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6 19:01최종 업데이트 21.02.2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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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젊은 날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준비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오래 묵혀둔 상처를 들춰내는 걸 원치 않았지만, 이걸 다큐로 만들면 '대박 나겠다'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카메라 앞으로 끌어냈다. 아버지가 북파공작원으로 보상을 받게 되면 군 면제가 될 거란 이야기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으로서 이런 '대박 아이템'으로 졸업작품을 만들면 각종 영화제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다. 지리산 산골에서 자라서, 고3 때 자전거로 66일간 북미 종주 여행을 하고, 한예종에 입학하고, 레바논 파병부대에 자원해서 군 복무를 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종횡무진하던 시절, 그의 삶의 가장 큰 목표는 사회적 인정과 명성이었다.

이제 서른 살이 된 그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꾼다. 그는 지금 <지리산필름>의 대표로 고향인 화개에 머물며 <월간 하동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동네 사람들의 삶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지리산 산악열차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운동에 앞장서고, 자연과 동물과 사람이 모두 존중받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캠프 '지리산게더링'을 연다.

3년 전, 고향 화개로 돌아온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린 시절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에서 자라면서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도시 생활에 지쳐 돌아온 그에게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뭘까? 지난 17일, <지리산필름> 대표 배혜원 감독(30)을 만나러 경남 하동으로 찾아간 날, 기습적인 한파로 칼바람이 불고 눈발이 회오리쳤다. 빼꼼히 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한 매화꽃을 시샘하듯 날카로운 추위였다.
  

<지리산필름> 대표 배혜원씨가 주변 산세와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진순 와글 이사장 ⓒ 와글

 
지리산에서 영화 찍는 청년, '감자'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대책위' 사무실로 쓰는 하동의 한 공방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물을 끓여 하동 녹차를 우려냈다. 따뜻한 찻물이 들어가면서 방안의 냉기도, 어색함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 지리산필름 대표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신데 제가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까요? 대표님? 감독님?

"저는 그런 호칭이 불편해서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든가... 별명이 있는데 '감자'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 왜 감자예요?

"감자같이 생겨서요. (웃음). 그렇게 불리고 보니, 감자가 저장도 오래 되고 그 자체로 씨앗이자 열매이자 뿌리인 거예요. 저는 이 별명이 맘에 들어요."
  

배혜원은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지리산 산악열차 오지마’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는 곳은 그들의 대책위 사무실로 쓰고 있는 마을 공방이다. ⓒ 와글

 
- 여기서 사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제가 4살 때 부모님이 화개로 이사 오셨어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요양차 쉴 곳이 없나 찾다가 이쪽까지 오게 되셨다고 하더라고요. 전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여기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진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느라 집을 떠나 있었죠. 다시 들어온 건 2018년입니다."
  

한 학년 24명이 졸업할 때까지 한 반이던 화개초등학교 시절 배혜원. 지리산 계곡에서 올챙이 잡고 앵두를 따 먹으며 뛰어놀았다. ⓒ 배혜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진주의 신흥 명문인 사립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아버지는 건설직 일용노동자로 일하고 어머니는 차밭을 일궈 생활하느라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부모님은 두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에 헌신적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대로 여섯 살 위 형은 육사에, 혜원은 한예종에 입학했다.

-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셨겠어요. 원래 착실한 학생이었나요?

"고등학교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어요. 아침 7시반에 학교 종이 땡 치고 나면 선생님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나와 지각생들을 엎드려 뻗쳐 시키고 팼어요. 방학도 없이 밤 10시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하고. 어른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 못가면 큰일 난다고, 인간으로 대접받으려면 공부하는 일밖에 없다고 하셨죠.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는데 사물놀이 동아리 선배들하고 고2 여름 방학때 해남 땅끝마을까지 자전거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그해 겨울 방학때는 하숙집 보증금을 빼서 캐나다로 갔죠. 밴쿠버에서 멕시코까지 자전거로 3000킬로를 달렸어요."

-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대륙종단 자전거 여행을 했다고요? 고3 올라가는 방학에?

