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1 08:16최종 업데이트 21.01.2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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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지난 8일자 위안부 배상 판결과 관련해 "한·일 간에 풀어야 할 현안들이 있다"라며 "우선, 수출규제 문제가 있고 강제징용 판결 문제가 있다"라고 한 뒤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언급했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내각의 2015년 12월 28일자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발표를 통해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18일 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 정부는 (2015년의) 그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라며 "그런 토대 위에서 이번 판결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도 동의할 수 있는, 그런 해법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한·일 간에 협의해 나가겠다"라고 발언했다.


또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그런 부분들이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다소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카이 마나부 관방 부(副)장관은 같은 날 오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 신년회견에서 나온 일한 관계 발언에 유의하고 있다"라고 한 뒤 "양국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돌려놓기 위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토대로 앞으로도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력히 요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학도지원병 강제 징병

문 대통령의 발언에도 원칙을 벗어난 부분이 있지만, 일본 정부 부대변인의 발언은 일본이 아직도 가해자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해법은 솔직한 사죄와 배상이며, 적절한 대응을 촉구 받을 당사자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유의'해야 할 것은 문 대통령의 발언보다는 식민지배의 심각성이다. 위안부 및 강제징용뿐 아니라 여타 사안에서도 그 심각성이 많이 드러난다. 한국인들의 고통을 가중한 학병(학도지원병) 강제동원도 그중 하나다. 이 역시 일본이 '유의'해야 할 대상이다.

식민지배 피해자인 학병들은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어느 정도 사회적 편의를 누린 이들이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저항자가 배출됐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보다 학병 피해자 중에서 훨씬 높은 비율의 항일투사들이 배출됐던 것이다. 이는 학병들 역시 식민지배를 당연히 혐오했으며, 그들과 처지가 비슷한 지식인이나 경제적 중상류층도 그런 정서를 갖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본에 대한 학병 피해자들의 원한이 증폭된 시점은 77년 전 이맘때였다. 약 4천 명의 한국 학생들이 일본군에 강제 징병된 날이 1944년 1월 20일이었다. 말로는 자원이니 지원이니 했지만 실상은 강제 징병과 다를 바 없는 일이 이날 일어난 것이다.

강제 동원된 학병의 규모는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들보다 훨씬 적지만, 바로 이 학병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저항자들이 나왔다. 2016년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6집에 실린 조건 동국대 강사의 논문 '일제 말기 한인 학병들의 중국 지역 일본군 부대 탈출과 항일투쟁'에 따르면, 1944년 1월부터 9월까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은 66명이었다.

1944년 9월 이후에도 학병들이 계속 탈출했으며, 일본군이 학병들의 동요를 우려해 탈출 규모를 정확히 공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탈출 규모는 훨씬 더 컸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목숨을 걸어야 탈출이 가능했으므로, 마음으로는 간절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학병들도 많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 논문은 "확인된 수치만을 기준으로 패전 때까지 예상 탈출 인원을 추정하면,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 학병의 규모는 최소 150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추정했다. 피해자 규모가 약 4천 명임을 감안하면, 탈출 규모가 상대적으로 꽤 크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반일 종족주의> 제9장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에서 정안기 전 서울대 연구원은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학도 지원은 동일한 제국신민에 대한 국민의무의 차별 또는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한 뒤 "학도지원병은 입영 이후 간부후보생을 자원해 일본군 초급 장교로 입신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당시 세간에서는 학도 지원을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도 했"다고 정안기 연구원은 말한다.

