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1 13:51최종 업데이트 21.01.2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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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빛 피디는 2016년 10월 드라마제작 현장의 비인간적 노동 현실을 고발하며 세상을 떠났다. 오른쪽부터 고 이한빛 피디, 동생 이한솔, 어머니 김혜영, 아버지 이용관씨. ⓒ 이한솔

  
형의 비보를 들었을 때 그는 현역 사병이었다. 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에 "집에서 연락이 왔으니 급히 가보라"는 얘길 들었다. 형에게 사고가 발생했는데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형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CJ ENM의 tvN 드라마 신입 조연출로 일하고 있었다. 충남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단편적이다. 형이 위독한 상태라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허둥지둥 올라왔지만, 병원에서 마주한 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26일 형 한빛은 27세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뒤, 이한빛 피디의 동생 이한솔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이자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 이용관(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씨는 지난 12월 11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은 해를 넘겨 이달 8일까지 29일간 이어졌다. 어머니 김혜영씨는 얼굴빛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남편을 지켜보며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했다.


왜 가족 모두 이렇게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일까? 비정규직 스태프들을 비인간적 노동현장으로 내몰아야 하는 관리자로서의 삶을 자책하며 세상을 등진 한빛씨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까? 왜 세상의 힘든 짐들은 모두 유족의 몫이어야 할까?

지난 12일, 미디어 기업과 언론사 빌딩이 즐비한 서울 상암동에는 눈이 곧 쏟아질 듯 잿빛 구름이 가득했다. DMC산학협력연구센터에 입주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로 이한솔 이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한빛 피디가 근무하던 곳도 바로 지척에 있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만난 이한솔 이사. ⓒ 와글

  
아버지의 단식농성 결심에 한바탕 설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아래 한빛센터)는 2018년 1월 24일 설립됐다. 그날은 고 이한빛 피디의 생일이었다. 한빛센터는 제법 널찍한 공간에 회의실과 상담실, 라운지, 그리고 작업시간이 불규칙한 방송노동자들이 잠깐씩 눈을 붙일 수 있는 휴게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 아버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오늘 건강검진 결과가 나올 거래요."

나는 그의 아버지 이용관씨를 만난 적이 있다. 2017년 7월 어느 무덥던 날,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던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위해 그의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이용관씨는 간농양을 앓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면역체계가 무너져서 간에 고름이 들어차는 증세라고 했다.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그때 알았다.

- 간도 안 좋으신 분이 한 달 가까이 단식을 하셨으니... 단식 들어가기 전에 상의는 하셨나요?

"그것 때문에 집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렀죠. 제정본부(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에 얘기해서 제가 아버지 대신 (단식농성)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단식농성 같이 하실 다른 분들은 50대지만, 아버지는 간도 안 좋고 65세 고령인데 단식을 하면 어떡하냐고,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난다고요. 저는 젊으니 단식해도 괜찮지만..."

- 그러니 뭐라시던가요?

"김미숙 어머니(고 김용균씨 어머니) 혼자 단식하시게 할 순 없다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유족이 필요한데, 아버지가 하는 게 맞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우릴 안심시키려고 하신 말씀이 '하다가 못 버티면 중간에 나오겠다'고, '그때 네가 들어가면 되지 않겠냐'고 하셨죠."

- 그런 혹한에 목숨을 건 단식을 하셨는데,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고 보세요?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입장에서는 그나마 이 정도 선에서 단식을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죠. 단식이라도 없었으면 전혀 논의가 안 된 채로 2월로 넘어갔을 테고, 그때 가면 또 보궐선거니 뭐니 해서 흐지부지될 게 뻔하니까요. 이렇게 시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정의당과 유가족들, 민주노총, 시민분들 덕분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아직은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들이라."
 

인터뷰 중인 이한솔과 이진순(우측) ⓒ 와글

 
- 5인 미만 사업장은 제외되었고 갖가지 유예조건들까지 주렁주렁 달렸죠. 법안 이름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기업'이 빠진 채로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고요.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이 '안전이냐, 기업이냐'의 선택지에서 무엇을 택하는지 명확히 보여줬어요. 이쪽을 대변해야 할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저쪽을 선택한 셈이죠."