"운이 좋았어요. 66일 걸렸는데 자전거 펑크도 한 번밖에 안 났고요. 고3, 4월에 돌아왔는데 하숙할 돈이 없어서 진주지역 사물놀이 동아리방에서 숙식을 했어요. 그때 형들이랑 심야영화를 보러 갔다가 <똥파리>(양익준 감독)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죠. 피 철철 흐르는 아픈 상처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때가 고3, 6월이었는데 그때까진 전 한예종이 어딘지도 몰랐어요(웃음). 마이클 무어 감독 다큐를 불법 다운로드해 보면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다큐 감독이 되겠다 마음먹었어요."

내 인생의 '테크트리'로 성공을 꿈꾸던 시절

2010년 배혜원은 한예종에 입학했고 인생의 은사인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상계동 올림픽>(1988) <송환>(2004) 등 사회적 메시지가 뚜렷한 다큐를 내고 해외영화제에서도 인정받는 선생님처럼 그도 '거장'이 되고 싶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자연다큐팀에 합류해서 현장감독으로, 조연출로 경력을 쌓아갔다. 군대도 레바논에 파병 지원을 해서 다녀왔다.
  

한예종 재학시절 배혜원 ⓒ 배혜원

  
- 20대 초반까지 삶만으로도 드라마가 몇 편 나오겠어요. 포레스트 검프 같아요(웃음).

"그 무렵에 '테크트리'(Tech-tree)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는데, '어떻게 삶을 사느냐에 따라 자기 진로가 탄탄대로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초반 '빌드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갈린다고, '초등학생 때 선행학습 얼마를 하면 어느 대학에 무난히 간다', 이런 게 테크트리를 잘 만드는 거죠. 군대도 그런 게 있었어요. 스무 살이 되고부터 군대를 언제 어디로 갈까, 진로설계에 노심초사했어요."

- 그래서 계획대로 되었나요?

"레바논에서 돌아왔을 때는 수중에 돈도 좀 있고 해서 한 달에 50만 원 받고 자연다큐하는 팀에 들어가 7개월간 일했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해두면 남들보다 선택지가 넓어질 거라 생각했죠. 제 졸업작품도 그 무렵부터 준비했는데, 주변에서 '아이템이 좋다'고들 하니까 잘하면 크게 될 줄 알았죠. 아버지는 옛날 일을 다시 들추는 걸 싫어하셨는데 주말마다 지리산에 와서 아버지를 '취조'했어요.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서 싸우다가 같이 술 먹고 울다가 '아이고 아버지, 이거 얘기해 주셔야 내가 성공합니다' 하고..."

- 아버지가 얘기해야 제가 성공합니다. 빨리 상처를 드러내 주세요!

"(웃음) 맞아요."

아들의 성화에 아버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중 잠수훈련을 하다가 고막이 터졌는데 고막에서 피가 흐르는 그에게 뭇매가 쏟아졌다고 했다. 그 훈련 끝나고 외박을 나간 뒤에 복귀를 안 해서 탈영자 신분이 되었고, 어떤 보상도 못 받은 채 지금까지 입 다물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였다.

- 그래서 졸업작품은 대박이 났나요?

"아뇨. 그 영화로 잘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커서 그랬을까, 조급한 마음에 편집작업을 제대로 할 엄두가 안 났어요. 나중에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조사관이 나와서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데 그걸 통째로 찍어서 원씬 원컷으로 내놓았죠. 졸업작품 상영회 이후에는 한 번도 어디서 틀어본 적이 없어요(웃음)."

- 아버지는 뭐라세요?

"아버지도 보다 주무시더라고요(웃음)."

- 실망이 컸겠어요.

"뭘 하든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되게 강했어요. 지금은 인정욕구에 대한 거부감이 있죠. 그게 사람을 들뜨고 조급하게 하니까요. 자연다큐 하면서도 회의감이 많았어요. 자연다큐도 알고 보면 연출이 들어가거든요. 제가 했던 작업 중에 개구리를 잡아먹는 곤충이 있었는데, 개구리를 잡아먹는 장면을 찍으려고 개구리를 패대기쳐서 주거나 냉동실에 얼렸다가 주고, 올빼미가 쥐를 잡아먹는 장면을 찍을 때는 쥐를 생포해서 카메라 앞에 묶어놓기도 하고..."

- 그렇게 찍는군요.

