 정치체제의 중대 변화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그가 주재한 동유럽은 북한도 겪지 못한 일대 격변을 경험했다. 그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북한 국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훨씬 더 큰 정치적 태풍의 한가운데에 국외자로 있었다.

동유럽 민주화 혹은 '1989년 혁명'을 계기로 동구권은 공산주의 체제를 폐기했다. 그런 대변혁이 일어난 곳에서 김평일은 공산주의 북한의 대표자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폴란드의 경우에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근무했다. 한마디로 유학을 두세 번도 갔다 올 수 있는 긴 기간을 한 곳에서 일했다. 고국에서 부는 소용돌이도, 동유럽 현지에서 부는 태풍도 그의 외형상 평탄함을 깨트리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이 주목한 남자

김평일은 한국전쟁 이듬해인 1954년 8월 10일 출생했다. 어머니는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다. 중앙정보부 산하 기관으로 출발한 북한연구소가 발행하는 <월간 북한> 2014년 4월호에 실린 탈북민 작가 림일의 '김씨 왕조 3대 숙청사 (중)'는 이렇게 설명한다.
 
평안남도 강서군 태생인 그녀는 1950년 당시 평양여자사범학교 재학 중 전쟁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최고사령부 교환수로 배치된다. 뛰어난 용모와 성실함을 가진 김성애는 푸근한 이미지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1년 뒤 그녀는 군사복무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최고사령관 집무실로 이동하였는데, 이때부터 김성애의 운명이 달라졌다.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은 아내가 없는 집에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집안일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국사에만 여념이 없던 김일성에게는 외롭고 고독한 가정생활의 나날이었다.
 
김성애가 직접 낳은 네 자녀 중에서 셋째이자 장남인 김평일은 김정숙의 소생인 김정일보다 12세 어렸다. 이 때문에 김평일은 항상 몇 걸음 앞서가는 이복형을 바라보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곱 살일 때인 1961년에는 김정일이 조선노동당에 들어갔고, 열 살 때인 1964년에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속됐다. 이렇듯 두 형제의 정치적 격차가 매우 컸다.

김정일이 장남인데다가 출발도 빨랐기 때문에, 김평일이 경쟁자로 부각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평일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차기 권력 구도와 관련해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스물을 넘긴 1970년대 중반부터 그는 한국과 일본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22세 때 발행된 1976년 8월 3일 자 <조선일보> 기사 '김일성 후처 소생 김평일 부상'은 이렇게 보도했다.
 
북괴 내부에서는 최근 독재자 김일성의 후계 문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극에 달해 마침내 골육상잔으로 피를 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일본에서 발행되는 정보지 <선택>이 8월호에서 폭로했다. 특히 이 잡지는 처음으로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가 낳은 김평일을 소개하고, 김일성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지난 73년에 이미 후계자로 결정된 장남(전처 김정숙 소생) 김정일과 차남 김평일 및 김일성의 실제(實弟)인 김영주의 3파전으로 현재 심각한 상태까지 들어갔다고 밝혔다.
 
북한 내부적으로 후계자가 사실상 확정된 시점은 1973년이 아니라 1974년이다. 하지만 1976년 당시에는 내막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위와 같이 보도될 수밖에 없었다.

또 위의 기사가 나온 시점에 김일성 친동생인 김영주는 공식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김정일과 김평일의 경쟁 구도 역시 강화되기보다는 약해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보도가 1976년에 나왔던 것이다. 북한의 실상과 북한에 관한 보도 사이에 상당한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난 1994년 6월 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당시 공개석상에 나타난 김일성 주석 부인 김성애. [TV 촬영] ⓒ 연합뉴스

 
김정일의 라이벌이 되기 힘들었던 김평일이 주목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권력이 김일성 개인에게 점차 집중되면서 김일성 가문의 살림을 맡은 안주인 김성애에게도 정치적 무게가 실리게 됐다. 한국인의 피를 받고 중국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일본 국적을 갖게 된 다케야마 소데츠(한국명 이상철) 류코쿠대학 교수의 <김정일과 김정은의 정체>는 1970년대 초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당시 북한 인민은 김성애를 국모라고 불렀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초상화에 아침저녁 절을 할 만큼 김성애는 공경 받는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김평일의 후광이 됐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앞서 나온 림일의 '김씨 왕조 3대 숙청사'에는 1970년대 초반의 '인민대학습당 부지 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건이 발단이었다. 김일성이 국립도서관 부지로 생각해둔 그 땅에다가 김성애 동생인 김성갑이 개인 저택을 건축한 이 사건은 김성애 및 그 일가에 대한 김일성의 신임을 떨어트리는 계기가 됐다.

