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2 19:14최종 업데이트 21.02.2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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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노래를 부르네. 기타를 들고.
난 노래를 부르네. 나는 이탈리아인.
안녕 이탈리아, 쫄깃한 스파게티와
안녕 이탈리아, 진한 커피도
안녕 이탈리아, 음악과 사랑, 가슴…
내가 사랑하는 이탈리아…


지중해의 매력덩어리 이탈리아에는 오페라에서 칸초네에 이르기까지 정말 좋은 노래들이 많다.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들만 뽑아도 족히 수십 곡은 나올 것이다. 토토 쿠투뇨(Toto Cutugno)가 부른 이 노래도 그 중 하나인데 전형적인 이탈리아풍 리듬에,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로 돼 있다. 가사도 위에서 보듯 손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단순하고 쉽다. 제목마저 '리탈리아노'(L'Italiano, 이탈리아인)인 걸 알고 나면 오그라든 손가락이 다시 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한번 들어보시라. 중독성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느끼(?)하다 싶은데 어느 순간 푹 빠져들게 하는 이탈리아의 매력이다.
 

코로나19 마스크로 무장한 로마의 관광객들 마스크를 쓴 관광객들이 로마의 명소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매력적인 이탈리아의 추락

이탈리아에는 느끼한 매력만 있는 게 아니다. <일 포스티노(Il postino, 우편배달부)>같은 영화는 극중 인물도 그렇지만 구성 자체가 텅 빈 단순함으로 꽉 찬 담백함을 만드는 마술 같은 영화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까, 단순함으로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는 전형적 이탈리아 매력의 하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뜨거운 스파게티 알덴테(적당히 쫄깃한 면)에 어떠한 소스도 넣지 말고 소금기 살짝 있는 버터 한 숟가락만 올려 녹인 후 드셔 보길 권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담백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이탈리아의 매력은 폼생폼사. 장인의 한 땀 한 땀 노력이 깃든 세련된 의류 디자인에서 소량 수제 생산을 고집하는 명품 자동차까지 이들의 산업 디자인은 가히 세계 최고다. 이들은 자동차 생산과정에서 엔진소음마저 소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유명 성악가와 협업 과정을 통해 운전자의 귀를 만족시키는 엔진음을 만든다고 하니 이쯤 되면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은 장인정신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이탈리아 북부의 매력은 역시 차갑고 도도한 세련미다.

이런 지중해의 보고 이탈리아가 최근 20년 가까이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시작된 장기 침체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한 지난해까지 계속 이어졌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다른 유로존 국가들은 초기단계 위기를 극복하고 금융위기 이전보다 플러스 성장을 이뤘지만 이탈리아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최근 20여 년간의 이탈리아 경제 성장률은 사실상 0%를 기록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 기준으로 지난해 이탈리아의 명목 국내총생산은 1조8482억 달러로 우리나라(1조5867억 달러)보다 두 계단 높은 세계 8위를 기록했지만, 구매력평가기준(PPP) 국내총생산은 2조2447억 달러로 우리나라(2조3077억 달러)보다 두 계단 낮은 세계 14위를 기록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지난해 처음으로 한국에 추월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 여파로 모든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이탈리아의 하락폭이 크다. 지난해 6월 발표된 오이시디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2020년 경제성장률은 -14% 정도로 선진국 가운데서 하락폭이 가장 큰 그룹에 속한다.
 

OECD 국가들의 2020년 경제성장률 전망치 ⓒ OECD

 
지난해 12월 같은 기관이 발표한 '코로나19 이후 2년간의 성장률 예상치'를 봐도 이탈리아는 역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다른 오이시디 국가들의 전망과는 상반된 결과다.
 

코로나19 이후 2년간의 성장률 예상치(OECD) ⓒ OECD

 
이러한 우울한 전망 속에서 지난 18일 이탈리아 하원은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신임 총리에 대한 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앞서 상원에 이어 하원에서도 압도적 표차로 지지를 얻은 드라기 총리는 앞으로 이탈리아를 재건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셈이다.

침체의 근본 원인

이탈리아 재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드라기 총리는 이탈리아 중앙은행을 거쳐 2011년부터 2019년까지 7년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역임하는 동안 유로존의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 민간 투자사 골드만삭스 부회장을 지낸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일부 언론은 그를 '수퍼 마리오'로 부르곤 한다. 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이탈리아 정치권의 염원일 수도 있다.

드라기 총리는 분명 능력과 경험을 갖춘 인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가 이탈리아를 지긋지긋한 장기침체에서 꺼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 붙는다. 이탈리아 침체의 근본적 문제는 정치인의 능력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저항운동이 있었고, 그 가운데 이탈리아 공산당이 많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일 포스티노> 역시 그러한 사회 배경을 담고 있는데, 당시의 이탈리아 공산당은 집권에 근접한 세력을 이루면서 미국을 긴장시켰다.

잿더미 속의 유럽을 파시즘의 부활로부터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 확장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판단 하에 미국은 거대한 국책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마셜플랜이다. 1948년부터 1952년 사이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을 향해 최소 123억 달러라고 하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원하면서 유럽의 부흥을 도왔다. 그 결과 서유럽 국가들은 빠른 경제회복을 이룰 수 있었지만 동시에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경제 종속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세계를 지배하게 될 미국 패권주의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지금의 슬로베니아 남서부 일부 지역까지 포함해 당시 이탈리아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액은 12억 400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의 정치세력 가운데 공산주의를 완전히 배격하는 것. 이후 이탈리아 정치에서 진보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기독교민주당 30년 장기집권이 시작된다.