- 법안 국회 본회의 심사를 앞두고 5일 열린 제정본부 기자간담회에 한솔님도 참석하셨던데요. '경영책임자의 안전, 보건조치 의무가 반드시 명시돼야 한다'고 발언하신 걸 기사에서 봤어요. 결국, 그 조항도 통과되지 못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경영 총책임자한테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조직의 문화나 시스템들이 큰 영향을 받잖아요. 안전관리 책임자한테만 책임을 묻고 '꼬리 자르기' 하는 걸로는 안전을 위한 시스템 개선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계속해서 봐 왔고요. 저희가 CJ ENM이랑 싸울 때도 대표이사가 공식사과를 하고나서부터 회사측 협상담당자들의 직위가 바뀌고 대책의 수위가 달라졌거든요."

이한빛 피디가 세상을 뜬 뒤 CJ ENM 측에서는 이한빛이 "평소 근무 태도가 불량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직원이었다며 모든 책임을 개인 탓으로 돌렸다. 그런 태도를 8개월 만에 뒤바꾼 것은 이한솔이 주도한 대책위(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활동 덕분이었다.

청년유니온을 비롯해 35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구성된 대책위에서는 이한빛의 명예회복, 사측의 공식사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추모문화제와 1인시위, 홍보활동을 펼쳤다. 마침내 2017년 6월 14일 사측은 공식사과와 함께 방송제작 환경개선을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최고경영자가 전면에 나서야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형을 그대로 보낼 순 없었다

- 이한빛 피디가 돌아가셨을 때 한솔님은 군 복무 중이었는데, 대책위를 만들고 진상조사를 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앞장서서 하실 수 있었어요? 이전부터 형한테 뭐 좀 들은 바가 있었나요?

"아뇨. 제가 군에 입대한 게 2015년 12월인데 그때 형의 방송사 합격 소식을 듣고 들어가긴 했어요. 그러곤 볼 시간이 거의 없었죠. 어쩌다 가끔 휴가를 나와도 난 술 마시고 자고 형은 새벽에 왔다가 나가곤 했으니까."

- 근데 어떻게...

"사실 유서를 직접 보기 전까진 그저 멍했어요. 유서를 보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죠. '잘못하다간 형을 이상하게 훅 보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 사람들이 얘기하는 형은 내가 알던 형과 너무 다른 모습으로만 그려지니까 너무 이상한 거예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형을 이대로 떠나 보낼 순 없다는 생각, 그리고 CJ는 대기업이니까 안일하게 대응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동안 모아놨던 휴가를 신청해서 2주 정도 시간을 내고, 청년유니온이나 관련 단체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죠. 그때부터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나 진상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회사는 이한빛 피디의 근태기록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고 내부 사람들과의 접촉도 불허했다. 알음알음 이한빛 피디와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확보했고 청년유니온 활동가들과 함께 녹취록을 풀어 기록으로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를 모아서 2017년 4월 18일 대책위 이름으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한빛 피디 죽음의 원인이 방송제작 현장의 반인권적 제작환경에 있다는 점을 세상에 알렸다.
  

2017년 4월 18일 군에서 휴가를 나온 이한솔(좌)은 청년유니온등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대책위를 구성해서 이한빛피디 사망사건 진상에 관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의 옆이 어머니 김혜영씨. ⓒ 이한솔

 
-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대개 망연자실, 맥 놓고 있기 십상인데 참 기민하게 대응하셨네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사실은 그때 제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왔다갔다 했어요. '내가 알던 사람은 (회사에서 비난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한편으론, '형이 정말 그런 사람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도 컸죠.

내가 아무리 친동생이라 해도, 형을 최근 1년반 동안 거의 못봤고 저 사람들은 형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데 '저 사람들이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형이 떠나고 4월 18일 기자간담회를 할 때까지 반년이 걸렸는데, 반년 내내 인터뷰를 하러 다닌 건 아니고 그런저런 생각 때문에 자기확신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 아, 정말 힘든 시간이었겠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도급업체 분들 만나면서 'CJ 직원들, PD 연출부 중에 그나마 우리를 사람 취급해주는 사람은 한빛씨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부쩍 힘이 나고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 전까지 형을 의심했던 게 정말 미안하기도 했고요."

