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8 08:12최종 업데이트 21.02.1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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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감을 의미)'를 지나 '가잼비(가격 대비 재미를 추구하는 성향)'를 말하는 세상이지만,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건 역시 가성비입니다.

일본 만년필에 눈길을 주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펜촉 끝이 가늘고 뾰족해 한자문화권 특유의 섬세한 필기가 가능하면서도, 긁힘보단 부드러움을 먼저 느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교적 낮은 금액으로 금촉을 접할 수 있고, 동급 모델과 비교할 때 만듦새가 나무랄 데 없으며, 무엇보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입니다.


이미 확실한 영역을 구축한 독일 만년필의 품질은 두말이 필요 없지만 가격대가 걸리고, 이탈리아 만년필의 아름다움이야 정평이 났으나 내구성이 염려스러울 때,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다소 덜하긴 해도 두루 높은 점수를 받는 일본 만년필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일본 최대의 필기구 생산업체 '파이롯트'

프로구단에서 선수를 영입할 때, 적어도 한두 명은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데려옵니다. 높은 몸값을 지불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다음 라인업을 선출할 땐, 가능한 기복이 없는 경기 운영력을 보여주는 선수를 선호할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같습니다. 남들보다 훨씬 일찍 출근하는 날도 많지만 지각도 간간이 하는 직원보단, 특별히 빨리 나오는 날이 없더라도 지각하지 않는 직원의 평가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선을 확 사로잡는 매력은 다소 덜할지언정, 명확한 단점을 찾기도 힘든 게 일본 만년필이라고들 말합니다.

세일러보다 7년 늦었지만, 플래티넘보다는 한해 빠른 1918년 '나미키 료스케(Namiki Ryosuke)'에 의해 만들어진 필기구 제조사. 전후의 두 업체와 함께 이른바 '일본 3분지계(三分之計)'를 이뤄낸 일본 최대의 필기구 생산업체가 '파이롯트(Pilot)'입니다.

파이롯트의 라인업은 다채롭습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핵심 라인인 커스텀 시리즈는 물론, 에르고 그립, 카쿠노 등 금액대는 낮지만 기본기가 좋은 입문용 만년필 라인도 확보하고 있어 사용자층이 두텁습니다.

파이롯트는 펜 모델뿐 아니라 펜촉도 여러 종류를 생산합니다. 일반적인 EF, F, M, B촉뿐만 아니라, 촉 끝부분이 일자로 잘려 가로 세로 획의 굵기가 달리 표현되는 스텁(Stub)닙, 큰 글씨를 쓰기 위해 슬릿을 두 개 낸 뮤직(Music)닙, 필기 시 탄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펜촉 측면의 숄더 일부를 아예 삭제해버린 FA닙. 기타 다양한 특수촉을 생산해 소비자가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옻칠을 적용한 고가 라인업으로, 창업자의 이름을 따 '나미키(Namiki)'라 명명한 프리미엄 브랜드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독일의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이 상위 브랜드로 '그라폰 파버카스텔(Graf von Faber-Castell)'을 운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캡리스(Capless)'는 말 그대로 '펜 뚜껑(Cap)'이 '없다(less)'는 뜻입니다. 비슷비슷한 외형을 지닌 모델이 넘쳐나는 만년필계에서 캡리스는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적용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펜입니다. 처음 보면 독특한 외형에 눈을 가까이 들이대게 됩니다.
 

사용감 가득한 펜 한 자루, 파이롯트 캡리스 매트블랙 F촉 ⓒ 김덕래

 
일반적인 만년필의 경우, 필기를 하기 위해선 뚜껑을 당기거나 돌려 여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캡리스는 발상의 전환으로 캡을 없애 보다 신속한 필기가 가능합니다. 배럴 후면부의 노브를 누르기만 하면 펜촉이 튀어나오는 노크식입니다.

한 번 더 누르면 감쪽같이 펜촉이 사라집니다. 또 캡은 없지만, 내장된 스프링 장치가 입구를 막아 잉크 마름을 막아줍니다. 그런 이유로 '실용성의 끝판왕'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잉크 충전 방식은 카트리지나 컨버터 중 하나를 택하면 됩니다.

현대적인 디자인이라 최근 생산된 모델로 생각하기 쉽지만, 캡리스 시리즈는 1960년대 탄생했습니다. 제법 역사가 있는 라인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파이롯트의 상징적인 모델 중 하나입니다.

스페인어로 열 번째를 의미하는 '데시모(décimo)'는 파이롯트 캡리스의 10세대 모델이란 뜻입니다. 일반 캡리스보다 살짝 가늘게 만들었으며 클립에 모델명을 새겨 넣어 알아보기 쉽게 했습니다. 11세대인 '페르모(fermo)'는 초기 모델처럼 노브를 돌려 펜촉을 나오게끔 하는 회전식 메커니즘을 채택해 옛 향수를 자극합니다.

모델 특성상 두툼한 파우치 안에 고이 모셔져 있을 때보다, 한 자루 재킷 안주머니에 꽂고 다니며 언제든 메모할 일이 있을 때 바로 꺼내 쓰는 경우가 많은 펜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펜이 아니라 철저히 실용성에 바탕을 둔 만년필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경우는 물론, 떨어뜨려 몸통이 찌그러진 경우도 다른 펜에 비해 많습니다. 내구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실사용펜으로 많이 쓰여서입니다.
 

