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 20:58최종 업데이트 20.08.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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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한 사회의 지적, 문화적 성취와 흔적을 담은 보고이며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틀 안에서만 생명력을 발휘하는 유기체다. 책이 일반 상품들과 다른 법체계를 따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1981년 프랑스에서 통과된 도서정가제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면, 책이 놓이는 곳이 어디든, 같은 가격으로 유통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책의 다양성을 지켜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인 동네 서점이 시장의 무자비한 질서 속에 살아남게 하기 위한 장치다.

 40년 전 생겨난 이후 도서정가제는 탁월한 존재 의미를 입증하며 프랑스 사회에서 건재해 왔고, 독일을 비롯한 다른 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도 책의 생태계를 지키는 금과옥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도서정가제의 전면 재검토를 발표하고 나섰다.  청와대 게시판에 '도서정가제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 청원이 20만이 넘는 서명을 얻은 후 이뤄진 급격한 변화다.
 
프랑스인들은 도서정가제로 무엇을 얻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을 경험했기에 같은 이름을 가진 하나의 법률이 이토록 다른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걸까?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이곳 여론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존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나 프랑스 정부와 유럽연합은 이 법에 대한 수호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현장의 목소리를 파악할 겸 동네 서점을 찾았다. 파리 근교 인구 5만에 불과한 작은 도시 뱅센에 자리한 밀빠쥬(MillePages 천 페이지)라는 서점이다. 평소 얼굴을 익혀둔 직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지금 한국에서 도서정가제가 퇴출 위기에 놓여서" 그의 눈에 순간 불꽃이 튄다. "도서정가제는 프랑스에서든, 한국에서든 반드시 지켜야 하므로" 그는 나를 디렉터에게로 모시고 갔다. 

25년간 서점에서 일해온 밀빠쥬의 디렉터 파스칼 튀오(Pascal Thuot)는 자신의 직원과 똑같은 사명감으로, 도서정가제가 태어난 배경과 그것과 함께 성장해 온 서점의 역사로 나를 안내했다.
 

동네 사람들은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더 애틋한 연대의 마음으로 서점을 지지해 주었다. 대형 서점, 대형 마트, 온라인 쇼핑이 주는 얄팍한 편리를 포기하고 내 곁의 이웃과 더 공고히 손잡는 마음이 지역 서점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목수정

 
출판계 두 거장이 마련한 유토피아 
 
공교롭게도 이 서점은 도서정가제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1981년. 올해 마침 40주년을 맞이한다. 그들이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서정가제는 동네서점들을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대거 탄생시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회당 정권이 마침내 집권했던 그 해 많은 이들은 그동안 꿈꿔왔던 개혁안들을 집권 세력에 전달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 전문 출판사인 갈리마르(Gallimard)와 미뉘(Edition de Minuit)의 대표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문화부 장관이 될 자크 랑에게 전했다.

프랑스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오래 작업해온 이 양대 출판사는 먼 곳으로 시선을 던져 그들이 구축한 문학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상했다. 문학이 어떤 시대적 변화를 맞더라도, 장기적으로 책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적절한 매개자인 동네 서점이 무너지지 않을 법률적 틀을 마련하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각각의 작가들이 만들어낸 문학이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동네 서점 주인의 손에 선별되어 꽂히고, 그 서점들이 구축한 지역 독자들을 통해 뿌리 뻗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초기에 서점업계는 그들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가격 정책을 유동적으로 구사할 수 없는 건 다소 불편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당시엔 인터넷 서점이 없었으니 대형 서점 프낙(FNAC, 우리나라의 교보문고처럼 초대형 매장과 체인을 가진 대형서점)이 가장 큰 위협 세력이었다. 프낙에선 책을 여러 권 사면 즉석에서 할인을 해주었으나 도서정가제 도입으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네 서점들은 프낙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상황은 동네 서점들의 출현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아마존을 대표로 하는 인터넷 서점들이 동네 서점을 위협하는 막강한 경쟁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동네 서점과 아마존에 같은 가격으로 책을 공급해야만 하며 아마존은 책을 배송할 때 배송료를 무료로 해줄 수 없도록 규제를 받았다. 비로소 동네 서점들은 도서정가제라는 수호천사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도서정가제 성공의 산증인인 밀빠쥬 속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들어가 보았다. 다음은 디렉터 파스칼 튀오와 나눈 일문일답 
 

프랑스 뱅센의 독립 서점 밀빠쥬(Millepages)의 디렉터 파스칼 튀오 ⓒ 목수정


- 동네 사는 독자의 눈으로 보기에 밀빠쥬는 아주 잘 되는 서점으로 보인다.
"1981년 40㎡ 작은 서점에서 출발해 40년 만에 직원 25명이 있는 800㎡ 규모의 서점으로 성장했다. 지금 어린이 서점이 있는 자리가 최초의 자리다. 서점이 생긴 이후 매출이 줄어든 적은 없다. 매년 성장해 왔다."
 
