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1 20:15최종 업데이트 20.11.2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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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황보출 ⓒ 민병래


  

그녀는 일기와 시 한줄을 매일 쓰려 노력한다. ⓒ 민병래

 
올해 88세인 황보출 할머니는 지난 10월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을 펴냈다. 2016년 <「가」자 뒷다리>에 이어 두 번째 책이다. 눈도 침침하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나이에 벌써 두 권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황보출의 '시 쓰기'를 보노라면 99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로 일본 열도에 감동을 주었던 시바타 도요가 떠오른다.
   
두 사람은 묘하게 공통점이 많다. 어린 시절 시바타 도요는 음식점 더부살이를 했고, 황보출은 남의 집 몸종살이를 했다. 또 두 사람은 남편과 사별해 20여 년 이상을 혼자 살았고 자식의 권유로 글을 깨우치거나 시를 쓰게 되었다.

다른 점도 많은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황보출 할머니가 시바타와 달리 70세까지도 까막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막내딸의 권유로 서울 이문동에 있는 '푸른 어머니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전까지는 가, 나, 다도 몰랐다. 그녀의 말을 빌면 '가'자 뒷다리도 몰랐다. 한글을 깨우치며 기쁨을 느낀 그녀는 자서전 쓰기와 문학수업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설렜던 시 쓰기 첫 번째 시간은 <용기>에서 이렇게 그려졌다.
 
오늘 학교에서 시를 쓰라고 하는데
내 머리가 어지럽다.
느낌을 쓰라는데 느낌이 무엇인고?
모른다. 머리를 굴려도 잘 모른다.

그래도 할머니는 용기를 내 연필을 꼭 잡고 한 글자씩 팔십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갔다. 신기하게도 가슴 속에 맺혔던 한이 한올한올 풀려나가고 마음이 밝아졌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1933년 경북 포항의 구룡포읍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난 때문에 아홉 살 때부터 식모살이와 행상을 시작했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고등어, 꽁치, 오징어를 한 '다라이' 받아서 팔았다. 나중에는 떡이나 담배도 팔고 그물 보수일도 했다. 시 <배고픈 슬픔>은 그때 장면을 애달프게 그렸다.
 
부잣집 가서 일해 주고 밥 얻어 와
바다 물나물 잔뜩 넣고 죽 끓여
가족이 배부르게 먹고 나니 눈이 뜨인 것 같았네

김용택 시인에게 섬진강은 시를 쓸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황보출 할머니에게는 구룡포와 가난이 그 노릇을 했다. 그래서 <말봉재고개>와 같은 작품이 나왔다.
 
봄나물 하러 밥 한 그릇 삼베 보자기에 싸고
엄마랑 둘이 산으로 갔네.
이 산 저 산 다니면 배가 고파서
냇가로 내려와 두 모녀가 밥을 먹었네.
엄마는 나에게 많이 먹으라 하네.
나는 엄마가 많이 힘드니 엄마가 많이 먹으라고 했네.

두 모녀가 얼마 안 되는 밥을 서로 먹으라고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눈에 선연하다. 이렇게만 끝났으면 그저 슴슴한 풍경화에 머물렀을 텐데, 황보출 시인은 마지막 구절에서 '산에 있는 배고픈 꽃들이 다들 입 벌리고 있네'라고 끝맺었다. 가난한 기억을 풀어놓는 데 머무르지 않고, 모녀가 봄날 진달래 개나리와 배고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풍경을 그려냈다.

겨울 빨래와 시어머니
 

지난 10월 두번째 책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이 나왔다. ⓒ 민병래

 
황보출 할머니는 나이 스물, "땅마지기 있는 집이니 밥은 곯지 않을 것"이라고 등 떠미는 부모님 성화에 홀시어머니에 상처를 했던 22살 남정네와 결혼을 한다. 시집간 다음 날부터 시어머니가 하루 열 가지도 넘는 일을 시키는데 새댁은 마음만 분주하고 발걸음은 종종댔다. 나중엔 인자하신 분이란 걸 알고 의지를 많이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진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삼 삶을 때>는 새댁 시절 아픔이 절절히 담겨있다.
 
잠자고 싶은 데 잘 수도 없네
잠은 쏟아지고 허벅지에 피가 나고 일은 끝이 없고
마당에 나와서니 달은 밝은데
앞산이 첩첩 뒷산이 첩첩
친정 생각만 나면서 눈물이 핑 돌고

우리네 여인네들이 제일 어려웠던 일이 엄동설한에 냇가에서 빨래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세탁기도 건조기도 온수도 없던 시절,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고 찬바람을 목도리로 막으며 해야 했던 노동을 <빨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동지섣달 폭풍 냇가에
고등얼음에 콩깍지 잿물 받아서 빨래하면
손발이 터져나갈 듯했네
물을 팔팔 끓여 요강에 담아 가 손을 적셔가며 빨래를 했네
밤에 손이 터서 피가 나고 따갑고 견디기 힘들 때
시어머니 하신 말씀
"야야 오줌을 눠서 거기에 손을 담그라"
내 오줌을 눠서 아픈 내 손 담갔네

"야야 오줌을 눠서 거기에 손을 담그라"란 글귀는 불덩이같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머리 맨 위가 떨어져 나간 듯 몸이 반응하면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고 했다. 바로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싯구가 아닌가?