하지만 정작 학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도 일본 학생들처럼 황군에 입대하게 됐다, 이제야 민족차별이 해소됐다, 입신출세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겼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들 사이에서 저항자가 많이 배출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군에서 독립군으로

1944년 9월까지 탈출했다고 일본군이 발표한 66명 중에서 21명은 조선에서, 2명은 일본에서, 나머지 43명은 중국에서 탈출했다. 항일전쟁이 가장 치열한 중국 전장에서 학병들의 탈출이 빈발했기 때문에, 이들이 일본 군복을 벗고 항일전사의 군복으로 갈아입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이들의 항일투사 변신은 독립운동 진영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적지 않은 감명을 줬다. 세계 패권국이 되기 전이었고 의식이 지금보다 건강했던 당시의 미국인들도 학병들의 항일투쟁 가담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는 광복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을 촉진하는 요인이 됐다.

임시정부 광복군은 1940년 9월 조직됐다. 1942년 12월에는 김원봉의 부대가 합류했다. 하지만 광복군은 항상 병력이 부족했다. 이국땅에서 한국 군대를 조직하는 일은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백범 김구도 그것을 늘 고민했다.

그런 김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일이 1945년 1월 30일 있었다. 가슴에서 일장기를 떼는 장면만 봐도 감동이 넘칠 그 시기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인 청년들이 충칭(중경) 임시정부 청사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의 여러 판본 중에서 나남 출판사판(版) <백범일지>에 따르면 그 상황은 아래와 같다.
 
어느 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화북(북중국) 각지 왜군 중에(서) 한인 학병 청년들이 모험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으로 오는 자들을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다.
 
이 숫자는 50명을 넘었다. 이국땅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인 청년 50여 명이 갑자기 집단으로 출현했으니 만 69세의 김구가 얼마나 뭉클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외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줬다. <백범일지>는 "중국의 각계 인사들이 50여 명 청년의 환영회를 중한문화협회 연회장에서 개최하니, 서양의 각 통신사 기자들과 각국 대사관들도 호기심으로 참석"했다고 말한다. 환영식에서 나온 어느 학병의 발언은 참석자들의 감동을 배가했다.
 
일본에 유학 중 장병으로 전장에 나서게 되어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러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님들이 비밀히 교훈하길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의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하명을 받았습니다.
 
<백범일지>는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의 감격이 넘쳤"다고 한 뒤 이것이 광복군에 대한 미군의 관심을 높이고 학병과 미군이 비밀훈련을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학도병을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오른쪽) ⓒ 의문사위 자료사진

 
그 50여 명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도 있었다. 명문가 며느리로서 시아버지 김가진 및 남편 김의한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45년) 1월 말,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된 학병 출신 청년 광복군 50여 명이 안휘성 부양으로부터 5천 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중경에 도착하였다. (중략) 이들 중에는 신학교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을 찾아온 장준하라는 청년도 있었다.
 
환영식에서 발언한 학병은 조부모와 부모의 권유로 독립군에 투신했지만, 또 다른 학병들은 '님의 침묵'에 가슴 애달파 하는 승려 시인의 권유로 그렇게 했다. 역사 저술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임중빈의 <만해 한용운>에 그 일화가 극적으로 이렇게 재구성돼 있다.
 
하루는 학병을 나가게 된 청년 일행이 찾아왔다.
"자네들 지원해 놓고 왜 나를 찾아왔지?"
"최후로 선생님의 교훈을 받고자 하여 찾아왔습니다."
"······"
이윽고 만해는
"으흐흐흑 ·······."
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것은 바로 통곡이었다. 단장의 오열이었다. 학생들도 따라 울고 만해는 목이 쉬도록 울었다. 한참 후
"개죽음이나 하지들 말게나."
하는 그의 말에는 곡진한 기구(祈求)가 스며 있었다.
"총부리를 왜(倭)로 향해 쏘아 대게."
그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그 학생들은 대부분 중경으로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총부리를 일제에 향하여 겨누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제국주의가 볼 때, 학병들은 한국 청년들 중에서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는 편에 속했다. 그런 그들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일제에 저항했다. 그중 상당수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에 가담해 '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식민지배가 얼마나 부조리했으며 또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주었는지를 웅변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고통과 시련을 안겨준 일본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뿐이다. 일본이 '유의'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라 자신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겨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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