매일같이 손에 쥐고 써 닳고 긁힌 펜 몸통 ⓒ 김덕래


펜촉이 삽입된 상태라면 정말 다행인데, 필기 중 수직낙하하면 어쩔 수 없이 펜촉이 바닥에 닿으며 휘어집니다. 그리 무거운 펜은 아니지만, 추락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이렇게 측면으로 휘어지면 살리기가 더 까다롭습니다. 급한 마음에 서둘다 보면 펜촉이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와 비례해 살려낼 확률도 높아집니다.
 

추락의 충격으로 한쪽으로 휘어진 펜촉 ⓒ 김덕래


캡리스의 펜촉은 로듐 도금되어 은색으로 보이는 탓에 간혹 스틸촉으로 오인하기도 하는데, 실제론 18K 금촉입니다. 구조적으로 노브를 누를 때마다 돌출과 인입을 반복하는 메커니즘이라 일반적인 펜촉보다 훨씬 폭이 좁고 길쭉하게 생겼습니다. 측면이 널찍하면 드나드는 과정에서 간섭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듐 도금된 파이롯트 캡리스의 18K 펜촉 ⓒ 김덕래


조금씩 조금씩 펴다 보면 원래 모양에 가까워집니다. 만년필이란 도구는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마음을 이해하는 것만 같습니다. 대화하듯 매만지다 보면 어느 순간 반듯해집니다.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펜촉을 다시 쓸 수 있게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게 인내심입니다. 그저 손 한두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완벽히 펜촉을 복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만년필 수리는 마법이 아니라, 시간과의 대화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내 펜을 스스로 고치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요령은 알아야겠지만,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와 꽤 만만찮은 시간을 감수하기만 하면 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그 또한 당연합니다.
 

수리가 끝난 파이롯트 캡리스 만년필 ⓒ 김덕래

 
정상적인 펜촉은 상판 한복판을 가르고 있는 슬릿 사이가 아주 살짝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맞닿으면 잉크가 나오질 못하고, 과하게 벌어져 있어도 제대로 된 흐름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닿을 듯 말 듯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부드럽고, 끊김 없이 잘 나오는 상태가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이란 이유로 지나치게 격의 없이 대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기 십상이고, 또 너무 왕래가 없어도 소원해지기 마련입니다. 적절한 거리의 중요성은 만년필에서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적절한 말과 글의 온도는 거리를 좁혀줍니다
 

정상적인 만년필은 펜촉이 종이에 닿기만 해도 술술 잘 나와야 합니다. ⓒ 김덕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주기(週期)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던 사람은 일주일이 되면 생각나고,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던 사람은 일 년이 되면 만나야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우리가 지금 힘든 건 일 년에 몇 번씩 봐오던 얼굴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얼굴을 마주하고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 하겠습니까만, 차선책으로 목소리라도 자주 들려주세요. 그걸로 부족하다 싶으면 그저 짧은 몇 줄의 손글씨를 적어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활자화된 글씨는 정보를 전달할 뿐이지만, 손으로 쓴 글씨는 얼굴 못지않게 효과적으로 마음을 전달합니다. 메일로도, 문자메시지로도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다 싶을 땐, 종이를 펼치세요. 손에 잡히는 아무 펜이나 들고 몇 줄 써도 좋을 일입니다.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내일 마저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적절한 때맞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말을 아껴야 할 때가 있고, 또 참는 게 미덕이 아닌 순간도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어쩌면 쇠털같이 많은 날 중 하루일 수도 있지만, 인생은 짧습니다. 금쪽같이 귀한, 선물 같은 한때라 생각하세요.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하면 잠 못 드는 이는 결국 나고, 상황에 맞춰 배려하며 건넨 말 한 마디로 가장 큰 득을 보는 것도 언제나 내 쪽입니다.

적당한 거리만큼 적정한 온도도 중요합니다. 식은 설렁탕은 구수하기는커녕 비린 맛이 납니다. 아무리 겨울이라고 미지근한 냉면이 제맛일 리 없고, 차가워진 육개장이 참맛일 수 없습니다. 적절한 말과 글의 온도는 거리를 좁혀줍니다. 너무 춥거나 더운 날에도, 또 펜촉의 간격이 지나치게 좁거나 떨어져 있어도 제대로 쓰기 힘든 것처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온도와 거리는 다 비길 바 없이 중요합니다.

절기상 '입춘(立春)'이 벌써 지났습니다. 지금의 이 서늘함이 아직 한참 더 가겠지만, 또 어김없이 늦추위가 거르지 않고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봄이 어느새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시나브로 봄이 반듯하게 섰습니다. 이보다 더 펄떡펄떡 기운 나는 소식은 아직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 파이롯트(Pilot)
- 1918년 '나미키 료스케(Namiki Ryosuke)'에 의해 만들어진 필기구 제조사. 파카와 함께 70년대 국내 졸업식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100년이 훌쩍 넘는 내력을 지닌 업체답게 가격대와 선택지가 다양한 모델들을 다수 보유한, 일본을 대표하는 문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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