- 시에서 지원을 받나.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받진 않지만 우리가 있는 이 건물은 시가 절반의 지분을 가진 공공건물이다. 시가 우리 집주인이다. 뱅센 시는 우리 서점의 존재가 시의 정체성과 시민들의 문화적·지적인 생활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있고, 지원을 받진 않지만 시세보다 훨씬 적은 집세를 낸다. 매출의 4% 정도가 집세다. 재정이 여유롭지 않을 땐 임대료를 줄여달라고도 요구한다. 그리고 26%가 인건비다.

수익이 매출의 39% 정도 되는데 두 가지를 제하고 나면 약 10% 정도의 이윤이 남는다. 이 돈으로 공간을 쾌적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독자들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연다. 서점은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쾌적함, 지적인 자극과 호기심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 서점 앞 쇼윈도를 보니 지금은 아프로-아메리카 관련 주간인 듯하다. 이런 식의 행사를 얼마의 주기로 하고 있나.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  이후 아프로-아메리카 서적 행사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장기간 할 계획이다. 우린 늘 새로운 이슈를 제시하고, 주제를 선정해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 책에는 서점이 작성한 책에 대한 깨알 같은 메모가 꽂혀 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한 건가? 
"서점 문 열 때부터. 그게 독자들을 향해 우리가 다가가는 방식이다. 우린 독자들과 책을 매개하는 사람들이다. 책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넌지시 전하면 독자들이 다가오기 쉬워진다. 각각의 독자와 맺는 끈끈한 관계가 동네 서점으로서 우리의 장점이고 전략이다. 독자들이 책에 대해 질문하고 의견을 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답하며 책을 통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간다." 
 

책마다 서점 직원들이 적어 놓은 서너줄 평 독자들이 책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각 코너의 담당 직원들은 책을 읽고 나름의 추천사를 책 위에 손글씨로 적어 붙여 놓는다. ⓒ 목수정

 
- 매년 밀빠쥬 상을 선정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는 건가?
"매년 우리가 팔아온 책 중에서 국내 서적 2권, 번역서 2권을 선정해 상을 준다. 그 책을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 놓고 수상 결과를 독자들에게 널리 알린다. 8월 경부터 어떤 책을 후보에 올릴지 토론하고 가을에 직원들끼리 투표해서 수상한다. 우리에겐 매우 중요한 행사다.  공쿠르상 수상작보다 우리 상을 탄 책이 우리 서점에서는 더 잘 나간다."
 
-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25명의 직원을 감원하지는 않았나.
"전혀. 셧다운 할 때는 모든 직원이 정부가 제시하는 일시적 실업 급여를 신청했고, 셧다운이 해제되면서 모두 다시 나와서 일하기 시작했다. 셧다운 기간에도 우리와 오래 관계를 맺어온 독자들을 위해 책을 주문 받고 집에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했다. 다른 직원들은 집에 있었지만 나는 고객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그 일을 혼자 했다."
 
- 셧다운은 해제되었지만 코로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매출엔 지장 없나?
"별 지장 없다. 코로나 위기를 거치면서 주민들 간에 연대하는 마음이 한층 더 강해졌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더욱 또렷해졌다. 우리에게 없는 책은 주문해서 며칠 기다렸다 가져간다. 그런 기다림에 서로 익숙하다. 아마존에서 검색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며 구해달라고 한다. 아마존을 돕는 것보다 동네 서점과 공생해야 한다는 생각인 거다. 코로나 거치며 지역 농산물, 지역 상품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 것처럼."
 
-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는 데 익숙해지고 SNS나 유튜브 등에 시간을 빼앗긴다.  프랑스에서 도서정가제를 파괴하려는 온라인 서점들의 공격은 없었나.
"물론 있었다. 아마존 같은 인터넷 서점이 로비를 하고 언론을 통해 안 좋은 여론을 퍼뜨린다. 그러나 어떤 정부도 감히 이 법을 흔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일단 이 법은 정부에 아무런 부담도 없다. 어떤 조세 저항도 일으키지 않는 작동하기 쉬운 법이다.

