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4 19:31최종 업데이트 20.11.1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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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8일 일본을 비공식 방문해 강제징용 문제를 비롯한 양국 현안들을 논의했다. 10일에는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만났다.
 
구체적인 의제나 접촉 대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58년 전 이맘때도 국가정보원장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을 방문해 식민지배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1962년 11월 12일의 김종필·오히라 메모(김·오히라 메모)다.
 
한일협정으로 통칭되는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이 체결된 것은 3년 뒤인 1965년이지만, 그 윤곽은 김·오히라 메모에 의해 합의됐다. 일본이 제공할 금액과 제공의 방식이 이 각서에 대체적으로 정리됐다. 3억 달러는 무상으로, 2억 달러는 유상으로, 1억 달러는 상업차관(수출입은행 차관)으로 제공하기로 정해졌다. 이 중에서 상업차관만 1965년에 3억 달러로 늘어났다.
 
그런데 '얼마를 어떻게 지급한다'는 합의됐지만 '왜 지급하는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한국 측은 청구권에 기초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것으로 처리하고자 한 데 반해, 일본 측은 굳이 줄 필요가 없는 돈을 거저 주는 것으로 처리하고 싶어했다. 김·오히라의 11월 12일 회동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지만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다.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이름"

일본은 지급 명목을 '무상공여'나 '무상원조' 혹은 '독립축하금'으로 하고 싶어 했다. 무상공여·무상원조도 문제지만, 독립축하금은 더욱 그랬다. 국교를 맺자고 시작한 협상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모하고도 불필요했다. 협상을 파탄 낼 생각도 아니면서 이런 용어를 끄집어냈으니, 상대방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품을 만했다.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 연합뉴스


이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1962년 10월 16일 자 <경향신문> '독자의 광장'란에 실린 독자 투고문에서도 접할 수 있다. 투고의 주인공은 지금은 서울 종로구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동대문구였던 창신동의 김을수였다. 그는 '청구권 문제에 양보 말자'는 글에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일제의 착취와 민족압살정책의 구원(舊怨)을 잊고 국교의 정상화라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회담에 임해 왔었다"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액수도 말이 안 되지만, 독립축하금이니 무상원조니 하여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이름을 붙여 섬나라 근성의 체면치레를 하려 한다. 우리는 그 가증한 간계를 이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는 "경제협력이니 대한(對韓)차관이니 하는 말도 듣기 싫다. 반세기에 걸친 침략의 소행을 한민족은 잊을 수 없다. 일제가 살해한 우리 동포의 생명, 피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하겠다는 말인가?"라며 분개했다.
 
보름 전에 나온 9월 29일 자 <동아일보> 1면 하단의 '횡설수설' 코너는 더욱 더 직설적인 방식으로 비판을 가했다. 이 코너는 "더구나 우스운 것은 청구권에 의한 보상 대신 독립축하금으로 지불하겠다는 도깨비 용어까지 내세운다는 사실이다"라며 이렇게 비판했다.
 
청구권은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요구할 권리, 무상공여나 독립축하금은 '희사의 혜택'을 우리에게 베푼다는 것. 금액의 얼마는 둘째 치고 전혀 의취(意趣, 함의)와 성질이 다르다. 전자는 36년 동안 우리의 고혈을 착취한 변상금으로 '내놓아라' 하는 권리의 주장, 후자는 '앗다, 보태 써라' 하는 선심의 시혜! 거기엔 양편이 권리도 의무도 모두 없다. 주면 주고 안 주면 안 주는, 마음 내키기에 따라 자유재량에 달렸다. 또한 '내라'고 할 이유도 조건도 붙을 수 없다.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 20일이다. 본회담은 4개월 뒤인 1952년 2월 15일 열렸다. 그래서 1962년은 한일회담이 개시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일본은 1961년까지의 6차례 회담을 통해서도 한국을 많이 자극했다. 하지만 독립축하금 수준의 모멸적인 언사까지는 쓰지 않았다. 한국을 자극하면서도 한국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돌변한 일본

그랬던 일본이 1962년을 전후해 달라졌다. 문제의 용어도 이때 등장했다. 용어의 출처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대신으로 있는 외무성으로 추정됐다. 1962년 9월 6일 자 <동아일보>의 도쿄 특파원 기사인 '10년 교섭도 모자란가?'는 이렇게 보도했다.
 
요즘 일본의 몇 중앙지(紙)들은 독립축하금이라는 용어를 곧잘 사용한다. 이 새 용어의 원천지는 일본 외무성인 것으로 믿어지며, 청구권의 존재를 젖혀놓고 자주 사용된다.
 
독립축하금 용어가 등장하는 시기에 일본의 태도도 현저히 달라졌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한국에 대한 노골적 자극을 서슴지 않았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쌍방 합의가 없으면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발언함으로써, 청구권으로 해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자국의 의중에 달려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일도 있었다. 또 일본 정부가 자국 어선들의 한국 침입에 대해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도 있었다. "과거 같으면 한·일 양국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엔 서로 상대방을 자극할 만한 발언과 행위를 삼가"했다면서 위 기사는 일본의 달라진 태도를 비판했다.
 

오히라 일본 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62.10.20) ⓒ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외무성이 진원지로 추정되는 독립축하금이라는 용어가 함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쿄에 근무하던 이웅희 특파원은 "패전국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어떻게 축하한다는 말인가?"라며 분노의 심정을 기사에서 토로했다. 그는 일본이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추적했다.
 
일본 측은 한일교섭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한 배짱을 튀기며 한국 측의 양보를 얻으려는 온갖 교묘한 수단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한국 여론을 잘 선도하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부와 교섭을 추진하는 게 손쉬울 것이라는 말까지 마구 하고 있다. 민정 이양 후면 한국의 국회 등이 한일교섭 진행에 시끄러운 잡음을 가해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너희의 독립을 축하하노라'라며 한국에 돈을 쥐여주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 원동력은 바로 1961년 5·16 쿠데타였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국 여론을 잘 선도하고 있다며 만족해했다. 그래서 박정희가 민간 정부에 권력을 넘기기 전에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박정희의 권력이양은 그 후 18년간이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 다카키 마사오... 일본의 안도

5·16 직후에 북한 정권이 공산주의 경력을 근거로 박정희에게 기대감을 가진 것과 달리, 일본 정부는 정반대의 우려를 품고 있었다. 1952년에 이집트 장교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1959년에 쿠바 혁명이 일어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1961년 이전의 10년 동안에는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봉기의 기운이 고조됐다.
 
박정희의 실체를 잘 몰랐던 일본은 5·16이 민족주의 쿠데타가 아닌가 하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가 다카키 마사오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그 우려는 안도감으로 변했다.
 
일본의 우려를 한층 더 불식한 것은 쿠데타 6개월 뒤인 그해 11월 12일 이뤄진 박정희의 일본 방문이다. 이때 박정희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나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고 귀국했다. 이렇게 조성된 양국 정부 간의 상호 신뢰는 1962년부터 일본 외무성과 일본 언론이 독립축하금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한국 국민들의 감정을 더욱 더 해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 문경환


물론 박정희나 김종필이라고 해서 독립축하금 용어를 환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등장으로 인해 '욱일승천'하게 된 일본 정부의 자신감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1962년 11월 12일 오히라를 만난 김종필은 일본이 제공할 돈이 청구권 자금 혹은 사죄 배상금이라는 점을 명시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각서를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오히라 메모는 돈을 왜 주는지를 명시하지 않은 '명목 없는 각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이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고 선전할 수 있는 여지가 그렇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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