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5 13:06최종 업데이트 20.12.2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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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가 지난 1995년 12월 2일 연희동 자택 앞에서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두환과 함께 연상되는 달은 5월과 더불어 12월이다. 5월은 1980년 한 해와 연결되는 데 비해 12월은 여러 해와 연결된다. 그가 뉴스를 대거 생산한 12월은 쿠데타를 벌인 1979년 12월, 국회 5공·광주특위 합동청문회에 출석한 1989년 12월, 5·18 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 12월, 사면·복권이 있었던 1997년 12월이다.

이 중에서 1995년 12월은 '전두환의 달'이라 해도 될 정도로 그가 한 달 내내, 그것도 다종다양하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그해 12월 1일에는 전두환이 검찰 소환장을 받았고, 2일에는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 성명'을 통해 검찰 소환을 거부했다.


3일에는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잠옷 바람으로 체포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 수감은 전혀 다른 성격의 또 다른 뉴스로 이어졌다. 11월 16일 수감된 노태우가 구속 첫날 김치·두붓국·두부조림을 말끔히 비운 것과 대조적으로 전두환은 수감 첫날부터 위장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의 단식은 '정치인 단식 최고기록의 경신 여부'로 관심을 끌다가 12월 20일 경찰병원으로 이송되는 결과를 낳았다. 학살 주범 전두환이 운동선수처럼 신기록 경신 여부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기록 경신에 대한 관심은 병원 이송 뒤에도 계속됐다. 12월 23일 자 <경향신문> 데스크 칼럼 '전씨의 단식'은 "전씨는 지난 83년 그로 인해 23일간 단식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기록을 깰 태세이며, 당국의 강제급식을 불가피하도록 몰고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보다 3일 더 단식하는 '신기록' 수립과 함께 병원 이송 9일 뒤 그의 단식은 '결승점'을 통과했다. 이 단식은 그가 참회와 반성이 아닌 성깔과 집념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이 시기에 국회와 정부에서는 전두환 처벌과 더불어 5·18 해결을 위한 입법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2월 19일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전두환이 교도소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20일에는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됐다.

21일에는 국무회의가 특별법을 심의하고 대통령이 공포했다. 이로써 공소시효 정지, 기념사업, 배상 문제, 5·18 진압 가담자 상훈 박탈 등에 관한 본문 7개 조, 부칙 1개 조의 5·18 특별법이 완성됐다.

5·18 특별법 제정은, 전두환에 관한 뉴스가 많기도 했지만 다종다양하기도 했던 1995년 12월에 전두환 처벌 및 5·18 해결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돼야 할지를 가리키는 지시등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종 법률인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0년),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1995년),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과 더불어 적지 않은 성과를 낳았다.

여타 법률들과 함께 5·18 특별법은 5·18 진상이 상당 정도 규명되고, 책임자 처벌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명예회복과 기념사업과 배상이 일정 정도 이뤄지는 데 기여했다. 또 5·18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꾸었다. '광주사태'라는 표현이 어느덧 격감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대세가 됐다.

전두환의 태도

하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는 도출하지 못했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5월의 진실이 아직 덜 규명됐음은 물론이고, 암매장된 시신들도 여전히 발굴되고 있다. 5·18에 대한 일각의 모독도 여전하고, 이 사건을 북한군 소행으로 모는 괴이한 발상도 회자되고 있다.

이런 부조리한 현상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게 전두환의 태도다. 만약 그가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5·18을 모독하고 5·18을 북한과 연계하는 사람들의 기세가 아무래도 위축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파렴치할 뿐 아니라 변함없기까지 한 태도는 한층 더 지지자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들고 있다. 전두환은 수구·보수세력의 구심점 중 하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전두환이 그런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것 중 하나는 1995년 12월의 일이다. 이때 제정된 5·18특별법은 현대사의 잘못을 바꾸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지만, 전두환의 비뚤어진 인식을 오히려 조장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자기방어를 위해 그렇게 한 측면도 있겠지만, 1995년 12월의 전두환은 5·18특별법 제정을 정치보복으로 간주했다. 골목 성명 마지막 문단에서도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제5공화국을 책임졌던 저에게 모두 물어주시고, 이 일을 계기로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처벌과 5·18 해결을 정치보복으로 규정하는 문장으로 골목 성명을 끝맺음했다.