이는 김정일의 처지와 김평일의 처지가 김성애로 인해 역전될 가능성을 낮추었다. 다시 말해 김정일의 앞길을 탄탄하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 뒤에 김정일은 북한 내부적으로 후계자 지위를 확보한 데 이어 1980년 제6차 당대회를 계기로 대외적으로도 '포스트 김일성'의 위상을 굳히게 됐다.

김일성의 교통정리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런 일이 김정일과 김평일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기는 했어도, 김평일의 신변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침내 골육상잔으로 피를 볼 날이 멀지 않았다"라는 일본 잡지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국제적으로 김정일의 라이벌로 크게 부각됐기 때문에, 김정일 집권 후에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김정일의 태도도 적지 않게 기여 했겠지만, 무엇보다 김일성의 '교통정리'가 김평일의 신변 보호에 크게 기여 했다고 볼 수 있다.

김성애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평일의 역할 분담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위층 탈북민들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작성된 유영옥 한성대 교수의 <월간 북한> 1991년 7월호 기고문 '북한 권력승계의 변수 김평일'에 실린 인민군 대위 출신 신중철(1991년 당시 한국군 중령)의 진술에 따르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재학 당시 김평일은 학교 안에서 신중철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인 1967년 이른 봄 어느 날인가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었는데, 수령님께서는 다 큰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평일아, 너는 커서 훌륭한 군사 간부가 되어라.'
 
만 13세에 중학교 3학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북한 초등학교가 4년제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김평일을 군인으로 키우려 했다는 내용은 림일 기고문에도 나온다. "김일성도 아들인 김평일을 장차 조선인민군을 이끌 장군감으로 염두에 둘 만큼 신임하고 있었다"라며 "당시 민족보위상(지금의 인민무력부장)인 최현은 김평일을 군사 재목으로 키우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서 김평일을 돌봐줬다"라고 말한다.

이는 김일성이 '김정일은 정치, 김평일은 군사'라는 역할 분담을 구상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평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뒤인 1978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진학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수도 있다. 김일성은 김평일이 군사 분야에서 김정일을 돕는 구도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구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이후의 4년 동안 인민무력부 작전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김평일은 34세인 1988년부터는 군인이 아닌 외교관의 길만 걸었다. 그리고 군사 분야는 김정일의 몫이 됐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에 군대를 장악하고 선군 정치를 이끌었다.

그렇다고 김일성의 구상이 완전히 틀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두 형제의 공존을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형태로 실현됐다고 볼 수도 있다. 김일성이 아직 건재할 때인 1988년부터 김평일이 외교 무대에 정착한 것은, 김평일을 내보내려는 김정일의 의중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김일성의 승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평일이 그 방면에서라도 자리를 잡기를 바라는 김일성의 의중이 반영됐으리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이 애초에 구상했을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은 정치, 김평일은 군사'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김정일은 국내, 김평일은 해외'라는 변형된 형태로 김일성의 희망이 어느 정도 실현됐다고도 볼 수 있다. 김평일이 북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위 외교관직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교통정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남자가 사는 법

그에 더해, 김평일의 원만한 성격도 고려해볼 만하다. 성품이 원만한 그를 심정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일화 하나가 곽문완 전 인민군 호위사령부 군관의 <월간 북한> 2016년 1월호 기고문 '호위사령부 25시 (35) 김평일' 편에 나온다. 기고문의 필자가 호위사령부 근무 당시 선배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다.

김평일이 해외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였다. 예고 없이 주석궁을 방문한 김평일의 차량은 무려 1시간이나 검문소에 묶였다. 김정일 라인의 호위사령부 장교가 사전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무작정 대기시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속이 타들어간 사람은 면전에서 김평일을 대하는 호위사령부의 주형식 소좌였다. 주형식의 거듭된 승인 요청에도 상부가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기고문에 따르면, 이때 김평일은 이런 모습을 보였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화가 나서 벌컥 자리를 차고 사라질 만도 했지만, 김평일은 오히려 초조해하는 주형식을 위로하며 일부러 이런저런 농담까지 하면서 태연하게 기다려줬다고 한다.
 
아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김일성은 "자식이 아비를 만나러 왔는데, 뭔 놈의 절차가 1시간씩이나 걸려?"라며 호위사령부에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좌천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주형식이었다. 김정일 라인의 장교들이 그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이다.

결국 김평일 때문에 좌천되기는 했지만, 주형식은 김평일의 마음 씀씀이를 잊지 않았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아버지의 교통정리에 더해, 김평일 자신의 성격 역시 그의 평온한 삶에 기여 했으리라고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김평일은 올해 67세다. 그는 2019년 12월 체코 임지에서 귀국했다. '김정은이 위독하다'는 오보가 났던 작년 상반기에는 외부 세계에서 그의 존재가 부각되기도 했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아직 보도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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