"'이런 건 조연출이 하는 거지', '나는 못하겠으니 네가 해라' 그런 얘길 많이 들었어요. 그 무렵에 이한빛 피디 사망사건이 있었는데 그분의 고민이 충분히 이해가 가요. 자연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구실로 생명을 미끼 삼아서 그림을 만드는 것, 제가 아버지 이야기를 찍은 것도 사실 마찬가지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취지로 아버지의 상처를 후벼 파서 착취하고 상품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앞세웠던 것. 그런 폭력적 작업을 멋도 모르고 해버린 거예요."

어느 순간, 다큐 작업에 대한 회의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다시는 영상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제주도로 훌쩍 내려갔다. 2017년 9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제주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지냈다.
  

2017년 가을, 영상작업을 생업으로 삼지 않겠다 다짐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목수 일을 하며 지냈다. ⓒ 배혜원

  
목수는 적성에도 맞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비 오는 날엔 일이 없다. 이래저래 공치는 날이 많았다. 마침 친구가 영상 제작지원금을 받을 수 있겠다면서 작업 제안을 해왔다. 목수 일이 없는 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찍었다. 표류문학의 산실인 제주에서 각기 다른 시기를 산 세 남자의 인생 표류기를 담았다. 조선시대 <표해록>을 쓴 제주 선비 장한철, 제주에 사는 조작간첩 피해자 강광보, 그리고 동남아와 서울을 거쳐 제주까지 오게 된 모로코인 오마르의 이야기를 한데 엮어 <표해록>이란 다큐멘터리로 내놓았다. 2019년 각종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고 최근엔 배급사가 나서서 해외시장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 정말 아이러니네요. 영상을 안 하겠다고 제주에 내려갔는데 그때 만든 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전에 꿈꾸던 걸 이루었어요(웃음).

"맞아요. 영화에 대한 이메일이 들어오는 게 저도 신기해요."

- 그래서 이제 다시 영상작업을 해도 되겠다 생각하셨나요?

"영상작업을 하더라도 생업으로 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 생업으로 하면 뭐가 문젠데요?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되고 피사체를 괴롭히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걸 내가 밥 먹는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 생각해요."

배혜원의 리틀 포레스트

2018년 11월 제주를 떠나 화개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겨울에 석 달간 여행을 떠나신다며 "와서 집 좀 보고 개 밥 좀 줘라" 하시길래 "알겠습니다"하고 들어왔을 뿐, 처음부터 길게 눌러살 작정은 아니었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이름도 혜원인 것 아시죠(웃음)? 배혜원의 리틀 포레스트,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지내는 시간은 어땠어요?

"그때의 경험이 제겐 참 특별했던 게, 새삼 '내 삶이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성공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고...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다른 사람 시선 속에서 내 입지를 갖고 싶어 애썼을까 싶더라고요.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았어요."

- 뭐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킨 걸까요?

"그제서야 지리산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집 앞에서 황장산이 마주 보이는데 아침마다 그 산을 보면 마음이 녹더라고요. 그 전에는 한없이 벗어나고 싶은 곳, 성공하려면 벗어나야 하는 곳이었는데, 집에 와서 석 달을 보내다 보니, 산과 자연이 저한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너의 속도대로 살라'고. 그 기억이 참 편안하고 좋았어요."

지리산 넓은 자락에 조바심과 초조함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될 무렵,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오신 며칠 뒤, 동네에 양수댐을 짓는다고 사업설명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주민들과 사전 협의도 없는 일방적 통보였다. 부모님은 "여기가 수몰지역이 될지도 모른다는구나"하며 한숨을 내쉬셨다. 이제사 고향 땅에 정을 붙이게 되었는데 그걸 빼앗길지도 모른다니 황망했다.

주민들과 열흘 동안 밤마다 모여 회의를 했다. <하동군 양수발전소 유치 반대대책위>를 결성하고 배혜원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주민들이 한목소리로 강력히 항의하고 나선 덕에 다행히 발전소 계획은 철회되었다. 배혜원이 "내 삶은 이 일을 계기로 전과 후로 나뉘게 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인생에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양수발전소 반대운동을 하면서 그는 다큐제작자로서 할 일을 새삼 깨달았다. 그 이후로 하동사람들을 찍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왼쪽이 배혜원 ⓒ 배혜원

  
지리산 산악열차를 반대하는 이유

-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때부턴가요?