이한빛의 죽음은 그간 묻혀왔던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의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형편없는 급료, 변변한 계약서도 없는 고용과 해고의 실태를 밝혀내는 불씨가 됐다. 가족들은 그 불씨를 어떻게든 이어 나가자는 데 이견이 없었다. CJ에서 받은 위로금 전액과 CJ에서 추가로 출연한 기금을 모아 한빛미디어인권노동센터 설립에 쏟아부었다. 한빛센터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으로 담아낼 수 없는 방송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제도개선을 위해 활동해 왔다.

- 그간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 확산에 기여하고 전반적인 노동조건 개선에 앞장 서왔는데. 그 외에 새로 한빛센터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지금까지 제일 큰 이슈는 '시간'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제작 기간과 장시간 노동. 아직 52시간제를 못 지키는 곳도 많지만, 옛날 120시간씩 찍다가 80시간, 70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건 확실하고요. 앞으론 산업안전 문제에도 역점을 두려고 해요. 제작현장에서 다치는 사고도 많고 4대보험 적용이 안 되는 직종도 많거든요. 중장기적 목표로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 비정규직이나 아동청소년 대중문화 예술인의 문제를 의제화하는 것도 계획하고 있고요."

민달팽이들의 꿈

- 어딜 가든 '고 이한빛 피디의 동생 이한솔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형의 이름이 걸린 센터를 만들어 일한다는 건 너무 어깨가 무거운 일일 것 같아요. 가끔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들 때 없어요?

"제가 세월호 유족분들이나 형제 자매분들을 자주 만나는데, 다들 그런 고민이 없지 않죠. 제 경우엔 '제 삶의 영역'과 '형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영역'을 분리하는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형의 이름을 걸고 하는 활동에서는, 형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늘 생각하면서 그걸 기준으로 삼곤 하죠. 그와 다른 저만의 영역이 따로 있으니까 형의 그늘이 저를 옭아맨다든가 하진 않아요."

- 그러니까 한빛센터가 형과 겹치는 영역이라면, 한솔님 자신의 고유영역이라는 건 청년주거운동을 하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겠군요. 하나는 형과 같이 쓰는 방, 하나는 혼자만의 방? (웃음)

"아, 그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요. 제 경우엔 두 가지 모두 비슷한 일들이라서 운이 좋은 셈이고요. (웃음)"

청년주거운동은 이한솔의 오랜 관심 분야다. 2011년 연세대 입학 후 주거문제를 다루는 학생모임 전단을 보고 우연히 참여한 것이 현재 '민달팽이 유니온'의 전신이다. 전통적인 학생운동 조류에서 벗어나 '청년유니온' '민달팽이유니온' 등을 통해 청년 당사자의 노동, 주거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이 무렵부터 시작됐고, 그런 흐름 속에서 이한솔은 201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2013년 12월 연세대 총학생회 출범식 직후, 가운데 꽃 든 이가 이한솔 ⓒ 이한솔


- 민달팽이유니온이 청년 주거운동을 하는 단체란 건 알고 있어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은 유니온과 어떤 관계죠?

"동일한 비전을 가진 두 개의 팀인데요. 민달팽이유니온은 한국사회 세입자들을 지원하고 권익을 대변하고 교육하고 상담하는 비영리 민간단체예요. 일종의 세입자협회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되죠. 이와 별개로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아래 민쿱)은 부동산시장에 새로운 대안모델을 직접 공급하고 운영하는 일종의 기업이죠. 협동조합 형태로 된."

- 직접 집도 설계하고 짓고 분양한다는 말씀이죠? 그럼 주거형태는 주로 쉐어하우스 같은 건가요?

"초창기에 분양했던 건 대체로 쉐어하우스형이었는데 지금은 쉐어형보다 단독형(원룸형)이 더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가 일반 영리형 쉐어하우스하고 다른 점은 첫째 임대료에 제한이 있고요, 둘째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제공되죠. 이런 걸 주택정책 용어로는 '사회주택'이라고 불러요."

- 사회주택이요?