물론 이 시기에 빠른 경제성장도 이뤄진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 하는 문제는 별개. 곳간 열쇠를 쥔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지 세력의 이권과 교환하는 이른바 후견주의 정치가 만연하게 된다. 선거철만 되면 여기 저기 콩고물이 날아다니고 콩고물 냄새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마피아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마피아는 훗날 자신들을 배신하는 정치권을 향해 무력 응징도 불사하는, 공권력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세력으로 확장한다.

왜 이탈리아에서 마피아 세력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제일 먼저 정치권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정치권은 투명한 감시와 견제가 결여된 부패의 온상으로 굳어져 갔고, 국민들의 삶은 점점 정치권-마피아 간의 밀약으로 만들어가는 탄젠토폴리(Tangentopoli, 뇌물공화국) 속에서 멍들어 갔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1992년 온 이탈리아를 열광시킨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 신드롬이다. 30년 동안 반공의 이름으로 용인되어온 모든 부패와의 전쟁에 뛰어든 검찰을 향해 국민은 환호를 보냈고, 그 힘으로 여당은 물론 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탈리아의 기성 정치권은 무너져 내렸다.
 

상·하원서 압도적 신임받은 드라기 이탈리아 신임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신임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수도 로마에서 '드라기 내각' 신임안 표결이 열린 하원에 출석해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하원은 이날 찬성 535대 반대 56으로 내각 신임안을 의결했다. 상원은 전날 찬성 262대 반대 40으로 신임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 연합뉴스


구세주만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의 비극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92년 이탈리아 국민들은 검찰의 대대적 범죄와의 전쟁에 열광은 했으나 시청자모드로 일관했다. 주권자로서의 참여가 없으면 기존의 정치세력을 무너뜨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흙탕물이 빠진 웅덩이에 물을 부어도 그 물은 다시 흙탕물이 된다. 웅덩이를 청소하지 않으면 그 물이 그 물. 그리고 웅덩이 청소를 물이 할 수는 없다.

기존 세력들이 와해된 이탈리아 정치 무대에 이번에는 제3의 인물이라 포장된 재벌 권력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순박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부자가 권력을 쥐면 적어도 부패는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자신은 부자가 됐고 그렇게 국민들도 부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논리에 국민들은 그를 총리로 만들었지만, 이후 그가 보여준 난맥상은 이탈리아 정치를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북부 지방의 동맹(lega)과 남부지방의 오성운동(M5S)이다. 이들은 집권세력으로 성장했지만 정치 혐오에 기대어 세력 교체만 호소했지 정책적 대안 제시는 전무했다. 정책 대결이 사라지고 인물정치에 기댄 정치공학만 남았다.

이렇게 정책이 사라지고 정치 혐오가 만연한 자리에 관료, 전문가 출신의 새 인물만 찾아다니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ies, 관료정치) 현상을 프랑스의 정치학자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는 극중주의(extrême centre)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정치 실종 현상을 말한다. 능력과 도덕성, 정치성향을 떠나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모두 넓은 의미의 극중주의에 해당한다.

유럽중앙은행 총재 출신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 그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전임 주세페 콘티 총리처럼 그도 역시 무소속이다. 한마디로 정치에 뜻이 없던 사람이라는 뜻. 흔히 '정치에 뜻이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긍정적인 평가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은 부패와 불의, 야합과 출세욕, 명예욕에 눈이 먼 사람들의 이합집산으로서의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의 자조적 한숨일 뿐이다. 정치에 뜻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현상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정치란 정책적 판단과 함께 그것을 관철시켜야 하는 정무적 판단까지 갖춰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정치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관료 출신의 정치인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바로 소통부족과 홍보부족, 그리고 서민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정치혐오증의 만연 뒤 따라오는 정치 부재의 시대에 국민들은 정치를 멀리하게 되고, 밖에 있는 새 인물만 찾게 된다. 그렇게 극중주의로 경도된 사회는 포퓰리즘으로 빠질 위험이 훨씬 높아진다. 주권을 포기한 채 수동적 권리만 좆는 유권자, 그것을 이용해 권력 연장에만 관심을 가지는 정치권 간 동거의 시간, 그렇게 만들어진 포퓰리즘의 시간은 정치를 더 수렁에 빠뜨린다. 그리고 수렁에 빠진 정치는 다시 혐오주의를 부르고 악순환은 이렇게 반복된다.

주권자가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 마치 운전자가 운전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이 수십 년 반복되어 온 이탈리아 정치의 본 모습이다. 주권자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피로감을 느낄 때, 정치는 부패로 얼룩지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다시 돌아온다.

드라기 총리는 이탈리아공화국이 들어선 1946년 이후 44번째 총리다. 총리가 이탈리아 국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잦은 교체에 해당한다.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바꾸겠다는 국민들의 근본적 인식변화가 없다면 총리의 교체로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더구나 비정치인 출신에 정치를 맡겨야 할 만큼 위중한 상황이라면 인물이 아닌 정치문화를 바꿔야 한다. 물이 아닌 웅덩이를 청소해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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