"지리산을 몰랐다가 뒤늦게 '내가 쉴 수 있는 곳'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곳'이란 걸 깨닫게 되었는데 그런 개발 바람이 들이닥치는 걸 보면서 '더는 도망갈 데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수발전소가 입지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이에요. 거기서 평안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역풍을 맞은 거죠. 전지구적으로 이제 오지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없겠구나 싶어요. 마치 좀비세상에서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성채를 쌓아가고 있는데 좀비들이 사방에서 성채를 공격하는 느낌이랄까."

- 지금 하동군과 기획재정부는 지리산 형제봉 일대에 산악열차와 모노레일,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이른바 '하동 알프스계획'을 추진 중이죠. 양수댐과 달리 이 사안은 주민들 간에도 의견이 엇갈려서 쉽지 않을 텐데요.

"답답하죠.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케이블카 놓고 표 얻는 데만 관심 가지니... 사회의 근본적 욕망이 변화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대안이 될 수 없단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장이 되면 마을을 바꿀 수 있을까 싶어 이장선거에 나가기도 했는데."

- 그래요?

"떨어지고 대신 반장이 되었어요(웃음)."

- 산악열차를 찬성하는 측에선 지역경제 활성화를 들고 나오는데 반대대책위에서는 반달곰 서식지를 파괴한다는 얘기를 해요. 그렇게 해서 대화와 설득이 될까요? 산악열차 반대는 사람을 위한 겁니까?

"결론적으로 사람을 위한 거죠. 아인슈타인이 한 말 중에 '문제를 초래한 방식으로는 결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관광객이 없으면 오게 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벌게 하고 에너지가 부족하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 못 해요. 공기나 햇빛을 무상으로 가져다가 돈으로 바꿀 수 있으면 뭐든 다 한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코로나나 기후위기가 닥치는 건데, 언제까지 그 방식을 고집할 건가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화해선 안 돼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연결감'이잖아요. 내가 이 사람이랑 인맥을 만들어 뭘 얻어야지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니라, 같이 있으면 왠지 편하고 즐겁고 좋은 것, 사람하고도 자연하고도 그런 연결감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죠."

- 그게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일본 아소산 기슭에 '표주박시장'이란 곳이 있어요. 텐트랑 밥그릇만 가지고 가면 전기 안 쓰고 화석연료 안 쓰고 일회용품도 거의 안 쓰면서 캠핑을 해요. 때때로 장을 열어서 돈을 쓰지 않고 서로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는 데 그걸 표주박시장이라고 하죠. 같이 밥 해 먹으면서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하고 영화하는 사람은 영화 틀고..."

- 지역의 청년들이 빠져나가서 지방소멸론이 대두하고 있는데, 요즘 청년들은 스타벅스나 멀티플렉스가 없으면 잡아두기 어렵다는 말이 있어요.

"스타벅스나 멀티플렉스가 필요 없는 문화를 만들 수 있어요. 표주박시장에 일주일 정도 머물다 왔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의 연결감, 자연과의 연결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지역을 위해서도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죠. 그런 생각으로 친구들이랑 지난 9월에 '지리산게더링'이란 걸 한 달 동안 해 봤어요."

알음알음으로 생태주의 취지에 공감하는 '대안판' 젊은이들이 모였다. 적을 땐 1~2명, 많을 땐 20~30명이 모여서 토론하고 먹고 노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올해부터는 구례에 있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평화공원에 땅을 빌어서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도 짓고 청년들이 언제라도 머물 수 있는 농막을 지어, 비거니즘과 생태운동 공동체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협의 중이다.
  

지난 9~10월 지리산게더링. 가운데 모자 쓴 이가 배혜원 ⓒ 배혜원

 
- 정말 아름다운 생각이긴 한데...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뀔까요?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 스스로 바뀌는 게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제 안에서 생긴 변화가 어떤 나비효과가 돼서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면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것 아닐까요? 제가 좋아하는 김동원 감독님이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하셨는데, 영화를 만드는 저 자신이 바뀌는 게 정말 중요한 변화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다큐감독이 되어서 인기와 명성을 누리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소년은 이제 스스로를 바꾸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작지만 위대한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더 큰 변화, 더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진순씨는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으로, 와글 간행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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