그렇게 홀시어머니 모시고 시작한 결혼 생활, 그녀는 8남매를 낳았다. 땅마지기 있는 집이래야 1200평, 그 규모로 8남매를 키우기는 녹록지 않았다. 몸이 가루가 되게 일을 하는 세월이었다.
   
황보출은 밭농사만으로는 자식들을 키울 수 없어 담배 농사를 시작했다. 또 이랑 사이로는 호박, 무, 배추를 심었다.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새벽 4시에는 포항 죽도시장으로 한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며 채소를 팔러나갔다. 시 <새벽에 시장가면>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새벽에 시장 가면
검은 털신 신고 검은 비닐봉지도 같이 신었다
새벽 바람 불어 춥다 나무 주워서 불 때고 발을 쬐는데
양말이 불에 타는 줄 몰랐다
국수도 있고 미역국도 있지만 1500원짜리 밥도 못 먹고
집에 돌아오면 허리가 휘청였다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 목에 걸리지도 않고 잘 넘어갔다
그 밥으로 한평생 살았다.

황보출이 이런 세월을 이겨낸 것은 모두 자식 교육에 대한 열망 탓이었다. 초등학교 문턱도 못 들어간 황보출은 어디서나 교복 입은 학생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자식 여덟 중 여섯이나 대학에 보냈고 허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일했다.

그 고생 덕에 큰 아들이 포항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온 마을이 난리였다. 나중에 대덕연구소에 합격했을 때는 전화가 없어서 이장 집에서 소식을 알려왔는데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온 세상을 가진 느낌, 그런데 슬픔도 덩달아 일어났다. 큰딸은 중학교만 마치고 간호조무사 공부를 했고, 다섯째는 산업체 고등학교를 보내야 했고, 일곱째는 생활이 힘들어 대학을 자퇴시켜야 했으니... 큰 아들의 성취는 기쁨이면서 다른 자식들을 생각하면 황보출에게 눈물이었다.

남편이 그리워 쓴 시
 

자장암에서 황보출 포항 운제산 자장암은 그녀가 8남매를 키우면서 늘 기도드리는 곳이다. ⓒ 민병래

 
중매로, 재취로 들어간 시집. 결혼하자마자 군대에 갔던 남편. 경상도 남자가 그렇듯 무뚝뚝하고 밖으로만 돌았던 남편은 8남매를 함께 키워내며 늦정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이 예순둘에 골수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아픔을 황보출은 잊을 수 없다. 까막눈이었던 그녀에게 남편은 더할 나위 없는 의지였다.

"신랑 있을 땐 글자 한 자 몰라도 불편함이 없었어. 영감이 데불고 다니고, 은행이고 동사무소고 다 영감이 다니면서 했으니 아쉬울 일이 없었지. 그런데 우리 영감 가고 나니 참 막막하데요.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니 이름을 쓸 줄 알아야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은 <그 사람은 내 마음 알까>에서 읽을 수 있다.
 
산에 올라가서
'야호!' 산이 쩍쩍 울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불러도 소식 없네.
내 귀에는
그 사람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들릴 듯한데

남편은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문이나 철학공부를 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다. 집집마다 과일나무 한 그루만 심어도 흉년 때 밥은 안 굶는다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내기도 했다. 속 깊은 정이 있어서 무, 배추 농사를 짓고, 그것을 팔러 경운기를 타고 가야 할 때 "너는 추우니께 버스 타고 가라"고 배려해주던 남편이었다. 

황보출에게 그때가 특히 힘들었던 건 줄초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을 예감한 시어머니가 남편이 죽기 3일 전에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시고 아들보다 먼저 가는 길을 택해 농약을 마셨다. 남편도 어머니 발인이 끝나자 눈을 감았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한꺼번에 떠나보냈으니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 그녀는 얼굴은 수그리고 옷은 어둡게 입고 살았다.

매일 쓴다, 한 줄씩 한 줄씩
 
황보출은 칠십이 넘어서야, 이문동에 사는 막내딸 간청에 포항 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들일, 물일만 하던 그녀가 서울 골목길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때 딸이 우연히 '한글교실'을 알게 되어 수강을 권했다. 그녀는 입학해서 정성껏 공부했다. 막내딸이 인천으로 이사를 하니 거기서 4시간을 들여 이문동을 오갔다. 셋째 딸네인 경기도 퇴촌에서 살았을 때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지하철을 타야 했다. 다시 막내딸이 고향 포항으로 이사가며 합치게 되자 한 달에 보름은 퇴촌 셋째딸네 머물면서 푸른 어머니 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나에게 땅이야. 땅도 아무 욕심도 없어. 암만 사람이 후벼 파고 생살을 내 먹어도 니 와 그리 많이 내 먹노, 하나 말이 없잖아. 최고 진실하지. 학교가 나를 땅처럼 품어줬어. 칠십 년을 산골에서 살던 무지랭이가 글씨를 배우니 세상이 환해졌어. 선생님들한테 고마워. 못해도 늘 격려해 주고 건강 염려까지 해주시니..."