그런 인식이 이순자 회고록인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순자는 1995년 12월 1일 자기 집에 날아온 검찰 소환장을 두고 "우리 가족을 향해 또 한 번 정치보복의 광풍이 불어 닥친 것"이라고 규정한 뒤 광풍의 진원지로 김영삼 대통령을 지목했다.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해 6월 27일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민자당은 참패했다. 정국은 다시금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즈음 연희동을 방문한 주영복 전 장관이 그분에게 이상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선거에 참패한 후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김 대통령에게 '국면 돌파를 위한 보고서'라는 것이 올라왔는데, 그것이 보통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순자는 "그 내용은 이러했다"라면서 주영복 전 국방부 장관의 브리핑을 요약했다. 그중 한 대목은 "12·12와 5·17, 5·18을 다시 문제 삼아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하고, 5·6공 세력들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총선에 출마하지 못 하게 한 후 새로운 정계 개편을 통해 민주계 중심의 정권 재창출을 성공시킨다"라는 부분이다.

그가 정치보복을 떠올린 이유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전두환은 대통령 시절의 김영삼을 '아군'으로 간주했다. 과거에는 적대 진영의 민주화 투사였지만 민주정의당(민정당)과의 1990년 3당 합당으로 자기편이 됐다고 인식했다. 골목 성명에서도 "김영삼 정권은 제5공화국의 집권당이던 민정당과 제3공화국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야권의 민주당, 3당이 지난 과거사를 모두 포용하는 취지에서 '구국의 일념'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자당 정권은 5·18 피해자 세력이 아닌 가해자 세력을 대표했다. 그런 집단이 5·18특별법을 추진하는 모습을 전두환은 모순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5·18 해결에 대한 그의 태도에 한층 더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3개월 뒤인 1993년 5월 13일 대국민담화에서 '광주 문제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5·18 진상 규명은 역사에 맡기자'라고 발언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1995년 12월의 김영삼한테서 모순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 부부는 그해 6월 지방선거와 12월 5·18 특별법 제정을 연결해 생각했다.

전두환은 노태우 정권 하의 국회 광주 특위가 추진한 5·18 진상 규명에 대해서도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순자의 회고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이순자는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도 그분을 백담사행이라는 절벽까지 몰고 가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소위 조직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었다"라며 "그분 퇴임 직후부터 시작해 수개월간 단 한마디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대중매체를 통해 계획적이고 줄기차게 악의적으로 그분 명예를 훼손했었다"라고 분노했다.

5·18 해결을 위한 노력은 1980년부터 있었다. 1987년에 6월항쟁이 일어나고 1988년에 민자당이 제13대 총선에 참패한 뒤에는 그 노력이 한층 가열됐다. 이 분위기는 1995년 12월에도 있었다.

전두환도 1995년 12월에 자신을 압박한 최대 요인이 국민적 분노였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우군인 노태우 정권에 이어 역시 우군인 김영삼 정권이 그런 분노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신과 정치보복을 떠올렸다. 자신에 대한 압박을 정치공세로 규정하는 이런 인식이 5·18에 대한 파렴치하고 완고한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5·18 학살로 이어진 12·12 및 5·17 쿠데타를 계승하는 민정당 정권 및 민자당 정권이 5·18 해결을 추구하는 모습은 전두환 부부뿐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모순된 장면이다. 이 같은 모순은 6월항쟁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이 붕괴할 정도로 6월항쟁이 좀 더 강력하게 전개됐고 그 결과로 등장한 민주적 정부가 전두환 처벌과 5·18 해결을 주도했다면, 전두환의 신상은 물론이고 그의 태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만 도출하고 전두환 정권 몰락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두환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처리할 책임이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의 몫으로 떨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5·18 가해자 집단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는 이 모순이 5·18 해결의 지지부진은 물론이고 전두환의 파렴치를 강화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순이 6월항쟁의 한계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번 시작한 개혁은 끝까지 밀어붙여야 뒤탈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명제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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