"민간주택과 공공주택의 중간쯤에 있는 형태인데, 공공화된 토지를 받아서 건물을 짓는다든지 공공의 대출을 저리에 받아서 시세의 70~50% 정도 임대료로 공급하는 거죠. 해외에서는 노조나 사회단체, 비영리조직들이 사회주택을 공급하는 일이 흔한데, 한국에선 LH나 SH 같은 공사가 공공주택을 100% 공급해 왔기 때문에 사회주택이라는 개념이 낯설죠."

- 그럼, 민쿱에서 분양하는 주택에 살고 싶으면 회원가입하고 회비 내면 되나요? 회원은 몇 명이나 되요?

"민쿱회원이 되려면 우선 민달팽이유니온에 가입을 해야 해요. 지금 민쿱은 440명, 민달팽이유니온은 750명 정도 됩니다. 총 17채의 달팽이집(민쿱에서 분양하는 주택)이 있는데 거주자는 230명 정도고요."

- 생각보다 그렇게 규모가 큰 건 아니네요.

"저희는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전체 (사회주택) 판을 키워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저희가 2014년에 첫 달팽이집을 지었는데 그 사례를 토대로 서울시 사회주택조례가 2015년에 만들어졌거든요. 조례가 만들어지고 나니 사업환경이 좋아져서, 지금은 60개 정도 사회주택 회사가 총 5000호 정도 공급을 하고 있어요."

- 그러니까 달팽이집을 짓고 커뮤니티 관리시스템을 만들고 하는 게 이윤 증대나 성과 건수를 늘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람직한 주거의 실험적 모델들을 선보여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란 걸 보여주기 위한 거군요.

"그렇죠."

민쿱에서 분양하는 달팽이집은 각 지점마다 모양도 구성도 다르다. 설계를 하기 전, 입주자들의 의견을 모으는 워크샵을 열어 그들이 원하는 조건에 맞게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운영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제시할 뿐, 입주자들이 주체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공동의 룰을 정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달팽이집은 작지만 따뜻하고 평화로운 주거공동체를 꿈꾼다.
  

이한솔은 1인 가구 비중이 높은 청년세대가 주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감수성으로 모든 주거취약계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와글

 
"유학이나 로스쿨? 그게 뭐라고요!"

- 형의 죽음이나 한빛센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전업적인 시민활동가의 삶을 택했을까요?

"저도 그게 고민돼서 군에 입대했던 거예요. 들어가서 시간을 좀 두고 생각을 해보려고요. '민달팽이운동을 하면서 전업활동가로 살까?' 하는 생각과 '전문가가 될 준비를 할까?' 하는 생각이 반반씩 있었죠. 어른들은 늘 그러시잖아요. '큰 역할을 맡아서 영향력을 키우고 더 큰 일을 하라'고요.

그런데 형의 사건이 있고나서 바뀐 게 있다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걸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어르신들 말씀대로 살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로스쿨이든 유학이든 선택하려면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포기하고 가야 할 텐데 그렇게 했을 때 과연 내가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대체 그게 뭐라고! 지금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선택들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 개인적으로 힘들지 않으세요?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사람마다 각자의 어려움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어려운 문제들이 내겐 아주 소소한 문제일 수 있어요. 30대 청년으로서, 활동가로서, 유족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형이 품었던 생각들을 내 한편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게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아요. 제가 더 기분이 좋을 수 있고 스트레스가 덜하고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한 거예요."

- 더 행복한 삶이라고요?

"형도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에 있으면서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반대급부가 있잖아요. 저는 좀 더 평등한 환경에서, 좋은 일은 많이 못 해도 못된 일은 안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제가 버티고 있으면 누군가 날 의지하러 올 사람도 있고 그러면 그 사람하고 더 나은 일상을 찾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죠.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나쁜 일 안 하면서 부끄러움 없이 사는데, 그렇게 살아도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으니까 별로 문제될 게 없어요. (웃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에서 뭘 해서 얼마나 더 행복하겠어요? 이런 삶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는 길에 함박눈이 벚꽃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 가벼웁고 연약한 눈송이들이 번잡하게 아우성치는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핏대 울리는 아우성을 가만히 달래듯이, 다독다독, 다독다독.....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진순씨는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으로, 와글 간행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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