황보출은 요즘 새벽 4시면 일어나 명상을 하고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린다. 그리고 법정스님의 '인생응원가'를 베껴 쓰며 문장 공부를 하고 있다. 오일장 날이면 집 앞 밭뙈기에서 기른 쪽파와 마늘을 가지고 오천시장에 나간다. 쪽파를 팔아 만오천 원을 벌기도 하고 코로나로 오일장이 못 열릴 때는 근처 반찬가게에 못 팔게 된 마늘을 '납품'해서 삼만오천 원을 벌기도 했다. 모시고 살아주는 사위에게 소주 한잔 사는 게 큰 기쁨이다.
 
황보출은 지금도 매일 한 줄씩 쓴다. 예전에는 할머니가, 까막눈이었던 할머니가 쓴 시여서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두 권의 책을 낸 할머니 시인, 아니 황보출 시인이다. 문장에는 이제 의젓하게 향기와 숨결이 배어 나온다. 그래서 일본의 할머니 시인, 백 세에 시집을 펴낸 시바타 도요는 <약해지지 마>에서 이런 글을 남긴 걸까?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 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바다와 산, 줄여서 바산이란 개는 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며 도반이다. ⓒ 민병래

 
 
못다한 이야기

① 푸른 어머니 교실은 사단법인 푸른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종석 교장님, 서화진 교감님이 26년간 꾸려왔습니다. 해마다 백여 명씩 꾸준히 수강생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홈페이지 푸른사람들 (http://www.epurun.org)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② 황보출 할머니의 첫 시집 <「가」자 뒷다리>는 이성수 시인이 세운 출판사 '돋보기'에서 펴냈습니다. 이성수 시인은 '푸른 어머니 학교'에서 황보출 할머니에게 시를 가르친 분입니다. 안타깝게도 판매 실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③ 이 글을 쓰는 데 김이경 작가의 <시 읽는 법>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본문 중에 있는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정의는 위 책, 24쪽의 번역을 다소 가감해서 인용했습니다.
 
④ 2020년 10월에 나온 책은 <푸른 어머니학교>에서 출간했고 시화집 형식으로 네 권입니다. 할머니의 그림과 직접 쓴 문구를 선정, 손에 꼭 쥘 수 있는 판형으로 <시인 할머니의 하루하루> <시인 할머니의 두근두근 사랑> <시인 할머니의 욕심없는 삶> <시인 할머니의 거짓 않는 사연> 네 권에 스티커 배지까지 곁들여져 출판되었습니다. <「가」자 뒷다리>가 본격 시집이라고 한다면 이번에 출판한 책들은 권당 30~40쪽 내외로 아기자기하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푸른어머니학교 (02-964-7530)나 독립서점(스토리지 북앤필름 해방촌점, 스토리지 북앤필름 강남점, 이후 북스,커넥티드 북스터오,고스트북스,라바북스,어떤 바람,터무니책방)이나 네이버쇼핑(https://smartstore.naver.com/now_afterbooks/products/5162038117)에서 '시인할머니'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⑤ 황보출 할머니의 유년 시절 기억 속에서 빼놓치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식구가 모여 앉아서 밥을 먹으면 늘 부족한 데도 밥이 남았어 서로 많이 먹으라고 배부르다고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고... 다른 식구들도 일어나고" 이런 따뜻한 추억 덕에 할머니의 시는 어떤 작품에도 아랫목 온기같은 따뜻함이 있습니다.
 
⑥ 황보출 할머니가 담배농사를 추억하면서 털어놓은 얘기는 안쓰럽습니다. "담배 농사에도 안타깝게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외려 빚이 늘어갔다. 담배 농사를 지을 때 수확하고 돈을 받아서 방바닥에 죽 펴놓았다. 아이들도 다 불러서 돈 구경하며 "우리 부자다"하고 서로 웃었다. 그런데 다음 날 외상 갚고 빌린 돈 갚고 나면 꼴랑 5000원이 남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대학생이 네 명씩이나 있던 때였다."는 얘기였습니다다.
 
⑦ 어머니 학교에서 인생을 찾았다는 그녀는 이런저런 경력도 쌓고 이름도 알렸습니다. KBS '낭독의 발견'에서 시 낭독을 했고, 전국문해교육협의회에서 주최한 제3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작년에는 후쿠오카에 가서 한국과 일본에서 늦깍이에 글자를 깨우친 노인들과 교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 황보출은 "어렸을 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이 있습니다"라는 멋진 인사말을 했습니다.
 


B컷 사진들 
 

오천장터에서 황보출 텃밭에서 판 쪽파, 마늘을 오천 오일장에서 판다. ⓒ 민병래

 

할머니는 지금도 손을 놓지 않고 조그만 밭을 임대해서 농사를 짓는다. ⓒ 민병래

  

할머니의 일기장. 매일 일기를 쓰시려 노력한다. ⓒ 민병래

   
 

2019년 후꾸오카에서 열린 한일문해교육자협의회에서 선언문을 발표하고.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황보출 할머니.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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