그에 반해 이 법이 가져다 주는 이득은 명백하다. 동네 서점이라고 하는, 책이 생존하고 전달되는데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이 법이 지킨다. 이걸 없애고,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만 살아남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독자를 소비자로 바꿔버리는 행위다.

서점 주인들 가운데엔 훌륭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서점은 출판인들이 알고 있는 책이 독자들과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다. 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으로 선별한 책으로 지은 집이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독립 서점들이 중요한 건, 그 서점의 개수 만큼의 창조성, 문학의 다양성, 책의 다양성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만 남으면 출판계의 다양성이 축소된다. 소위 베스트셀러만 판매될 것이다. 그건 책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생명력을 축소하는 길이다. 이 모든 걸 멀리 내다보고 이 법이 만들어진 거다.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작가들이 길게 살아남게 하기 위해 두 출판사가 지혜를 모은 셈이다. 도서정가제는 출판계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토대인 셈이다."
 
- 도서정가제가 동네 서점들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게 사라지면 당연히 동네 서점들도 사라진다. 동네에 서점이 사라지면 지적인 마을의 심장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걸 정치인들도 알기 때문에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지자체에서도 밀빠쥬가 활력을 지속해야 도시의 상가 전체가 활력을 함께 누린다는 걸 잘 안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동네 서점의 의견을 물으러 갔는데 서점의 디렉터는 법을 창안한 두 선각자들이 가졌던 최초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그 법과 함께 태어난 이 서점은 법이 제공한 환경 속에서 20배로 성장했다. 몸집은 커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는 동네 서점의 DNA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할인은 안 되지만... 국민 1인당 6.3권씩 책 산 비결 

프랑스에선 2019년 한 해 4억 1900만 권의 책이 판매되었다. 6700만 인구가 평균 6.3권씩 책을 산 셈이다. 그 중 온라인 서점의 판매 비율은 20%, 동네 서점의 비율은 22%다. 한국의 2018년 책 판매량은 1억 1700만 권이다. 인구 한 명 당 평균 2.3권을 구입한 셈이다. 온라인 서점 판매 비율은 53.1%, 동네 서점 구입비율은 10.6%다.  단순 비교하자면 우린 최대 15%까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을 가졌지만 온라인 서점에서도 책값을 안 깎아주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게 책을 산 셈이다.    
 
이번 청와대 청원을 주도한 도서정가제 폐지를 말하는 사람들은 도서정가제가 낳은 최대의 비극이 ▲도서 '소비자'의 책구매 외면 ▲ 종이책 신인 작가의 멸절 ▲ 중소 출판사 경영 최악 상황 ▲ 지역 서점 감소 지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00여 개 전국 동네 서점들의 모임인 '동네책방네트워크'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현실과 다르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고 있다는 현실이 무색하게 온라인 서점엔 10%의 책 가격 할인과 5%의 적립 할인이 허용되어 독립 서점들에 불리한 구조를 제공한다.

그런데도 "2014년 법개정 이후, 101개에 불과했던 독립서점은 2020년 650개로 늘었고, 신생 출판사 또한 2013년 4만 4148개에서 2018년 6만 1084개로 증가했다."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19일 성명 중에서)

독자들이 점점 독서를 하기 힘들어지는 첫 요인으로 꼽은 것은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19.4%)이지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1.4%)이 아니다.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지켜지는 도서정가제는 서점이란 매력적인 자기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삶을 펼치고자 하는 청년들의 창업에 힘입어 다양한 형태로 전국에 독립 서점들을 확대했다. 이런 현상은 출판물의 다양성을 견인하기도 했다.  
 
프랑스 동네 서점들이 경험하고 예견하던 것들을 고스란히 우리 동네 서점들도 체험하고 실현해 가던 중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서정가제의 폐지가 아니라 이제 막 뿌리 내리기 시작한 동네 서점들을 응원하는 강력한 제도 보완, 막강한 도서정가제로의 개혁이다. 북소믈리에 역할을 하는 책방 지기가 책과 동네 사람들을 맺어주는 일은 10% 할인해 주고 총알배송 해주는 시스템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현재 온라인 서점에 유리하게 지급되는 책 공급률은 도서정가제의 취지에 맞춰 작은 서점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온라인 서점에 허용되는 할인도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 서점이 창업을 하거나 확장을 할 때 정부는 동네서점지원기금 등을 무이자 대출이나 직접적인 지원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 서점들이 확산되고 뿌리 내리는 걸 돕는 방법도 검토되어야 한다. 앞선 사례처럼 지자체가 공공 건물에 낮은 임대료를 받고 서점을 맞이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책을 공산품으로만 취급해 싼값에 소비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다양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할 것인가. 우린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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