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9 08:02최종 업데이트 20.09.2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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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최고위층 인사와 가사도우미의 법정다툼을 보도한 BBC 코리아의 기사 ⓒ BBC 코리아 뉴스 갈무리


지난 9월 25일 BBC코리아에 "누명 쓴 가정부는 어떻게 싱가포르 백만장자와 싸워 이겼을까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저 역시 지난 22일에 오마이뉴스를 통해 소개했었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이공항그룹 회장 리우가 자기 집 가사도우미 파르티를 도둑으로 몰아 경찰에 신고 했습니다. 1심 재판에선 유죄로 판결이 났는데, 법정 공방 끝에 2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알고 보니 부당노동행위를 시킨 게 들통날까봐 싱가포르에서 쫓아내려고 허위신고를 한 겁니다. 판결 후 리우 회장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싱가포르는 법과 공권력이 계급에 따라 불공정하게 적용된 게 아니냐 하는 문제로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자 주) 이 기사를 읽기 전에 "가사도우미에게 재판서 진 고위공직자... 추악한 사건 전말" (http://omn.kr/1oz2r) 기사를 먼저 읽고 오시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BBC는 어떤 식으로 보도를 했는지 궁금해서 자세히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이 제가 아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고, 전체적으로 매끄럽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딸에게 읽어 보라고 했더니 BBC 기사는 "스토리랑 감정이 없"고 "AI가 쓴 거 같은 느낌" 이라고 했습니다. 
 
시민기자인 제가 쓴 기사가 BBC의 기사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아서 우쭐해졌습니다. 물론 가족의 평이긴 해도 평소 제 기사에 독한 비평을 하던 딸의 평이니 믿을 만합니다. 가족이라고 딱히 더 봐주는 것 없습니다.

수준 이하

그런데 기사를 계속 읽을수록 제 기사가 BBC의 기사보다 나은 게 아니라 이번 BBC의 기사가 수준 이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건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다 담겨 있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결정적으로 틀린 정보를 담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아주 많이.

BBC가 어쩌다 이런 수준의 기사를 내놓나 싶어 누가 쓴 기사인지 확인을 하려 했습니다. 기사에는 기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검색해 보니 이 기사는 22일에 나온 BBC의 영문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거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BBC의 원래 기사입니다. BBC코리아의 기사는 이 기사를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 BBC 뉴스 갈무리


"백만장자와 싸운 가사도우미 사건이 싱가포르를 사로잡은 이유" (Why the case of a maid who battled a millionaire has gripped Singapore) 라는 제목의 기사가 원본입니다. 기자는 싱가포르의 '이베트 탄'(Yvette Tan)

원래 기사는 한국어로 번역된 기사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사건에 대해 전반적인 정보를 다 갖추고 있었고, 한글 번역 기사와는 달리 틀린 정보를 담지도 않았습니다. 한글 기사와 원본 기사를 비교해 가며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BBC 뉴스 기사 내용 ⓒ BBC 뉴스 갈무리

 
BBC코리아 기사 : 판결문에 따르면 파르티에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새집을 청소하라는 임무가 주어졌고, 파르티는 최선을 다해 일했다. 판결문은 파르티가 업무 시간을 벗어나는 요구에도 불평 없이 일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원문 직역 : 사건의 순서가 자세히 설명된 판결문에 따르면, 파르티는 "여러 번" 그의 새집과 사무실을 청소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 이는 지역 노동 규정 위반이면서 그녀가 여러 번 불만을 표한 일이다.


일 자체가 불법이고 파르티가 불만을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알(리우의 아들)이 다른 집과 사무실 청소를 시켰다는 원래 내용이 파르티가 "최선을 다해 일했"으며 "불평 없이 일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는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글 기사 내용대로라면 가사도우미가 해고당할 이유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BBC 뉴스 기사 내용 ⓒ BBC 뉴스 갈무리

 
BBC코리아 기사 : 카알은 그에게 2시간 만에 짐을 싸서 집을 나가도록 했다. 파르티는 짐을 몇 개의 상자에 담아 배를 통해 인도네시아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다.

원문 직역 : 그녀에게는 (리우) 가족이 인도네시아로 배송해 주기로 한 여러 상자에 그녀의 소지품을 넣는 데 2시간이 주어졌다. 그녀는 같은 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리우 가족이 파르티의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두고 그녀가 훔쳤다고 고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 말은 파르티가 물건을 상자에 넣었지만, 그 상자는 인도네시아로 보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파르티의 상자를 리우 가족이 나중에 열어서 물건을 다 확인하고 도난당했다고 신고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 기사에는 파르티가 상자를 인도네시아로 보내 버린 걸로 나왔습니다.
 

BBC 뉴스 기사 내용 ⓒ BBC 뉴스 갈무리


BBC 코리아 기사 : 찬 판사는 또 경찰이 고발장을 접수한 뒤 한 번도 현장을 돌아보지 않았고, 말레이어만 구사하는 그녀에게 통역을 붙여주지도 않았던 점을 지적했다.

원문 직역 : 경찰은 또한 그녀에게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하는 통역사를 제공하지 않았고 대신 파르티가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다른 언어인 말레이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제공했다.


파르티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사도우미입니다. 당연히 인도네시아어(인도네시아 말레이어)를 씁니다. 경찰이 통역을 시킨 사람은 말레이시아어 (말레이시아 말레이어)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파르티가 조사받는 과정에 충분히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방어권이 제한되었다고 본 겁니다.

본문에는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시아어를 분명히 구분해 두었는데, 한글 기사는 파르티가 "말레이어만 구사하는" 걸로 표현해서 문제가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소개한 것 외에도 사실과 반대되거나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더 있습니다. 원본 기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반대로 해석하거나 없던 정보가 들어간 겁니다. 한글로 된 기사를 보면 회장하고 가사도우미가 왜 4년이나 싸워야 했고, 그게 왜 지금 싱가포르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해외 유력 언론이라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뉴욕타임스>가 아시아 디지털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BBC가 한글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최근 한국의 언론 환경이 해외 유력 언론의 출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신을 찾게 되고, BBC나 <뉴욕타임스> 같은 해외 유력 언론이 직접 한글 기사 서비스를 하는 경우 이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로 쓴 기사를 한글로 번역해서 서비스 할 때는 제대로 된 번역도 중요하지만 해당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번역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또 한 명의 기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뒷받침 없이 단순한 외신의 번역 서비스에 그칠 경우 BBC 같은 유력 언론사라 할지라도 이처럼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 가운데 영어나 일본어로 기사를 번역해서 서비스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을지, 또 외국인들이 그 기사를 읽고 한국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해외 유력 언론의 보도라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신뢰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BBC마저도 이렇게 많은 오류를 범하는 현실이니까요. 해외 유력 언론의 기사를 단순 번역한 것보다는 세계 곳곳에 상주하면서 현지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는 시민기자의 기사가 좀 더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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